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신혼여행 (1)
햇볕이 내리쬐는 낮의 시간을 따라, 자주색의 고급스러운 마차가 드넓은 밀밭 사이를 달려갔다.
마차가 달리는 길의 양옆으로 황금빛 물결이 몰아쳤다. 마차의 조그마한 창문 너머로 끝없이 이어지는 밀밭에서 제라니아는 눈을 떼지 못했다. 맞은편에 앉아 그런 제라니아를 유심히 쳐다보던 프란츠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좋습니까.”
“네!”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프란츠를 돌아보았다. 여행을 아주 다녀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풍경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예술품에도 무척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아버지의 넘치는 재력은 그런 의미에서 무척 큰 도움이 되었다.
“전하께서는 즐겁지 않으세요?”
이렇게 경치가 예쁜데. 의아한 얼굴을 하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고개를 내저었다. 글쎄요.
“그런 것보단 당신을 구경하는 게 더 재밌습니다.”
“저요?”
“표정이 휙휙 바뀌니까요.”
제가 감정이 무딘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아름답다 평해지는 무언가를 봐도 쉽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제라니아를 지켜보는 건 이상하게도 질리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째서일까.
“조금만 더 있으면 센디아에 도착하겠군요.”
수도에서 바이첸 공작가의 본성이 있는 남쪽 데브론 영지까지는 마차로 약 이틀이 걸린다. 정확히는 쉬어 가는 시간을 포함해서. 마차 주변에 포진해 말을 타고 달리는 호위기사들을 생각하면 적절한 휴식은 필수였다.
바람을 따라 파도치는 금빛 바다의 저 너머로 성벽이 쌓인 도시의 모습이 보였다.
데브론 영지로 들어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도시 중 하나인 센디아였다.
도시 안으로 들어서자 과연 부유하기로 유명한 데브론 영지답게 도시의 분위기는 무척 활기찼다. 벽돌로 쌓여진 집들과 예쁘게 깔린 도로가 마차를 맞이했다.
여긴 여전하네. 오랜만에 보는 센디아의 풍경을 보며 제라니아는 짧은 감상을 떠올렸다.
“잘하면 밤이 오기 전에 소프람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렇죠? 아, 가기 전에 뭐라도 사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근데 이 상태면 아버지보다 저희가 먼저 도착할 것 같아요.”
본래라면 공작이 자리를 비웠을 때는 가주 후계인 프레드릭이 성을 지키고 있어야 했으나, 공작이나 프레드릭이나 전부 제라니아의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수도에 머물고 있던 차였다.
공작에게 거의 통보나 다름없는 서신을 보내고 거침없이 출발하는 프란츠의 행동에 제라니아는 다시금 혀를 내둘렀다.
안 그럴 것 같으면서, 은근히 막무가내인 구석이 있으시단 말이지.
“하여간 빠릿하지를 못하군요. 혀는 그렇게 잘 굴리면서 말입니다.”
아니, 저희가 너무 빠른 건데요.
차마 그렇게 덧붙이지 못하고 제라니아는 멋쩍게 웃었다. 창문 밖을 내다보던 제라니아는 문득 빵집으로 보이는 가게의 간판을 발견했다.
“쿠키라든가 사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잠시 들러봐도 될까요.”
“쿠키?”
“네, 파멜라가 쿠키를 워낙 좋아해요.”
제라니아는 가만히 프레드릭의 아내이자 제 새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빠 부부는 대개 공작령에서 지내고, 자신은 수도에 머무는지라 얼굴 볼 일이 많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다정다감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밀로나랑 쌍둥이도 오랜만에 보니 많이 컸던데. 제법 의젓하고 얌전한 밀로나와 달리 쌍둥이는 결혼식장에서도 여전히 티격태격했다. 도대체 누굴 닮았을까. 애들이 사고를 좀 그만 쳐야 할 텐데….
가만히 중얼거리며 밖을 쳐다보다가 제라니아는 마차 앞에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거지꼴을 한 어린아이가 도로에 뛰어들다가 마차를 보고 굳어버렸다. 제라니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세워요!”
“히익!”
아이를 본 마부가 놀라서 고삐를 꽉 잡아당겼다. 히히힝, 소리를 내며 말들의 앞다리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제 머리를 감싼 채 그 자리에서 웅크렸다.
다행히도 말들은 아이의 바로 코앞에서 동작을 멈추는 데 성공했다. 덜커덩,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추고 안에 앉아 있던 이들의 몸 역시 앞으로 쏠렸다.
창문을 보고 있던 차라 제라니아의 몸이 앞으로 강하게 기울어졌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프란츠가 황급히 손을 뻗어 제라니아를 받아냈다. 그 반동으로 머리가 마차 벽에 세게 부딪히는 와중에도, 프란츠는 남은 손으로 제라니아의 뒤통수를 감싸 안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차가 멈추고, 일순 적막이 흘렀다.
“고, 고마워요.”
얼떨떨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 제라니아가 감사를 표했다. 제라니아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던 프란츠가 한숨을 쉬었다.
“괜찮습니까.”
“네, 그나저나 대체 이게 무슨….”
아이는 괜찮은 걸까. 제라니아는 마차에서 내리고자 문을 열었다. 힐끔 마차 밖을 내다본 프란츠가 다급히 소리쳤다.
“제라니아!”
밖으로 나가려는 제라니아의 허리를 프란츠의 손이 감싸 안고 뒤로 끌어당겼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무언가가 제라니아의 코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팍, 바닥에 꽂히는 화살을 보자마자 말에 타고 있던 기사들이 재빠르게 대열을 갖추었다. 지붕 위로 하나둘씩 검은 옷을 입은 살수들이 튀어나와 다시금 화살촉을 활시위에 걸었고, 프란츠는 그걸 보자마자 제라니아를 안은 채 재빨리 벽 쪽으로 몸을 붙였다.
