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신혼여행 (2)
바닥 곳곳에 핏자국이 보였고, 미약한 쇠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사람들은 이미 대피했는지 길가에는 그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시체들을 하나하나 질질 끌어다가 한곳으로 모아놓고 있는 기사들의 표정은 지극히 침착했다. 제라니아는 천천히 그들 사이를 지나, 마차 근처에서 엎드린 상태로 눈을 감은 채 끙끙거리고 있는 아이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색색 숨을 내쉬고 있는 아이는 딱 봐도 무척 더러웠다. 땟국물이 져 있는 얼굴에 떡진 머리, 옷은 무척 낡고 헐렁한 데다 신발 하나 신겨져 있지 않은 발바닥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마구간에서나 날 법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화살을 맞은 것으로 보이는 등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일단 응급처치는 했습니다만, 빨리 의원에게 보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유심히 아이를 살피고 있는 제라니아의 곁으로 제롬이 다가와 설명했다. 독화살이라 빨리 화살을 뽑아야만 했다며 부연하자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 의원이 있을까요.”
“의원에 들렀다 가실 생각이십니까? 도착하는 시간이 지연될 텐데요.”
“네.”
“의원에 들르도록 하지. 마부도 그렇거니와, 우리 쪽 기사들도 화살에 맞은 자들이 있는 걸로 보이니.”
멀찍이 서 있던 프란츠가 천천히 그들에게로 걸어오며 말했다. 제롬이 알겠다는 듯 목례했다.
제라니아의 곁에 선 프란츠는 제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하나 꺼냈다. 그가 거울에 박혀 있는 작은 보석을 문지르자 거울이 새까맣게 변했다.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가 거울 너머로 들려왔다. 프란츠가 나직하게 말했다.
“즐거운 일이라도 있나?”
- 헉, 전하!?
우당탕쿵탕, 소리와 함께 거울 너머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곧 새까맣던 거울에 빛이 들어오더니 티레인의 얼굴이 거울에 작게 떠올랐다. 면도를 하고 있었는지 턱 주변에 거품이 가득했다.
- 무슨 일이십니까?
“일이 생겼다. 30분 주지. 준비하고 당장 센디아로 날아와라.”
- 예?! 센디아라뇨, 말을 타도 꼬박 하루가 걸리는 곳이잖습니까?!
“공간이동 스크롤을 사용해. 윤허한다.”
- 하아…. 예, 알겠습니다.
내 귀중한 휴일이….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티레인은 군말 없이 대답했다. 연락을 마치고 다시 거울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프란츠를 제라니아가 빤히 쳐다보다가 질문했다.
“마법인가요.”
“예.”
제라니아는 프란츠가 손을 집어넣은 주머니를 퍽 신기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왕국에서는 왕실이나 신전이 아니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철저히 금지된다. 그 정보조차도 철저히 통제되는 만큼, 마법에 관련된 물건이란 어지간한 귀족들도 보기 힘든 희귀한 무언가였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쉬이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그럴 만은 하다지만, 스크롤 하나에 집 한 채 가격을 거뜬히 넘어간다고 들었다.
신전의 그런 동태에 불만을 가진 귀족들도 상당했으나, 마법 관련은 법으로 제정되어 있는 부분이라 쉽사리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의원에 들렀다가 바로 출발해야겠습니다. 말들은 몇이나 남았지?”
“마차를 끌던 말 중 한 마리는 죽었고, 저희가 타는 말은 세 마리가 죽어서 네 마리가 남았습니다.”
“마구간에 가서 말을 구해 오도록. 시체들은 적당히 처리하고.”
“이 근처에 의원이 있어요. 우선 거기로 갈까요?”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총총 앞장서 걸어가는 여인의 뒤를 다른 이들이 따랐다.
* * *
의원에 들렀다가 제롬이 구해 온 말들을 마차에 도로 묶어놓고, 한참 뒤에 도착한 티레인과 인사를 나눈 뒤, 어쨌거나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무사히 데브론 영지의 중심에 자리한 칼리스토 성에 도착했다.
시간을 꽤 지체한 탓에 벌써 보랏빛을 머금은 어둠이 사방에 내려앉아 있었다. 성을 관리하는 총집사가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제라니아 님. 왕세자 전하께서도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이야, 조셉. 잘 지냈어?”
“잘이야 지냈습니다만…. 칼리아 님도 그렇고 코델리아 님도 그렇고, 세 분이 성을 떠나셔서 이 늙은이가 그간 얼마나 적적했는지 모릅니다.”
장난스레 맞받아치는 나이 든 노집사에게 제라니아는 싱긋 미소 지었다. 가벼운 말투로 대화를 나누는 제라니아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프란츠가 말했다.
“방을 준비해줄 수 있겠나.”
“이미 쓰실 방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전하께서 저녁을 못 드셨는데, 식사를 준비해줄 수 있을까? 같이 온 다른 사람들 몫까지도. 아, 그리고 데려온 아이가 하나 있거든. 그 애를 좀 부탁할게. 아픈 애니까 음식은 좀 먹기 편한 걸로 신경 써줘.”
“알겠습니다.”
집사의 안내에 따라 두 사람은 성에서도 상당히 넓은 손님방을 배정받았다. 가운데에 놓여 있는 넓은 침대를 보니 무슨 생각으로 이 방을 배정했는지 알 것 같긴 했다.
외출복을 가지런히 벗어둔 뒤 제라니아는 의자에 앉았다. 뒤에서 침대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으나 애써 이겨냈다. 지금 저기 누우면 잠들 것이 뻔했다.
