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탐나는 인재
마담 세자르의 평대로 확실히 모르는 게 많았으나 그 이상으로 흡수력이 빨랐다. 벌써부터 그만한 두뇌회전을 보여줄 정도라면, 아마 갈고닦으면 훨씬 대단해질 것이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이렌스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여러 의미에서 탐나는 인재였다.
정말 아까웠다. 비전하만 아니라면 남장이라도 하시는 게 어떻겠냐고 진지하게 설득해볼 만한데. 급여는 어차피 미래의 국왕 폐하께서 섭섭하지 않게 챙겨주실 테고.
말없이 속으로 작당하고 있는 이렌스의 속내를 간파했는지, 프란츠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내보였다.
“내 비를 왜 네가 탐내나.”
프란츠는 심기가 좋지 않아 보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티레인과 제롬은 침묵했으나 이렌스는 더없이 무심했다. 어쩐지 평소보다 빨리 돌아오셨다 싶더니, 비전하를 보러 오신 거였나.
이렌스가 놀리듯이 말했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도 아니시라면서, 결혼을 그만두란 말은 또 싫으십니까?”
그거 참 유감이라고 말하면서도 딱히 유감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 얼굴이었다. 보통의 왕족이라면 건방지다며 역정을 냈을지도 모르나, 뚫린 입이 흥미로웠는지 말해 보라는 듯이 턱을 까딱하는 프란츠에게 이렌스는 낙엽을 떨구듯 우수수 말을 쏟아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낭비입니다. 그런 인재가 고작 왕비로만 남는다니요.”
“…오늘따라 입이 거침이 없는 것 같은데.”
돌아오는 말투는 자못 살벌했으나 시선은 무덤덤했다. 직언은 그러려니 넘겨도 입 닫고 뒤에서 허튼짓을 벌이는 것은 싫어하는 이다웠다.
이럴 땐 왕실 사람들이 전하의 반만 좀 닮았으면 좋겠는데. 티레인과 제롬이 알았으면 기함할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리며 그는 재차 말했다.
“그럼 아닙니까? 보통 왕비 마마의 역할은 왕궁 내의 기강을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까. 듣기에는 그럴듯하나 실리적인 이득은 없죠. 권력의 중심에 있지만 결국 그것도 왕위가 교체되면 끝날 꿈입니다.
왕비 마마의 권력이란, 철저하게 국왕 폐하의 권력에 기반하니까요. 그러니 아이렌 왕비 마마께서도 어떻게든 살길을 찾으려고 열심히 발버둥을 치고 계신 게 아니겠습니까. 이쪽으로서는 더없이 귀찮을 정도로 말이죠.”
왕비의 이름을 들은 티레인의 표정이 살짝 가라앉았다. 그가 왕비를 비난하고자 꺼낸 말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들을 때마다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혈육 지간이라도 예외는 없는, 정쟁이란 그토록 냉정했다.
“여자는 관직에 나설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법은 바꾸면 됩니다.”
깔끔한 대답에 프란츠는 픽 웃음을 흘렸다. 제가 왕이 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주의 깊게 제 말을 경청하던 제라니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렌스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리고, 전하랑 결혼하는 것보다 일하시는 걸 더 재미있어하실 것 같던데요.”
분명 즐거워 보이기는 했으나, 여인이 보이는 즐거움은 이제 막 결혼하는 사람이 표하는 설렘과는 거리가 멀었다.
프란츠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급속도로 심기가 불편해진 것 같은 그를 눈앞에 두고도 이렌스는 꿋꿋하게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프란츠는 화를 내는 대신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야근을 그만하고 싶단 뜻이군.”
“알고 계시다면, 쓸 만한 사람을 좀 붙여 주십시오.”
결혼식이 다가와서 고통받는 건 제라니아만이 아니라는 듯, 이렌스의 눈가가 묘하게 퀭했다. 본디 주인이 힘들다고 말하지만 정작 발은 시종이 주무른다 했던가.
프란츠가 행하는 모든 일, 특히 행정에서 늘 총책임자를 맡는 만큼 이렌스 역시 요 석 달간 일에 치여 굴러다녀야 했다. 슬슬 불만을 터트릴 시기였다. 그동안 계속 그랬듯이.
“내 비만한 능력자라니, 조건이 너무 까다로운 거 아닌가.”
무심한 대답에 이렌스의 표정이 마구 구겨졌다.
“야근 인생인 사람 앞에서 염장질은 그만두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주인 대신 개처럼 일하는 인생에 이렌스는 조용히 푸념했다. 그런 제 능력이 이제껏 제 목을 붙여놓는 것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걸 알면서도.
“식은 잘 준비되고 있나?”
“이제야 그게 궁금해지셨습니까. 진행은 나쁘지 않습니다.”
칭찬에 박한 남자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 정도면 굉장히 순조롭다는 뜻이었다. 프란츠의 뒤에 서 있던 티레인이 우거지상으로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프란츠가 말했다.
“사람은 알아보지. 마지막까지 문제가 없어야 할 거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렌스를 포함해, 모여 있던 세 사람이 동시에 목례했다. 제롬과 시선을 교환하던 티레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결혼을 코앞에 두고 계신 소감은 어떠십니까.”
호방하다는 소리를 듣는 평소와 달리 굉장히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가 사랑이나 결혼이란 단어에 회의적이라는 건 알지만, 궁금했다. 티레인은 오늘에서야 가까이서 본 제라니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멀리서 볼 때는 단순히 얌전하고 차분한 느낌이라 생각했지만, 직접 얘기해보니 당차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보였다. 현재 왕궁의 상황을 생각하면 내심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제 주인과 과연 합이 제대로 맞을지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차분한 것만 보면 비슷했지만 티레인이 보기에 두 사람은 근본적인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제 주군은 합리성은 가졌어도, 도덕이나 윤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선해 보이던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니 근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간적으로 걱정이 되는 것도 있었다.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다 하나, 왕궁은 멀쩡한 사람도 미쳐서 나오는 일이 수두룩했다. 그렇기에 일단 프란츠가 즉위한 뒤 궁을 정리하고 나서 국혼을 추진하자고 했지 않았나.
