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0화 (11/171)
  • 제10화. 당신과 결혼하는 이유

    거절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남자는 지금도 제라니아에 대해 안 좋은 말들을 떠들고 다닌다고 들었다. 그래 봤자 알 만한 사람들은 그가 하는 말에 조금도 혹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치는 취해야겠지.

    “그러던 네가 나보다도 먼저 결혼을 한다는 게, 언제 봐도 참 믿기지 않네.”

    칼리아가 흘러내리는 옆머리를 다시금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제라니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

    “왕세자 전하랑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응, 나한테 다 맞춰 주신다고 했는걸.”

    이 드레스도 전하가 준 거라고,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제라니아를 보며 칼리아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남자들은 다 그래. 결혼 전에는 간이고 쓸개고 빼줄 것처럼 군다고. 당장 내 친구들도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 결혼 전이랑 달라졌다는 말이나 하고 있는데.”

    “내 친구들도 대체로 그렇다고 하긴 하더라.”

    당장 왕실에 시집간 이가 제 주변에 아예 없는 게 아니었다. 셀리나는 잘 지내고 있을까. 딴생각을 하고 있는 제라니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칼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나 걱정하라는 듯이.

    “…정말 괜찮겠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며.”

    제라니아는 빙그레 웃었다. 사교계는 물론 가족들한테도 세자 전하가 자신에게 열렬히 반해 있는 걸로 알려져 있으니, 저런 걱정이 나올 만도 했다.

    ‘사랑이란 마치 꿈이랑 닮았지. 시간이 지나면 스러진다는 점이 특히.’

    묘할 정도로 차갑게 대답하던 칼리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제 언니는 누구나 인정하는 사교계의 꽃이었지만 그만큼이나 사랑을 믿지 않았다. 감정이란 언젠가는 변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고 보면 그 후작가의 자제를 만날 땐 태도가 굉장히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왜 전하한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걸까. 다시 곰곰이 생각해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언니. 나는 전하의 사랑을 믿는 게 아니라, 그분이 내게 보여주는 존중을 믿는 거야.”

    칼리아의 미간에 그어져 있던 금이 아주 조금 얇아졌다. 그럼에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꼭 고이 간직하고 있던 보석을 홀랑 집어간 도둑놈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냥 뭐랄까…. 그 왕자님은 반짝거리기는 하지만, 묘하게 사람을 귀찮아하는 것 같은 이미지라서 말이지.”

    언니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제라니아는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무뚝뚝한 데다 경계심이 강하고, 시선은 예리하지만 말수가 많지 않은 사람. 제라니아가 프란츠를 보고 느낀 첫인상은 그러했다. 그래서 더 의외였다. 그가 제게 만남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을 때부터 줄곧.

    그나저나 대체 어쩌다 내게 관심을 가지시게 된 걸까.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그런 타입이 열렬할 땐 열렬해도, 딱 사랑이 식으면 상대한테 무미건조해지는 타입이거든.”

    그는 지금도 충분히 무미건조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무시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게 신기했다.

    “그런데 집착하면 또 엄청 집착할 것 같기도 하고….”

    그럴 리가.

    제라니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이 본 사람 중 가장 건조한 성격에 속했다. 누군가한테 집착하는 그의 모습은 도통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제라니아의 목표는 하나였다. 어떻게든 메리와 같은 아이들이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최소한의 존중만 보장된다면 프란츠와 결혼하는 것 자체에는 정말 별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이미 계약서로 작성되어 있으니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대가 없이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다 해줄 겁니다. 사랑은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당신 말고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생각은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인생은 모르는 일이다. 언젠가 정말 사랑하게 되는 상대를 만나실 수도 있겠지. 프란츠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에 환상이 없다고 대답한 건 진심이었다. 저나 그나 서로 간에 목적이 있어 결혼하는 사이가 아니던가. 무언가를 바라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사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다른 누구를 좋아하게 되더라도 제게 털어놓은 다음 이혼을 부탁하면 부탁했지, 뒤에서 문제가 생기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혼을 하게 된다면 제게는 잘된 일이었다. 한쪽의 결격 사유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혼이라면 그가 제게 약조한 일의 이행에는 지장이 없다.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게 문제기는 했지만.

    설령 제 직감이 빗나가서, 프란츠가 폭력적으로 나온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었다.

    계약서를 꺼내서 이혼을 요구할 수밖에.

    왕족 중 평범하게 이혼한 선례는 전무하다 들었으니 고생은 좀 하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결혼하고 나면 알게 되겠지. 시작하기도 전부터 걱정해봐야 정신건강에 좋지 않았다.

    “이성적인 분이잖아. 문제없을 거야.”

    자신 있게 대답했는데도 칼리아의 얼굴에서는 근심이 떠날 기미가 없었다.

    “네가 결혼이라…. 한다면 그 녀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분홍색이 섞여든 붉은 눈동자에 한숨이 스며들었다. 자못 심란해 보이는 얼굴로 칼리아는 제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런 표정이야, 언니?”

    “…그런 게 있어.”

    복잡한 표정으로 제라니아를 바라보던 칼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하얗고 곱디고운, 잘 가꾸어진 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것만은 변하지 않았다. 사라진 자신을 찾으러 왔을 때마다, 언니는 마지막에는 꼭 이렇게 손을 내밀었다.

    “파티장으로 돌아가자.”

    “응.”

    조심스레 손을 꼭 붙잡자, 온기가 스며들었다. 언니랑 손을 잡는 건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헤실 웃는 제라니아를 못 말린다는 듯이 바라보던 칼리아가 걷기 시작했다. 잠자코 그 뒤를 따라가며 제라니아는 그나마 남아 있던 불안 역시 싹 던져버렸다.