“와, 진짜 파란만장했네요.”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이틀 만에 온갖 난리를 다 겪은 탓인지, 진이 다 빠졌다.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온 프란츠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정말 그 아이를 돌볼 생각입니까.”
“네.”
돌아오는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지 프란츠가 살짝 미간을 구겼다.
“노예이지 않습니까.”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옷을 벗겼을 때, 의원을 비롯한 모두는 멍 자국이 가득한 몸과 더불어 등에 큼지막하게 자리한 표식을 보았다.
오른쪽 어깨 위쪽에 주먹만 한 크기로 그려져 있는 동그란 문양.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습격을 한 자들과 연관이 있을지 모르는데도 말입니까.”
“저도 그럴 거라 생각해요.”
제라니아는 선선히 인정했다. 애초부터 아이가 마차에 뛰어드는 것으로 시작된 소동이 아니던가.
살수들이 아이에게도 가차 없이 화살을 쏟아부은 걸 보면 직접적인 연관은 없을 가능성이 높긴 했지만, 그럼에도 미심쩍은 구석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애잖아요. 아이가 뭘 알겠어요.”
“안일한 소리군요. 보아하니 열 살은 넘어 보이던데, 충분히 앞가림을 할 나이가 아닙니까.”
왕국의 남자아이들은 대개 일곱 살에 기사 수련을 시작하고, 스무 살이 넘어가면 기사 서임식을 받게 된다. 일곱 살이면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다 생각하는 왕국 내의 정서를 생각하면 아이는 그렇게 어리다 볼 수 없었다.
차분한 음성이 제 말을 비판했지만, 제라니아는 꿈쩍도 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제 말을 들어보세요, 전하. 정보를 얻는 것에 꼭 고문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를 기사들에게 맡기려던 프란츠에게 제라니아는 잠시 유예를 달라 요청했다. 시신들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냉정함을 봐서는, 아무리 봐도 평범한 방식으로 아이를 다룰 것 같지 않았다.
제 속내를 짐작했는지 프란츠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다가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였다.
“차라리 호의를 얻는 게 낫지 않겠냐는 거예요. 자기 의지로 무언가를 말하도록 말이에요. 시도할 가치는 있지 않을까요.”
“일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쉽고 빠른 길이 있는데 왜 굳이 돌아가야 합니까.”
“으음….”
제라니아는 물끄러미 그제부터 제 남편이 된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프란츠를 설득하기 위해, 제라니아는 기꺼이 머릿속에 떠오른 한 수를 내밀었다.
“전에 저한테 왕세자비 자리를 제안하실 때 그러셨잖아요. 이전과 다른 나라를 만드시겠다고요.”
“…….”
“그렇다면 방식도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력으로만 무언가를 쟁취하는 건, 현 국왕 폐하의 방식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먹힐까? 제라니아는 조마조마한 눈길로 프란츠를 살폈다. 새파랗게 변한 눈동자가 한참 동안 말없이 제라니아의 녹색 눈을 응시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시선을 받아내던 중, 프란츠의 입술이 열리며 말을 자아냈다.
“알다시피, 정보를 얻어내는 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네.”
그가 힐끔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9시가 되겠군요. 자정 전에 그 아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그대의 의견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제라니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나직한 저음이 방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멀뚱히 문을 바라보던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프란츠를 빤히 쳐다보던 제라니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입을 가리고 웃던 제라니아가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프란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녁부터 먹고 해야겠네요. 갈까요?”
“…그러죠.”
제라니아의 손을 가만히 붙잡은 프란츠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 * *
저녁을 먹은 뒤, 제라니아는 펜과 종이를 챙겨서 저택의 구석에 마련된 작은 방으로 향했다. 제 뒤를 따라오는 기사들에게 밖에서 대기해 달라는 부탁을 남긴 뒤 그는 등불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이 없어 방 안은 무척 어두웠다. 침대가 있는 쪽을 비추자 화들짝 놀라는 인영이 보였다.
깨끗하게 씻긴 뒤 옷을 갈아입은 아이의 인상은 낮에 봤던 것과는 꽤 달랐다. 우선 눈꼬리가 올라간 것도 그렇거니와, 꽉 다물린 입술도 유순한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몸을 웅크리고 떨기만 해서 연약한 줄만 알았는데 보기보다 제법 성격이 있어 보였다. 나이는 열 살이 좀 넘었을까. 쏘아보듯이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벽에 바짝 붙는 아이에게 제라니아는 살갑게 말을 걸었다.
“안녕? 이름이 뭐니.”
“…그런 거 없어요.”
메마른 땅처럼 바짝 갈라진 음성이 버석해 보이는 입술 틈새로 새어 나왔다. 눈치를 보듯 제 얼굴을 살피는 아이에게 제라니아는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고양이를 마주하는 기분이 이럴까.
“저녁은 맛있었어? 신경 쓰라고 하기는 했는데.”
무리해서 가까이 다가가려 하기보다 제라니아는 문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을 택했다. 망설이던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처음 먹어봤다고 말하는 아이의 표정은 제법 진심처럼 보여서, 제라니아는 뿌듯함을 느꼈다.
정체를 숨기고 고아원에 다녔던 세월이 자그마치 6년이었다. 왕실의 일원이 된 만큼 다시 방문하기는 힘들겠지만, 어쨌거나 제라니아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에는 익숙했다.
“이름이 없다면, 내가 지어줘도 될까?”
아이는 말이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모호한 태도에, 제라니아는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