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7화 (18/171)
  • 제17화. 설득

    “그래, 핀이라고 하자.”

    “핀…?”

    “예쁜 이름이지? 새하얗다는 의미가 있어.”

    아이는 무척 경계심이 많아 보였다.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런 어린애가 저토록 겁먹은 얼굴을 하는 걸까. 안쓰러움과 동시에 제라니아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아이가 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 자리에서 멈춘 다음 제라니아는 무릎을 굽혀 앉았다. 침대에 앉아 있는 아이와 시선을 맞추며 그는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널 어떻게 할지 걱정돼?”

    제게로 향하는 시선에서 답을 읽어낸 제라니아가 웃었다.

    “걱정 마. 나는 너를 팔아넘길 생각이 없어.”

    “거짓말!”

    날카롭고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당황했는지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아이는 마치 다친 짐승을 연상시켰다. 도망가고 싶은데 막다른 곳에 몰린 것 같은 위태로운 얼굴이.

    제라니아는 화를 내지 않았다. 차분하게 아이와 눈을 맞추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야. 잘 들어봐. 음, 나는 돈이 많거든.”

    “……?”

    “너 하나 팔아서 무슨 이득을 보겠니?”

    “다들…. 팔려 갔는걸요.”

    “뭐?”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두려움이 묻어났다. 제라니아는 화제를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제라니아는 주머니를 뒤적거린 뒤 금화 세 닢을 꺼내 흔들었다. 어둠 속에서 화르르 일렁이는 불빛이 금화의 표면을 반짝반짝 비췄다.

    아이는 멀뚱히 금화를 바라보았다. 그 가치가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귀한 물건이라는 건 직감한 것 같았다.

    “핀, 네가 원한다면 나는 지금 당장 네게 이 금화를 줄 수 있어.”

    이 정도면 농노들이 머무는 작은 집 한 채는 너끈히 살 수 있었다. 신기하다는 듯 뚫어져라 제 손가락을 응시하는 아이에게 제라니아는 반문했다.

    “하지만, 그러면?”

    “…….”

    “이 금화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아니? 이 돈을 어디서 어떻게 써야하는지는? 워낙 큰돈이라 그냥 쓰기도 힘들 거야. 환전을 해야 하겠지. 어디서 환전을 할 거니? 상대가 네게서 돈을 떼먹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차분한 음성은 조곤조곤 아이의 귓가를 사로잡고, 그에게 현실을 주지시켰다.

    “네게 당장 필요한 건 이런 금화가 아니라, 안전한 장소지. 안 그러니? 안정적인 수입이 나오는 일자리와 기본적인 식사, 잠자리가 보장되고, 네가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너를 쫓아와도 안전할 만한 피난처.”

    마지막 말을 들은 아이의 작은 몸이 파드득 떨렸다. 작은 손이 제 옷자락을 꽈악 움켜쥐었다.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는 아이에게 제라니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권유했다.

    “난 네게 그걸 줄 수 있어.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 준다면 말이야.”

    아이의 갈색 눈이 놀라움을 담고 반짝거리다가, 의심이 그 반짝임을 집어삼켰다.

    “나한테 뭘 바라는 거예요?”

    아이는 질문했고, 제라니아는 대답했다.

    “내 알량한 만족감.”

    “…네?”

    “내가 세상 모두를 구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너 하나쯤은 어떻게든 할 수 있으리란 자만심.”

    알쏭달쏭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에게 제라니아는 쓰게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협력해줄래? 안 그러면 무서운 아저씨들이 널 끌고 가는 걸 막을 수가 없거든.”

    제라니아는 기꺼이 메리와 아이들이 다정하다고 좋아하던 웃는 얼굴을 핀에게 내보였다. 애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갔을 때, 슬퍼하던 아이들의 얼굴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쿡쿡 아렸다.

    아이의 눈동자에서 웅성거리며 널뛰던 감정들이 하나둘씩 차츰 가라앉았다. 아이가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속삭였다.