    * * *

    “안녕하세요, 제라니아 바이첸입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꾸며진 방에 마련된 커다란 소파에 앉아, 제라니아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현재 그는 왕궁에 마련되어 있는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소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단정한 회색 머리칼의 청년이 예를 갖추어 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비전하. 이렌스 빈즈입니다. 프란츠 전하의 참모를 맡고 있습니다. 저 옆에 앉아 건들거리는 근육맨은 티레인 보데로아라고, 이름만 알아 두십시오. 상당히 귀찮은 작자이니 적당히만 받아 주시고요.”

    “어이, 빈즈! 소개가 왜 그렇게 무성의해?!”

    툴툴거리는 티레인을 이렌스는 눈길도 주지 않고 무시했다. 그가 뒤에 서 있는 덥수룩한 갈색 머리 남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저쪽은 제롬 플린트. 전하의 호위기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제롬 플린트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티레인 보데로아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기사답게 딱딱하게 고개를 숙이는 제롬과 달리, 티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제라니아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입맞춤을 남겼다. 멀뚱히 그들을 쳐다보던 제라니아가 말했다.

    “호위기사신데 여기 계셔도 되는 거예요? 전하를 보필하셔야 하시는 거 아닌가요?”

    “전하의 허락을 받은 일입니다.”

    차분하게 대답하는 얼굴이 자못 무뚝뚝해 보였다. 굉장히 깍듯하게 나오는 이들에 제라니아는 멋쩍은 듯이 말했다.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닌데, 절 비전하라 부르셔도 괜찮은 건가요?”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일주일 뒤부터는 싫어도 그 호칭을 들으셔야 할 텐데요. 어차피 저희끼리만 있으니 이 방에 있는 사람들만 입 다물면 됩니다.”

    “이제 이걸 장관한테 꼰지르면 되는 건가?”

    “품위 있는 말투를 좀 사용하십시오. 비전하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핀잔을 건네자 티레인은 ‘뭐라고 했나? 요즘 귓구멍이 막혀서 잘 안 들리네.’라는 말로 약을 올렸다. 이렌스가 가차 없이 들고 있던 서류가 고정된 나무판으로 그의 머리를 탕 내리쳤다. 티레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으악!”

    “마담 세자르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비전하께서 아무래도 사교계에 익숙하지 않으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제게 궁중 예절을 가르치고 있는 마담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가볍게 오고 가는 대화 분위기에 표정이 풀려 있던 제라니아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알려 주시려고요?”

    “제가 아는 만큼은. 적응하실 때 도움이 될 겁니다.”

    이렌스가 준비해 두었던 서류뭉치를 꺼내 제라니아에게 내밀었다. 잠자코 종이를 훑어보고 있는 그에게 이렌스가 말했다.

    “적으실 게 필요합니까?”

    “아니요. 그냥 들어도 괜찮아요.”

    가볍게 훑어보듯 읽고 있는 것 같은데도, 종이를 넘기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긴가민가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이렌스가 조용히 헛기침을 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 *

    “결혼 파기하고 그냥 비전하를 고용하면 안 될까요.”

    국왕과의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프란츠에게 이렌스는 진지하게 말했다. 프란츠가 왔을 때 제라니아는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의상실에 갈 시간이 다 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결혼식이 빠르게 진행되는 만큼 일정도 그만큼 빡빡했다. 제라니아의 얼굴에 피로감이 짙었던 것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예상보다도 훨씬 더 영리하십니다. 일단 한 번 배우신 건 잊지를 않으세요. 이 기한 안에 교육을 끝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는데, 너무 잘 따라오다 못해 시간이 남을 것 같지 뭐예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모르시는 게 너무 많습니다.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으니, 이참에 빈즈, 당신이 한번 그분을 만나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담 세자르가 남긴 말을 이렌스는 제대로 이해했다.

    정확히는, 그 많은 자료들을 순식간에 다 읽더니 제가 설명하는 것들을 별다른 무리 없이 이해하는 걸 봤을 때부터. 뭘 물어봐도 척척 대답하는 걸 보면, 왕궁 내부 사정이나 사교계에 대해서만 잘 모르지 기본적으로 지식이 풍부한 것 같았다.

    넌지시 질문하니 공작가의 서재를 10대 시절에 이미 다 털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제야 이렌스는 이 기이하게 불균형한 지식의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십에는 관심이 일절 없지만 학문에는 관심이 많고, 책을 벗으로 삼은 이라. 그런 것치고 소심하다는 느낌이 없는 것도 여러모로 신기한 일이었다. 자기주장에 거침없다는 말이 무척 잘 어울렸다.

    프란츠의 결혼 선언을 들은 후 백방으로 공녀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았으나, 바이첸 공작가에서도 둘째 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흘러나오는 게 없었다.

    파티에서도 조용히 아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갈 때가 많은 데다 워낙 존재감이 없다고들 했다. 맞선이 몇 번 오간 적은 있으나, 그쪽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도 영 신통치는 않았다.

    이제껏 공녀에 대해 들려온 전반적인 평은 ‘생각보다 무척 평범하다.’였다. 사실 프란츠가 결혼을 결정한 이유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개입한 게 아닐까라는 의심이 든 건 그래서였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여전하지만, 제라니아를 만난 뒤 이렌스는 아무나 자기 옆자리에 앉힐 생각이 없다고 했던 프란츠의 신념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평범하다, 고? 과연 여자에게서 얼굴만을 보는 종자들이 남길 만한 평이었다. 정말이지, 차인 놈들의 말은 믿을 게 못 된다고들 하던데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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