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2화 (13/171)

제12화. 결혼식

“…제라니아의 결혼식인데 내가 어떻게 안 오겠어.”

다정하게 미소 짓는 셀리나의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물론 3년 전 셀리나의 결혼식에 제라니아가 참석할 때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지금의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제라니아도 그걸 알기에 참석만으로 만족하겠다 생각했건만, 설마 여기까지 찾아와줄 줄이야. 분쟁을 싫어하고 남편의 말을 우선하는 셀리나의 성격을 봐서는 의외로운 일이었다.

셀리나가 멋쩍은 얼굴로 덧붙였다.

“참. 오빠는 조금 있다가 온다고 하더라.”

대기실에 있는 모두의 머릿속에 셀리나와 꼭 닮은 미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두가 일제히 침묵을 유지하는 가운데, 제라니아가 말했다.

“일이 바쁜 모양이네. 곧 오겠지.”

심각해지려는 분위기를 가볍게 흘려보낸 제라니아의 무릎 위에 반투명한 연푸른색 면사포가 올려져 있었다. 드레스와 잘 어울리는 색깔의 천은 그가 입은 드레스만큼이나 곱고 매끄러웠다.

제라니아의 옆에 냉큼 앉아 그 천을 만지작거리던 코델리아가 툭 말을 꺼냈다.

“진짜 결혼이구나.”

방문해준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제라니아와 일행이 그를 돌아보았다. 결혼하는 건 제라니아인데, 그보다 더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코델리아가 제라니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매끄러운 비단 장갑 위로 온기가 얹혔다.

“언니라면 뭐든 괜찮을 거야.”

가볍게 주먹을 쥐고 응원을 보내는 코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라니아는 빙그레 웃었다.

“응.”

* * *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엄숙한 분위기의 예배당에 악사들이 연주하는 밝고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왕실의 문양이 금실과 은실로 수놓아진 화려한 휘장들이 창문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쭉 뻗은 길의 양 옆으로 마련된 의자에 수많은 하객들이 앉아 있었다. 높이 솟은 편편한 천장에는 신을 찬미하는 성화가 가득했다.

커다란 창문에서 한낮의 햇빛이 쏟아졌다.

프란츠가 앞장서 붉은 카펫 위를 걸어갔다.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 노인의 앞에 멈춰 선 프란츠를 따라 제라니아 역시도 걸음을 내디뎠다. 드레스 자락이 워낙 길어 걸어갈 때 조심스러웠다.

매끄러운 푸른색 천으로 만들어진 드레스의 끝자락에 덧대어져 있는 섬세한 레이스가 제라니아의 걸음을 따라 물결치듯 나풀거렸다.

왕국의 결혼식에서는 결합을 상징하는 푸른색 옷차림을 하는 게 관례였다. 푸른 계열의 염료가 만만한 값은 아닌지라, 가난한 이들은 약식으로 푸른색의 예물을 나눠 가지며 혼인을 서약했다.

제라니아는 남빛이다 싶을 정도로 짙은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이는 공작가의 상징 색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다.

천천히 걸어 프란츠의 곁에 선 뒤, 제라니아는 주례를 서는 이를 올려다보았다. 대신전의 지도자이며 가장 높은 신분인 아비스, 와이엇 산드리아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둘을 내려다보았다. 은색 티아라에 고정된 얇은 면사포가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각자가 맹세의 서약을 읊은 뒤 반지를 교환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넘겨 이마를 드러내고, 제가 입은 드레스와 꼭 맞춘 제복을 입고 있는 프란츠는 평소보다 한층 더 근사했다.

긴장이 되어서 그런가,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이 앞에 걸어올 때까지만 해도 별생각 없었던 모든 행위가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특별하게 느껴졌다.

제라니아를 내려다보는 프란츠의 표정은 오묘했다. 살짝 굳은 입매와 달리 묘하게 다정해 보이는 눈동자가 시선을 끌었다.

“그럼 두 사람, 맹세의 키스를.”

와이엇의 말에 따라 프란츠는 손을 뻗어 제라니아의 뺨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제라니아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기는 것과 동시에 입술에 따뜻하고 물컹한 무언가가 닿았다.

무척 경건하고, 또 조심스러운 키스였다.

소중한 무언가를 대하는 듯한 그 몸짓에 제라니아의 눈꺼풀이 살며시 떨렸다. 시야를 감싸 안은 어둠 속에서 그는 생각했다.

평생 타인을 이렇게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는 정도라면 몰라도 내밀한 무언가를 함께한 적은 없다. 결혼이란 행위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건, 남을 이 정도로 가까이해본 적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섬뜩한 예감이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과연 자신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수 있을까. 마냥 괜찮기만 할 수 있을까.

분명 짧은 찰나였을 텐데,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입술에 맞닿은 온기가 멀어지는 것을 느끼고 조금 뒤, 제라니아는 눈을 떴다. 눈을 감기 전까지만 해도 평온했던 프란츠의 얼굴이 물안개가 낀 것처럼 묘하게 흐려 보였다.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무심하던 푸른색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우습게도 그 순간, 제라니아는 생각했다.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을 떠올린 건지도 모르겠다고.

* * *

결혼식장을 무슨 정신으로 나선 건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차에 앉아 있었다.

양옆으로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자 목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진심으로 축하하는 것처럼 환한 미소가 모두의 얼굴에 가득했다.

사실 조금 얼떨떨했다. 살면서 이만한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옆에 앉아 있는 프란츠를 힐끔 쳐다보았다. 멋들어진 미소를 입가에 걸고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는 프란츠의 모습은 완벽한 왕세자의 표본 그 자체였다. 제가 이 사람과 결혼했다는 게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나는 것도 같았다.