    “정말, 절 버리지 않을 건가요? 제게 그런 걸 줄 수 있어요?”

    “물론이지.”

    “정말로?”

    “그럼. 약속할게.”

    힘주어 말하자 그제야 아이는 벽에서 떨어져 제라니아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등불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제라니아는 펜과 종이를 꺼냈다.

    “우선 묻고 싶은데, 너는 어디서 온 거니?”

    아이는 입을 열었으나, 벙긋거리기만 하는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떨리는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를 제라니아는 인내심을 갖고 응시했다.

    “혹시 말하지 못하는 거야?”

    부드럽고 다정한 음성에 아이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인지 몰라요.”

    제라니아는 아차 싶었다. 노예로 키워졌다면 글자를 읽을 줄 모를 테니 간판 같은 걸 기억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럼 혹시, 주변에 어떤 건물이 있는지는 기억하니?”

    “어….”

    아이는 더듬더듬 제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꼼꼼하게 받아 적는 제라니아의 눈동자가 빛났다.

    * * *

    - 비전하랑 그런 얘기를 하셨다고요.

    “그래.”

    푸른 눈동자가 무료하게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 저편에 앉아서 검을 정리하던 티레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등불이 어둠 속에서 맹렬하게 빛났다.

    - 전하도 참. 그럴 때는 그냥 당신 말이 다 맞다! 이러셨어야죠. 왜 굳이 반문을 하십니까? 자고로 부부 관계에선 적당히 둘러댈 줄도 아셔야 하는 법이라고요.

    평소에는 재치 있게 잘만 대답하는 양반이 왜 이러나 모르겠다. 의문 어린 시선에 프란츠는 차분하게 답했다.

    “왜 굳이 그래야 하지?”

    - 비전하의 넓은 마음씨에 제가 다 탄복할 지경이네요.

    기가 차다는 듯 대답하던 티레인에게 프란츠가 무표정한 낯으로 말했다.

    “더 시간 낭비 할 건가?”

    - 아닙니다.

    곧장 입을 다물고 티레인은 거울 너머로 보이는 종이에 시선을 집중했다. 제라니아에게서 들었던 설명을 덧붙이며 프란츠는 지도로 보이는 종이에서 손가락으로 동그랗게 원을 그렸다.

    “이쯤에 있을 것 같다더군.”

    - 우와, 생각보다 자세하네요. 센디아에 있는 거 맞죠?

    “그래.”

    사각사각, 글자를 휘갈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프란츠의 기억 속으로 스며들었다.

    ‘핀이 설명해준 걸 들었는데, 지도를 참고하면 대충 이 부근이 아닐까 해요.’

    아이와 대화를 마친 뒤 제라니아는 곧장 서재로 들어가 센디아가 그려져 있는 커다란 지도를 꺼내 들고 나왔다. 도시의 모습이 꽤나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지도에 여러 가지 숫자들이 필기되어 있었다.

    핀이 했던 말을 적어둔 종이를 참고해, 지도를 테이블 위에 펼치고 설명하는 제라니아를 프란츠는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이런 건 어디서 가져온 겁니까?’

    ‘어릴 때 만들었어요.’

    ‘당신이?’

    ‘네. 제가 만들었다기보다는, 사람을 시킨 거지만요. 만들어두면 꽤 유용할 것 같았거든요.’

    당시는 한창 지리학과 수학에 관심이 많을 때였다. 그래서 공작한테 요청해 영지의 모습과 도시들을 측량해 지도로 만들었다. 물론 지도는 그 전에도 있었지만, 영지 내부를 돋보기로 확대한 것처럼 세밀한 지도는 없다시피 했다.

    이는 관개나 건축은 물론, 세금을 걷을 때도 무척 유용하게 쓰였다. 그만한 품이 들긴 했지만 정리해둘 만한 보람은 있어서 다행이라며 웃는 제라니아를 향해 프란츠는 조용히 물었다.

    ‘카암에는 언제 올라왔습니까?’

    ‘네? 열여덟 살이요. 성인식 끝나자마자 올라왔어요.’

