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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4화 (15/171)

제14화. 충돌

수저를 들던 제라니아가 움직임을 멈췄다. 정중한 음성으로 양해를 구하며 몰리는 음식을 가져온 시녀에게 말했다.

“맛은 봤느냐.”

“아직입니다.”

“거기 너, 음식을 먹어보거라.”

몰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시녀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빵을 조금 떼어내 입에 넣었다. 잼 역시 맛을 본 뒤, 수프를 떠 입에 넣었다.

쨍그랑, 수저가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스레 울렸다.

“우웩…!!”

수프를 먹자마자 시녀는 황급히 목을 움켜잡고 바닥에 주저앉아, 그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제라니아가 눈을 깜빡였다. 옆에서 침착하게 그 시녀의 등을 두드리는 다른 시녀들도, 더없이 냉정한 몰리의 얼굴도 현실감이 없었다.

“독인 것 같습니다.”

제라니아에게 차분하게 고하는 여인의 얼굴이 흡사 전장에 나간 장수처럼 비장했다. 그가 음식을 가져온 시녀를 돌아보았다.

“즉사는 아닌 걸 보니 경고인 모양이군. 딴 길로 샜던 적이 있느냐?”

“요, 요리사에게 받아 곧바로 여기로 가져왔습니다. 정말입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녀를 몰리는 손짓 하나로 밖으로 내보냈다. 양 팔을 붙잡혀 끌려 나가는 시녀를 뒤로한 채 몰리는 제라니아를 향해 고개를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즉시 다른 음식을 가져오도록 이르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이런 걸 겪고도 입맛이 돌 만큼 신경줄이 무디진 않았다. 제라니아가 더는 음식에 손을 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챘는지 몰리는 직접 쟁반을 물렸다. 수프를 먹은 시녀를 다른 이들이 부축해 나가는 것으로 방 안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사실 지금 제라니아는 두렵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설마 결혼한 다음 날 아침 독이 든 아침…. 아니, 간식 상을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크리스의 걱정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는 걸 이렇게 체감하게 될 줄이야.

“정말 침착하신데…. 이런 일이 흔한가요?”

몰리는 침묵했다. 그게 긍정임을 알아채고 제라니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런 말이 없는 제라니아가 못내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몰리는 걱정 말라는 듯 덧붙였다.

“안심하십시오. 어떻게든 범인을 찾아내서 경을 칠 테니까요.”

“그렇더라도 배후는 알아내기 힘들겠죠?”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궁에서 이런 일은 흔하디흔했다. 엮이는 사람 수가 많다 보니 왕궁 내에서 갈리는 파벌만 한둘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사람 하나를 잡으면 그 뒤로 엮여 있는 관계들이 우르르 끌려 나왔다.

그 얽혀 있는 관계를 인내심 있게 풀어내서 배후를 잡으려고 하면 이미 증거는 소실된 상태가 되는, 그런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게 현재 왕궁 내부의 상태였다.

이렌스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긴 했지만, 직접 겪어보니 참 여러모로 막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부주의로 큰일이 벌어질 뻔했습니다.”

“괜찮아요. 사실 시간도 촉박했을 거고.”

준비 기간이 고작 두 달이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믿을 만한 사람만 찾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은 제라니아도 알았다.

몰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전하의 마음이 넓고도 깊으시다는 걸 압니다. 허나 이런 일에 관대하게 대응하셔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당장 절 내치고 사람을 싹 갈아치우셔야 마땅합니다.”

아무도 믿지 말라. 궁에 들어온 순간부터 모두가 마음에 새기는 말이었다. 우려를 섞은 몰리의 조언에도 제라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현실을 고려해서 하는 말이에요. 당장 저는 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제가 마담을 내칠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러고 나면 마담의 자리에는 누굴 세우나요?”

“…….”

“전하께서 저를 아끼신다면, 제게 가장 최선이라 생각되는 사람을 붙이셨을 텐데요.”

만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제라니아는 몰리 세자르가 꽤 마음에 들었다. 비록 교육은 엄격했지만 트집을 잡는 구석이 없었고, 평가는 단호하고 섬세했다.

자신이 머리가 좋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몰리가 그토록 체계적으로 진도를 나가지 않았더라면 기간 내에 이 많은 예절을 전부 익히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방심하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무조건적으로 실수에 냉정한 것 역시 좋지 않았다. 제라니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그때는 다를 겁니다.”

차분한 음성으로 덧붙이자 몰리는 결국 알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탁자에 앉은 채로 제라니아는 창문 밖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산책이나 가야겠네요.”

기분전환이라도 해야겠다. 그런 생각하에 제라니아는 침실 바로 옆에 마련되어 있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뒤, 침소 밖으로 나가려는 제라니아의 앞을 문 앞에 서 있던 기사들 중 한 명이 막아섰다.

“비전하,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조찬 전에 산책이나 할까 해서요.”

기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곧 입을 열어 말했다.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만, 밖으로 나가실 수 없습니다.”

“어째서죠?”

“명령입니다.”

딱딱한 음성이 되돌아왔다. 제라니아는 말문이 막혔다. 이건 또 무슨….

“전하께서는 비전하의 안전을 누구보다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라니아의 뒤를 따라오던 몰리 세자르가 조용히 대답했다. 친절한 설명에 제라니아는 머리가 아파왔다. 자신이 나가겠다는데 막아선다는 건 당연히 프란츠가 명령한 일이라는 거겠지.