핑, 소리와 함께 화살비가 쏟아졌다. 팔에 화살을 맞은 마부가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는 것과 함께 살수들이 아래로 뛰어내렸고, 골목에서도 칼을 든 자객들이 튀어나왔다. 대충만 살펴도 족히 열은 넘어 보였다.
“나오지 마십시오!”
말에서 뛰어내린 제롬이 열려 있는 마차의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프란츠는 곧장 제가 바라보고 있던 반대편 창문 위쪽에 달려 있는 손잡이를 내렸다. 철로 만들어진 판이 손잡이를 따라 내려와 창문을 가렸다. 제라니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대체 저런 게 왜 설치되어 있는 거야?!
유일하게 바깥이 내다보이는 창문 앞에 제롬이 등을 맞대고 섰다. 제롬이 마차 근처를 지키고, 다른 기사들이 튀어나오는 살수들과 난전을 벌였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스레 들렸다.
제라니아는 가만히 바깥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약간의 기합 소리와 칼들이 부딪히면서 나는 떨림, 그 사이로 희미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비집고 흘러나왔다. 프란츠의 품에 안긴 상태 그대로 제라니아는 바깥에 서 있는 제롬의 등에 시선을 고정했다.
“제롬 경!”
“예!”
“혹시 아이는 아직 거기 있나요?”
제게 칼을 휘두르던 남자의 심장에 칼을 꽂으며 제롬이 소리쳤다.
“아까 그 자리에 웅크리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마차에 화살이 푹 꽂혔다. 상황이 정리가 되어가는지 제롬의 목소리에는 한층 여유가 있었다. 제라니아는 제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프란츠를 돌아보았다. 프란츠가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구해달란 소리를 하시려는 겁니까.”
“구할 수는 있는 건가요?”
“가능은 합니다.”
제롬의 솜씨라면 아이 하나쯤 엄호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그래야만 합니까?”
그깟 어린애 하나가 뭐라고 그런 수고를. 그렇게 묻는 듯한 프란츠의 옷자락을 제라니아는 와락 움켜쥐었다.
“하실 수 있다면서요.”
신뢰를 담은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참 동안 시선을 마주하던 프란츠가 제롬을 힐끔 쳐다보았다.
“제롬.”
“부르셨습니까.”
“바깥 상황은? 그 어린애는 어떻게 됐나.”
“다섯쯤 남기고 다 정리했습니다. 어린애는 아직 죽진 않은 것 같습니다.”
“데려와.”
“하지만.”
“창을 닫겠다. 어서 가라.”
“예, 전하!”
프란츠가 남아 있는 창문을 닫는 것과 동시에 제롬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어두워진 마차 안에서 제라니아는 프란츠를 쳐다보다가, 조심스레 뒤로 물러났다. 간간이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를 제외하면 참으로 고요했다.
침착하게 구겨진 드레스를 정리하는 제라니아를 쳐다보며 프란츠가 말했다.
“놀라지 않습니까?”
방금 전 제 머리로 화살이 날아왔음에도 남을 챙길 여유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평생 이런 일과는 인연이 없었을 것이 분명한 귀족 영애가.
“충분히 놀랐어요.”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지 옷자락을 붙잡은 제라니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심각해지려는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제라니아가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전하야말로 정말 침착하신데요.”
“익숙하니까요.”
무미건조한 음성에서는 일말의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을 받아들이는 것만 같은 그 태도에 제라니아는 일순 말을 잃었다.
“왕세자로 임명된 후로 더욱 집요해지긴 했습니다.”
마치 남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심드렁한 어조였다.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딱히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건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후회합니까?”
제라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프란츠를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뭘 말입니까.”
“아까 저 구해주신 거랑, 부탁 들어주신 거요.”
어두운 와중에도 어렴풋이 드러나는 차분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프란츠가 툭 내뱉었다.
“당신은 정말 신기하군요.”
“예?”
“보통은 화를 내거나, 욕을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까지 위험할 줄은 몰랐다든가, 왜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냐든가.”
설마 감사하다는 말을 먼저 들을 줄은 몰랐다. 원망 정도는 날아올 거라 생각했건만.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신을 마주 보는 프란츠의 시선에 제라니아는 조용히 대답했다.
“뭐랄까…. 미리 설명을 들었다면 생각이 달라졌을 것 같기도 한데요, 한편으로는 그만한 조건을 거신 이유가 뭐였는지 이제야 납득이 가서요.”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다고들 한다. 왕실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조건의 대가가 이것이라면 그럴 만했다. 감정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게 분명한 남자가 굳이 손해 보는 거래를 할 리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습격을 방지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인 건데, 정보가 새어 나간 모양입니다.”
아주 작게 덧붙이는 목소리가 미안해하는 것처럼 들리는 건 자의식 과잉인 걸까.
제라니아가 뭐라 답하려는 순간 마차의 문이 활짝 열렸다. 환한 햇살을 등지고 제롬이 대답했다.
“정리 끝났습니다. 이제 나오셔도 괜찮습니다.”
“상황은.”
“총 열아홉 중 열일곱을 해치웠고, 둘은 생포했는데 기절한 상태입니다. 저희 쪽은 부상자는 있지만 사망자는 없습니다. 아이는 등에 화살을 맞은 걸 제외하면 무사합니다만, 화살에 독이 묻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빨리 처치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프란츠가 앞장서서 마차 밖으로 나간 뒤 제라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조심히 바깥으로 나선 제라니아는 길거리에 널려 있는 시체들을 발견하고 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