    보통 데뷔탕트를 늦어도 열여섯 살에 하는 걸 생각하면 많이 늦은 나이였다. 이유를 묻자 제라니아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해보고 싶었거든요. 책을 구하기도 수도가 훨씬 쉽잖아요.’

    괴짜라면 더없이 괴짜라고 불릴 만한 발언이었다. 과년한 여인이 결혼 상대를 구하는 게 아닌, 학문을 추구하고자 수도로 올라왔다는 소리를 하고 있다니.

    수도에 올라온 뒤로 고아원이라든가 빈민 지역에 후원도 하면서 꾸준히 방문했다던 보고를 생각하면, 참 열심히 살았구나 싶었다.

    이쯤 되면 제라니아가 말하는 조용한 삶의 기준이 궁금했다.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사람치고는 여러 가지로 파격적인 행보가 아닌가.

    어째서 사교계에 거의 나오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 것치고는 인맥이 상당한 건 그가 공작가의 여식이기 때문일까. 저번 파티에서 제라니아의 옆을 지키고 있던 여자만도 그랬다.

    엘레나 프레망. 사교계에서도 발 넓기로는 손에 꼽히는 여자였다. 적당히 건조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유독 더 기억에 남았는지도. 껍데기에 홀리는 인간만큼 성가신 건 없었다.

    프란츠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래서, 본거지는 찾았나?”

    - 아직입니다. 기사 둘만 붙여주신 것치고는 너무 양심이 없으신 거 아닙니까? 세상에나, 도대체가 무슨 기사를 고작 그것만 끌고 가셨단 말입니까. 본인의 신분이나 입장을 모르지 않으시면서. 제가 정말 전하 때문에 제 명에 못 죽겠다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니까요.

    “보고.”

    - 예. 깨어난 놈들한테 적당히 정보를 캐내려고 해봤는데, 영 소득이 없습니다. 일단 도통 말을 안 해요. 자꾸 목을 잡고 괴로워하는 걸 보니까 말을 못 하나 싶기도 하고. 등에 뭔가 찍혀 있던데, 그거랑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요.

    프란츠의 눈이 가늘어졌다. 티레인은 낙인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피로 만들어져, 상대의 의지와 발언을 제한하는 마법의 한 종류.

    “마법이랑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단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 네. 솔직히 아니기를 바라긴 합니다. 몇 배는 성가시게 될 테니까요. 일단은 이놈들 끌고 길안내를 시켜볼 생각입니다. 재미있게도 비전하께서 가져와주신 그곳이랑 방향이 겹치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수상하긴 합니다.

    테이블을 두드리던 프란츠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신전일까.”

    아이는 도망을 쳤다고 했다. 자신들을 돌봐준다고 하지만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하는 이들에게서.

    다른 곳으로 간 뒤 도통 연락이 없는 친구들을 수상쩍게 생각해 움직이다가 믿었던 보호자가 자신들을 어디론가 팔아넘긴다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틈을 보다 도망을 쳤다는 이야기였다.

    흔하다면 흔한 불행이기는 했다. 그러나 미심쩍은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습격을 받는 그 순간 마차에 뛰어들게 된 이유라든가. 어째서 아이의 등에 살수들의 몸에 찍힌 것과 같은 낙인이 찍혀 있는가라든가.

    아이가 머물렀다는 건물에 무언가 비밀이 있는 건 분명했다. 어쨌거나 조사하면 나올 일이었다.

    - 확률은 반반이라 생각됩니다. 낙인을 다룰 줄 아는 마법사가 신전 외부에 있다면, 사실 그게 더 문제라고 생각하긴 하지만요. 보통 이런 문제는 대개 신전이 전담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신전에 알릴 생각은 없다.”

    - 어련하시겠습니까.

    그에 동의하듯 티레인이 냉큼 대답했다. 그는 가볍게 투덜거렸다.

    - 제롬 이 자식이 이럴 땐 참 좋은데. 감 하나는 짐승 수준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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