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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3화 (14/171)

제13화. 첫날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비켜주세요.”

문을 막고 서 있는 멋들어진 제복 차림의 기사들에게 제라니아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됩니다.”

문의 양옆에 자리한 기사들 중 왼쪽에 서 있는 이가 단호하게 거절을 표했다. 물끄러미 그들을 쳐다보던 제라니아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쩌다 이러고 있는 거지.

* * *

피로연을 마치고 난 뒤, 궁에 마련되어 있는 침소에 들어오기 전 제라니아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총총 방 안으로 들어온 제라니아가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화려한 금실로 수놓아져 있는 벽의 군데군데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보석으로 치장된 장식품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지만, 이 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자신이 앉아 있는 침대였다.

여럿이서 뒹굴어도 될 만큼 넓은 침대와 그 주변으로 늘어진 새하얀 휘장. 화려하게 꾸며진 침실을 보고 있자니 제가 결혼을 했다는 게 덜컥 실감이 났다.

제라니아는 그 상태로 이불 위에 툭 몸을 뉘였다. 침대에 고정되어 있는 원뿔형의 천장을 말없이 쳐다보던 제라니아의 귓가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벌떡 일어나자 안으로 들어오는 프란츠의 얼굴이 보였다.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그와 그래도 얼굴을 꽤 봤지만, 이런 허물없는 차림으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제라니아는 어색함을 떨치고 밝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프란츠가 천천히 제라니아에게로 걸어왔다. 아까와 달리 웃음기가 옅어진 얼굴에는 피로가 묻어났다. 연회장에서부터 입술에 경련이 나겠다 싶을 정도로 웃고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제게 몰려드는 이들도 상당했으나 프란츠의 주변에는 정말로 사람이 끊이지를 않았다. 처음에는 왜 자신을 멀리 떨어뜨려 놨나 했는데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의 곁에 서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시달렸을 것이다. 그는 분명 키가 훤칠한 편인데도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멀찍이 서서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프란츠를 힐끔 보았다. 연회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잘 만든 가면을 쓴 것처럼 부드럽고 능글맞은 미소가 그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사뿐히 걸어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아까는 긴가민가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피곤해 보이네.

‘전하, 이만 돌아가면 안 될까요.’

혼자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기왕지사 나갈 거, 그에게도 빠져나올 핑계 하나쯤은 만들어주는 게 낫겠지. 박수는 한 손으로 내는 게 아니다. 그는 소문에 관해서는 자기가 알아서 다 하겠다고 했지만, 받기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최대한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프란츠가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근처에 서 있던 아버지가 그런 제 얼굴을 보고 눈을 비비는 것을 알았지만 모른 체했다. 프란츠의 옆에 있던 국왕은 아예 재미있다는 듯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야, 금슬이 아주 좋으십니다.’

‘이거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습니까.’

와하하, 웃음소리가 터졌다. 자신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관심 없었다. 프란츠의 눈빛이 묘하게 변해가는 것에 설마 제가 잘못 짚었나 싶었지만, 그는 선선히 사람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 이만 자리를 떠나도 괜찮겠습니까?’

‘아, 당연하지요! 저희가 눈치가 너무 없었군요.’

‘좋은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이거 벌써부터 기대되는데요.’

그 밖에도 온갖 말이 쏟아졌지만 기억하는 건 별로 없었다. 대부분 흘려보냈기도 했거니와 순식간에 연회장 밖으로 빠져나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 팔을 붙잡고 앞장서는 프란츠의 기세가 의아했다.

‘제가 괜히 끼어들었나요?’

‘아니요, 딱 적절했습니다.’

덕분에 잘 빠져나왔다고 감사 인사를 하면서도 프란츠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화나신 것 같은데요.’

‘…무엇이든, 당신 때문인 건 아닙니다. 어서 돌아갑시다.’

앞서 걸어가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는 불쾌한 무언가를 억누르듯 살짝 갈라져 있었다.

상대의 걸음걸이가 빠르다 보니 제라니아는 거의 뛰듯이 걸어야 했다. 조금만 천천히요, 그렇게 덧붙이자 그제야 프란츠는 속도를 늦춰주었다.

복도에 나 있는 창문 밖으로 어둑해진 바깥의 풍경이 보였다. 윤곽만이 간신히 보일 듯 어두운 밤. 환하게 빛나고 있는 연회장과 여러모로 대비되었다.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빛과 함께 점점 등 뒤로 멀어졌다. 어쩐지 쫓기는 기분이 들어, 제라니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인사를 건넸더니 그는 대답은커녕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기만 했다. 제라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런 반응일까. 같이 들어왔으면서 이런 인사를 하는 게 이상해서 그런가?

“왜 그러세요?”

“아니…. 별건 아닙니다만, 그런 인사를 받을 줄은 몰라서 말입니다.”

생경하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제라니아는 그 역시도 결혼은 처음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그러니까, 누가 먼저 와서 기다린다든가 그런 상황을 겪어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인 아그네스 왕비가 죽은 이후로 그는 쭉 혼자 지냈다고 들었으니까.

“이젠 좀 덜 무겁습니까?”

“뭐가요? 아.”

제라니아의 머리 위를 힐끗 바라보며 프란츠는 장난스레 말했다. 제라니아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차 했다.

“맞다, 이런 건 보통 남편이 벗기는 거라고 하긴 하던데요.”