그래, 다 알겠는데.

“하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감금에 가깝지 않나요.

머릿속에서 내린 결론을 꺼내는 대신 제라니아는 차분히 응수했다.

“저를 보호하시겠다는 마음이시라는 거죠.”

“그렇습니다.”

프란츠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궁에 들어온 첫날 아침부터 독으로 신고식을 보내는 곳이라면 분명 위험한 요소가 한두 가지는 아닐 것이다.

가뜩이나 궁은 무척 넓었다. 사람이 없을 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알아채기도,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그 방식에 온전히 동조할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전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요?”

“지금은 국왕 폐하를 알현하고 계실 겁니다.”

“전하를 뵈러 가는 건 괜찮지 않나요? 비켜주세요.”

“안 됩니다. 가급적 외출하지 마시라는 전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조찬을 먹으러 갈 때까지 기다리라는 뜻인지, 기사들은 문에서 물러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제라니아는 고민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코델리아가 쓴 소설에서는 이런 상황이 나오면 막 화도 내고 물건도 집어 던지면 상대가 오긴 하던데.

“…알겠어요.”

제라니아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람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나. 그저 윗선의 명령을 수행할 뿐인 이들인데.

잘 차려입은 상태 그대로 의자에 앉은 제라니아가 창문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선이 그어진 하늘이 내다보인다.

갑갑했다.

* * *

“왜 그런 표정입니까.”

조찬을 마치고 제라니아와 프란츠는 나란히 산책로를 걸었다. 제게 질문하는 목소리에도 제라니아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의 뒤로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두 걸음쯤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전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라니아가 불쑥 꺼낸 말에 프란츠는 살짝 입을 벌렸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뭡니까.”

“제 친정에서 사람을 좀 데려오고 싶어요.”

예상치 못한 말에 프란츠는 제라니아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앞을 보며 걸어가는 제라니아의 표정은 담담했다. 제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돌아보지 않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조용히 답했다.

“화가 난 겁니까?”

제라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전하께서 왜 그런 명을 내리신 건지는 알겠어요.”

아침의 소동이 아니었다면 아마 자신이라도 이렇게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오히려 그의 이런 태도는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아시지 않나요. 그런다고 위협이 줄어들진 않을 거라는 것을요.”

“…….”

제라니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를 따라 걸음을 멈추자, 녹색 눈동자가 천천히 프란츠를 올려다보았다. 아침 햇살이 그 눈동자에 별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거렸다.

차분하지만, 생기가 넘치는 눈이었다.

“제 능력이 필요해 저를 데려오셨다 하셨잖아요.”

“그랬습니다.”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당신이 아니라, 궁을 믿지 않는 겁니다.”

평생 동안 왕궁에서 살아온 남자는 조금은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라니아는 그의 얼굴에 서려 있는 불안감을 읽었다. 그의 어머니의 죽음에 독살 의혹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에 더더욱.

“오늘 아침 있었던 일을 들었습니다.”

“아.”

제라니아의 입에서 조그만 탄성이 터졌다. 프란츠는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몰리 세자르에게 당신을 맡긴 건, 그가 어쨌거나 믿을 만한 인물이고 일처리 역시 꼼꼼하기 때문입니다. 두 달이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군요.”

아무리 가벼운 독이었다 하나 독은 독이었다. 그게 쌓이고 쌓여서 사람을 죽이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본 만큼, 프란츠는 이 문제를 적당히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여행이나 가지 않겠습니까.”

“여행이요?”

놀라서 되묻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일들은 이미 대강 다 끝났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이렌스가 알아서 잘 할 겁니다.”

이렌스가 들었다면 이건 학대라고 주장했을 법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으며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겠습니까?”

“저야 뭐 괜찮지만….”

“사실 이미 국왕 폐하께는 승인을 받아 뒀습니다.”

“…그, 다음부턴 상의를 먼저 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제라니아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주제넘은 말인가 싶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제 문제잖아요. 절 존중해 주신다고 하셨으니, 이 정도는 요구할 수 있다 생각해요.”

기사들이 자신을 막아섰던 아침의 일도 그렇고, 여행 일도 그랬다. 자신이 모든 일에 간섭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 제가 얽힌 문제에 이런 식의 통보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자신을 생각해서 한 일이라지만, 절차라는 게 있지 않은가.

깨끗한 녹색 눈동자에 프란츠의 얼굴이 거울처럼 비쳤다. 그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던 프란츠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남자의 눈동자는 진지했다. 제라니아가 안도의 한숨을 쉴 찰나 그가 덧붙였다.

“참고로 여행은 오늘 낮에 출발할 겁니다.”

“그렇게 빨리요?!”

제라니아가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너무 흥분했다 싶었는지 제라니아는 바로 입을 꼭 다물고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자신도 추진력 하나는 알아준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눈앞의 이 왕자님을 따라가기엔 멀었구나 싶었다.

적어도 내일에나 출발할 줄 알았는데.

“마담한테 짐을 챙겨두라 일러뒀으니 금방 떠날 수 있을 겁니다. 돌아올 즈음에는 이런 문제가 벌어지지는 않겠죠.”

가볍게 대꾸하는 목소리와 달리 프란츠의 눈동자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라니아가 조심히 질문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요?”

프란츠는 싱긋 웃었다. 어디긴요.

“바이첸 공작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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