제라니아를 힐끔 쳐다본 프란츠가 작게 속삭였다.

“곧 왕성에서 피로연이 열릴 겁니다.”

“네.”

“괜찮습니까? 피곤해 보이는데.”

그가 손을 내밀어 제라니아의 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다정한 손길에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생각이 조금은 가시는 것도 같았다.

오늘의 프란츠는 이상할 정도로 다정했다. 그게 어색하면서도 자연스럽다 느껴지는 게 더 당황스러웠다.

침착하자, 제라니아 바이첸! 이건 계약일 뿐이야. 사람들 앞이니까 이러시는 거겠지.

“무겁지 않습니까, 그거.”

말랑한 볼을 한참 건드리던 프란츠가 제라니아의 머리 위에 고정되어 있는 티아라를 만지작거렸다. 제라니아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무거워요.”

티아라만이 아니라 머리에 장식하는 핀이 왜 이리 많은지. 티아라는 또 어떤가. 온갖 보석이 박혀 있어 화려하긴 했지만 그만큼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프란츠의 머리를 조금 부럽게 쳐다보았다.

“벗지 그럽니까.”

“여기서 어떻게 그래요. 피로연 때까지는 참을게요.”

목이 좀 뻐근하지만 아직은 견딜 만했다. 반듯한 자세로 앉아 다시금 손을 흔들어주고 있는 제라니아를 프란츠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조금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 네, 상관없어요.”

“그럼.”

프란츠가 불길할 정도로 밝게 웃으며 왼손으로 제라니아의 얼굴을 붙들고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쪽, 소리가 나더니 뺨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는 감촉에 제라니아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뺨에 입을 맞추는 것과 동시에 아우성이 우렁차게 터졌다. 마치 길바닥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다가 눈에 띄는 장면에서 박수를 치는 것처럼 활기찬 분위기였다.

입술이 닿았던 뺨을 후다닥 감싸며 제라니아는 프란츠를 돌아보았다. 하얗던 얼굴에 사과처럼 붉게 물이 들었다.

“그, 아니, 저!”

“얼굴이 새빨개졌군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애정행각을 하는데 당황하지 않을 만큼 낯짝이 두껍지는 않았다. 제라니아는 항의하듯 눈을 빠르게 깜빡였고, 프란츠가 말했다.

“저 혼자 긴장하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치고 태연한 것이 영 설득력이 없었지만, 제라니아는 일단 어떻게든 침착하고자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프란츠가 제라니아의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작게 속삭였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사랑 이야기에 열광합니다. 극적인 요소가 있을수록 더 반응이 좋죠. 그렇기에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과 같은 동화가 유구하게 인기 있는 거고 말입니다.”

건조하고 서늘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모순적이게도 그 목소리에 제라니아는 가슴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짜놓았던 그 사랑 이야기의 한 틀을 세우고 있다 그 말씀이셨다. 달달한 크림이 올려진 케이크를 한 입 먹은 것처럼 제게 이토록 상냥한 이유가 바로 설명되었다.

“환상을 심어주는 것뿐이잖아요.”

금방 표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속삭이자, 프란츠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환상일지라도 좋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진실보다, 내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를 더 중시하니까요.”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의 면면을 제라니아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에 들려 있는 보랏빛 꽃다발을 꼭 붙잡으며 여인은 조용히 소곤거렸다.

“…언니와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단번에 직감할 수 있었다. 당신은 사랑을 믿지 않는구나.

제 어깨를 감싼 이 손의 다정함이 단순히 꾸며진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지긴 했지만, 제라니아는 태연하게 앞을 보았다.

당신은 어째서 나를 선택한 걸까. 과연 내가 당신이 바라는 만큼의 무언가를 해낼 만한 인간일까. 불안한 감정이 들다가도, 확신 어린 당신의 태도에서 묘한 안정감을 얻는다.

‘당신이 절 선택한 거겠죠.’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애초에 그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시작되지 않았을 관계였다.

자신은 사랑을 잘 모른다.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한 건 아니다. 실제로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르는 감정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도 되는 걸까. 연애라면 몰라도 결혼은 달랐다. 이혼을 할 수는 있다지만, 이혼한 여자의 등 뒤로는 온갖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이 따라다녔다.

그러니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의 감정에 평생을 내맡기는 건 너무 불안하잖아.

아무리 조건이 걸려 있다 하나, 프란츠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다. 그가 내미는 이유가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절했을 것이다. 그는 제게 감정보다 이익을 논했고 그건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범주였다.

게다가 사랑하지 않아도 제게 이만큼 최선을 다할 거라 말하는 상대라면, 평생을 같이 지내도 그렇게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부부가 연정만으로 성립되는 관계는 또 아니라고 하니까.

평화롭고 조용한 삶을 원했다. 결혼을 해 미래의 불안을 떠안고 가느니, 재산이 있다면 혼자 사는 것이 여러모로 낫다고 생각했다.

물론 왕세자와 결혼하는 것 자체가 이미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그걸 전부 감수할 수 있을 만큼 그가 내민 조건은 대단했다. 기회가 주어졌다면 잡는 게 도리였다.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니까.

그가 제게 이상적인 왕비를 바라듯이, 자신도 그에게 바라는 치세가 있었다.

이건 거래였다. 상호간에 합의한 거래. 그러니 이 이상의 감정이 끼어들 필요는 없다.

“괜찮습니까?”

섬세한 손길로 제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해주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제라니아는 곱게 웃어 보였다.

“당연하죠.”

그는 기꺼이, 이 다정한 환상을 즐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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