“누가 벗든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벗긴 셈 치지요. 어차피 알아서 입을 다물어줄 테고 말입니다.”

침상 밖에 서 있던 시종과 시녀들은 아무런 반응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어딜 가나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는 감각은 솔직히 좀 미묘하긴 했지만, 제라니아는 내색하지 않고 프란츠와 시선을 마주했다.

프란츠가 제라니아의 옆에 앉아 그의 볼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제라니아가 말했다.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아무것도 안 묻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만지시는 거예요?”

“싫습니까?”

싫진 않았다. 좀 민망해서 그렇지.

“싫은 건 아닌데…. 스킨십을 별로 안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그런가요.”

뚱하게 대답한 남자가 손을 뻗어 제라니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커다란 몸에 꼭 안겨든 상태로 제라니아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제 뒷머리를 슬슬 쓰다듬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건.

“어….”

“오늘은 이만 자죠.”

그 말과 함께 프란츠는 제라니아를 침대에 눕힌 뒤 이불을 가슴께까지 올려주었다. 멀뚱히 그 손길을 받던 제라니아가 제 옆으로 와 눕는 프란츠를 돌아보았다. 머리 하나 크기의 거리를 둔 상태였다.

“진짜요?”

“피곤하잖습니까.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말이죠.”

“계약서에는….”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의아한 얼굴로 소곤거리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픽 웃으며 말했다.

“급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날을 잡고 생각해보는 게 낫겠죠.”

왕궁의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 임신을 해봐야 골치 아픈 일만 더 늘어날 뿐이었다. 프란츠는 제 아이를 이런 난장판에서 키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버지가 뿌린 씨앗이 왜 이리도 많은지, 신분을 믿고 까불거나 욕망에 치우쳐 선을 넘으려 드는 인간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제라니아가 프란츠의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눈치를 보듯이 저를 올려다보는 제라니아를 보며 프란츠는 새삼스레, 눈앞의 여인이 참 작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저도 잠깐 실례해도 될까요?”

아까 뺨에 키스했을 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는 건가. 프란츠는 덤덤히 대답했다.

“얼마든지.”

제라니아가 손을 뻗어 프란츠를 꼭 껴안았다. 심장박동 소리가 담쟁이덩굴처럼 엉키며 쿵쿵 울렸다. 프란츠가 조용히 물었다.

“긴장했습니까?”

“아무래도 좀.”

저 이런 건 처음이란 말이에요. 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는 제라니아의 등을 프란츠는 마주 끌어안았다.

“갑자기 포옹은 왜.”

“매번 전하만 절 만지시잖아요. 저도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실례한다고 한 것치고는 상당히 귀여운 이유였다. 다만 할 말이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아, 프란츠는 얌전히 제라니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라니아가 가만히 속삭였다.

“제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요?”

결혼식장을 나서고부터 걱정하던 것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이런 식으로 눈에 띄어본 적도, 사람들 앞에 나서본 적도 없었다. 호기롭게 하겠다고 계약서를 쓰고 도장을 찍은 건 맞지만 막상 닥쳐보니 조금 두려웠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하는 것이니만큼.

푸른 시선이 제 품에 파고든 제라니아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알 것도 같았다.

그 걱정의 무게를 알면서도 프란츠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뭘 그런 걸 걱정하느냐는 듯이.

“당신 하던 대로 하면 될 겁니다.”

그러니 잠이나 자요. 그렇게 말하듯, 커다란 손이 제라니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 * *

제라니아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푸르스름한 새벽을 젖히고 태양이 손을 뻗기 시작하는 이른 아침이었다. 푹신한 침대의 감촉이 제 몸을 밑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었지만, 제라니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입고 있던 비단 잠옷의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에 누워 있던 사람이 없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걸 봐서는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완전히 걷어냈다. 창문 밖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뒤에서 소란이 들렸다. 나이가 지긋한 여인이 시녀들을 대동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제라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담 세자르. 자신에게 궁중 예절을 가르쳤던 바로 그 여자였다.

“안녕하십니까, 비전하.”

“아, 저번에 뵈었던….”

시녀들과 함께 여인이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오늘부터 비전하를 보필하게 된 몰리 세자르라 합니다. 편하게 몰리라 불러주십시오.”

“제라니아 바이…. 아니, 제라니아 리나엔입니다. 저도 잘 부탁드릴게요.”

늘 소개하던 이름 대신 새로운 성을 붙이려니 영 어색했다. 그게 왕족의 성이라고 생각하니 더 기분이 미묘했고.

“조찬을 드시러 가실 겁니까?”

“음…. 전하께서는 벌써 밖에 나가셨나요?”

“예, 아마 곧바로 식당으로 가실 것 같습니다. 다만 아직 조찬 시간까지는 한참 남았는지라…. 가볍게 간식이라도 드시겠습니까?”

얌전히 고민하던 제라니아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먹고 산책이라도 다녀오면 좋을 것 같았다.

몰리가 손짓하자 잠시 뒤, 시녀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갓 구운 빵과 수프, 그 옆에 사과 잼이 담긴 작은 병이 놓여 있었다.

“와…. 맛있겠네요.”

나직하게 감탄사를 흘리며 제라니아는 쟁반이 올려진 탁자 앞에 얌전히 자리를 잡았다.

“기다려 주십시오, 비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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