그런데 왜 갑자기 결혼 이야기를 꺼낸 걸까. 불길함이 밀려들었으나 언제나처럼 프란츠는 제대로 된 설명을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생각보다 기분이 묘하군.”
그 한마디뿐이었다.
* * *
마침내 결혼식 아침이 밝았다.
온 나라가 들썩였다. 왕실에서 결혼을 발표했을 때부터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한창 최고조에 달할 시기였다. 수도 카암의 경우, 장사나 활동을 접고 오늘 결혼식이 열릴 예정인 대신전 산드리아로 모여드는 국민들의 수가 상당해 경비를 강화해야 했다.
평소였다면 경건하고 웅장한 분위기를 유지했을 대신전 역시도 북적거렸다. 보통 대신전은 앞마당까지는 신분을 막론하고 자유로이 오갈 수 있도록 개방해 두었으나, 오늘만은 예외였다.
경계를 강화하는 것은 물론, 평소라면 출입을 금했을 병사들과 더불어 온갖 초대객들이 드나드는 것을 검수하느라 신관들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덕분에 대신전 주변의 인구밀도가 대폭 상승했다. 새하얀 외관을 가진 대신전의 외벽을 빙 둘러싸고, 몇 시간 후면 진행될 성대한 결혼식의 주인공들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무려 3년 만에 돌아온 결혼식이 아니던가.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행사가 아니었다.
심지어 국혼 상대는 왕세자였다. 세간에 알려져 있는 사랑 이야기만으로도 국민들의 기대는 한껏 부풀려진 상태였다. 세자비가 될 이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행했던 온갖 미담이 알려진 것도 그런 현상에 한 몫을 했다.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와 함께 정문이 열리고, 넓은 부지 안으로 고급스러운 남색 휘장이 걸려 있는 커다란 마차가 들어섰다. 휘장에는 금색 선으로 섬세하고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얼핏 보더라도 평범한 귀족이 사용할 만한 상징은 아니었다.
마차의 문이 벌컥 열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가 내렸다. 연초록빛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의 손에 이제 갓 봉오리가 피어난 분홍색 장미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웨이브가 진 긴 금빛 머리카락이 여인의 움직임을 따라 깃발처럼 휘날렸다. 높고 오뚝한 코와 시원스레 휘어진 입매가 무척 어여뻤다. 이제 갓 성인이 되었는지 젖살이 빠지기 시작한 볼이 발그레했다.
아몬드형의 커다란 눈, 쨍하다 싶을 정도로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그 색채를 뽐냈다.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여인은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며 길을 묻는 얼굴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벽에 세워져 있는 괘종시계의 시침을 확인한 여인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이런, 늦었잖아!”
루터가 그렇게 오래 붙잡지만 않았어도. 애꿎은 남을 탓하며 걸어가던 여인은 어느새 커다란 문 앞에 도달했다. 고운 손이 거침없이 문의 손잡이를 붙잡고 잡아당겼다.
“언니!”
문을 힘껏 열어젖히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길이 문 앞에 서 있는 여인에게로 쏠렸다. 그 중심에 앉아 있던 푸른색 드레스의 여인이 그를 보며 웃었다.
“어서 와, 코델리아.”
갈색 머리칼에 따뜻한 녹색 눈동자, 기품 있는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은 한껏 꾸민 덕택인지 오늘따라 특히 더 예뻤다. 교양이고 뭐고 후다닥 달려 들어간 코델리아가 제라니아의 앞에 제가 들고 온 꽃다발을 내밀었다.
“자, 선물!”
“고마워. 너무 예쁘다.”
꽃다발을 받아 든 제라니아가 활짝 웃었다. 언니의 반응에 매우 만족해 있는 코델리아와 달리, 제라니아의 옆에 서 있던 칼리아가 언짢은 듯이 코델리아를 나무랐다.
“너 왜 이렇게 늦었니? 일찍 오라고 했잖아.”
“내 탓 아니다 뭐. 루터가 날 너무 좋아하는 걸 어떡하라고.”
토라진 듯 가볍게 투덜거리는 코델리아의 얼굴은 한 떨기 꽃처럼 무척 사랑스러웠지만, 칼리아는 속지 않았다.
“차라리 시간을 다 빼라고 했잖아. 왜 하필 오늘이야.”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어.”
이건 사실이었다. 출간이 코앞이라 늦어도 오늘까지는 원고를 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왕세자의 결혼식이고 뭐고 루터에게는 당장의 원고가 더 중요했다. 이런 날까지 무슨 놈의 일이냐고 타박하는 코델리아의 말 역시 소용이 없었다.
“괜찮아, 언니. 이 정도면 제때 왔지 뭐.”
제 편을 들어주는 제라니아의 말에 코델리아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제야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던 코델리아가 새까만 머리칼을 틀어 올려 묶은 청초한 미인을 알아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셀리나잖아!”
“안녕, 코델리아.”
차분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셀리나의 얼굴을 코델리아는 찬찬히 뜯어보았다.
“진짜 의외다. 너 여기 와도 괜찮아?”
얽혀 있는 관계를 생각하면 이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제라니아도 셀리나를 대기실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셀리나 리나엔. 예전 이름은 셀리나 휴스타인으로, 제1왕자이며 현재 왕세자의 가장 큰 정적인 데릭 리나엔의 하나뿐인 비.
그리고 그들의 소꿉친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