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9화 (10/171)
  • 제9화. 제라니아의 방식

    제라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분노해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제 문제에 친구를 끌어들이는 것도 영 못 할 짓이었다.

    끈질기게 안 된다고 버티는 엘레나를 겨우겨우 설득에 성공하자, 엘레나는 부루퉁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가 눈을 깜빡였다.

    “아, 맞다. 칼리아 님이 널 찾던데.”

    “언니가 파티에 왔어?”

    “네가 왕세자 전하랑 춤을 추고 난 뒤엔가? 그 직후에 오셨어.”

    “조금 있다 만나러 가야겠네. 알려줘서 고마워.”

    가볍게 인사하고 제라니아는 총총 복도로 들어섰다.

    “힘내! 꼭 한 방 먹여줘!”

    등 뒤에서 작게 속삭이는 엘레나의 목소리에 제라니아의 입꼬리가 설핏 올라갔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던 제라니아는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무리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대여섯 명의 여성들이 조용조용 떠들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중 자신에게 와인을 쏟은 이도 보였는지라, 제라니아는 복도 한 가운데에 멈춰 섰다.

    곧 그쪽에서도 제라니아를 발견했는지 저들끼리 수군대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드레스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는 이들도 보였다.

    몇 걸음 남긴 위치에서 여성들이 멈춰 서자, 제라니아가 싱긋 웃으며 제게 와인을 쏟은 여성을 똑바로 마주 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모니카.”

    “무슨 일이시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대화로 해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요.”

    “예?”

    단도직입적인 말에 다들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양 제라니아를 쳐다보았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제라니아는 연달아 말을 쏟아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부러 와인을 옷에 쏟는 건 너무 고전적이에요. 음식을 함부로 버리는 건 나쁜 짓이랍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였지만 그 내용에는 뼈가 있었다. 여인은 불안한 기색을 애써 지워내고 말했다.

    “…따지러 온 건가요?”

    “아뇨, 그것보단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파티에 자주 나오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제까지는 인기 있는 소꿉친구를 둔 자의 숙명이려니 생각하고 그러려니 했지만, 이번 일은 달랐다.

    그전까지는 자신이 굳이 해결하러 나설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조용히 살고 있다 하나, 자신은 공작의 자식이었다. 그러니 뒤가 무서워서라도 자잘한 괴롭힘 이상으로 문제를 발전시키지는 못한다.

    고작 이 정도로 울며불며 난리칠 이유도 없었고, 문제를 키울 필요도 없었으며, 엮일 필요도 없는 타인에게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할 필요 역시 없었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딱히 화를 내거나 제지한 적이 없으니, 이들이 자신을 어느 정도 우습게 여기게 된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왕자님과는 어쨌거나, 평생을 동고동락해야 하는 사이였다. 그건, 즉 이런 문제를 그냥 모르쇠로 넘길 수만은 없다는 뜻이었다.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꿈이 어째 결혼 시작 전부터 깨어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제라니아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무시했다.

    자고로 사람은 커다란 목표를 위해 소소한 것을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그렇게 다짐하면서.

    “저는 분란을 싫어합니다. 딱히 여러분과 다투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그렇지만 제 주변 사람들이 휘말리는 것 역시 내키지는 않습니다. 절 어떻게 생각하시든 여러분의 자유죠. 그러나 제대로 된 대화 없이 무조건 남을 단정하고 미워하는 건 슬픈 일이라고 생각해서요.”

    조곤조곤 말하며 제라니아는 눈가를 누그러뜨렸다.

    “비록 제가 여러분 눈에는 부족해보일지 모르나, 왕세자 전하께서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분의 선택을 폄하하고자 그런 일을 시도하신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부드럽고 우아한 말씨였다. 악의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다수의 앞에서 이야기를 하면서도 겁먹은 기색 역시 없었다. 게다가 어쨌거나 제라니아는 공녀였다. 신분이란 그 자체로 상대방을 주눅 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찜찜한 얼굴로도 반박하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제라니아는 차분하게 고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이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싸우지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어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피차 얼굴 붉힐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진심이었다. 그리고 보기와 달리 제라니아는 지금껏 꽤 많은 문제들을 겪어왔다. 눈앞의 여인처럼 일부러 와인을 쏟는 정도는 애교였고, 가끔 시비가 걸리기도 하거나 실수인 척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언제는 그 장면을 크리스가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크리스는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을 지으며 화를 냈다.

    그날 이후로 괴롭힘이 현저히 줄어든 것을 생각하면 고맙기는 했으나, 대놓고 보이지 않는 자잘한 괴롭힘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귀를 긁는 정도만큼이나 별것 아니었는지라 적당히 넘어갔을 뿐.

    한평생 온화하고 다정해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생겼다는 말은 상대하기 만만해 보인다는 것과 똑같았다. 크리스가 자신을 싸고돌았던 것이 문제의 한 축이기는 했으나 근본적인 원인은 아마 저것이겠지.

    그러니 어쨌거나 제 선에서 문제를 정리해야 했다. 안 그러면 일이 더 커지기만 할 테니. 어쩐지 그 무심한 왕자님도, 이 사실을 알면 크리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게 행동하지는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남편 될 사람에게 이런 믿음이 있는 건 좋은 일인 걸까.

    조목조목 말을 꺼내고 대답을 기다리는 제라니아를 여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왜 이런 얘기를 하시는 거죠?”

    “전하를 좋아하셔서 그런 거지, 정말 그분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으신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여인의 입술이 뚜껑을 닫듯 꼭 다물렸다. 다른 여인들도 조용히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속닥거렸다. 입을 열려던 여인은 제라니아를 쳐다보고 움찔했다.

    정확히는 그 뒤편을.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네.”

    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에 제라니아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진한 주홍빛 드레스를 입고, 새붉은 색의 머리카락을 올림머리로 묶은 여인이 고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금빛 문양이 그려져 있는 주홍색 부채가 드레스와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렸다.

    아버지인 공작을 닮아 늘씬한 키의 미인, 칼리아 바이첸이 고아하게 손짓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야.”

    안 그러냐는 듯 칼리아가 눈짓하자, 여인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제라니아는 멀뚱히 제 하나뿐인 언니를 쳐다보았다. 언제 봐도 자신과 자매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달랐다. 자신이 작은 동물이면 언니는…. 인간을 공작에 비유한다면 딱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칼리아가 가보라는 듯 부채를 흔들자 여인들은 시선을 내리깔며 후다닥 흩어졌다. 순식간에 정리된 상황에 제라니아는 멋쩍게 웃었다.

    아, 대답을 들었어야 하는데.

    뭐 이미 충분히 알아듣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언니의 등장은 꽤 적절했던 것 같기도.

    태평하게 생각하는 제라니아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칼리아가 작게 혀를 찼다.

    “하여간, 넌 여전히 무르기 짝이 없구나.”

    “언니.”

    칼리아가 펼쳤던 부채를 탁, 소리가 나게 접었다. 그 단호한 성정을 표현하듯이.

    “그렇게 끝내도 되겠어? 충분히 더 경고하든가, 겁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당장 방금 상황을 봐. 나한테는 찍소리도 못 하는 것들이 너한테 그러는데 열 받지도 않니. 심지어 넌 곧 있으면 왕세자비가 될 사람인데.”

    언제 다가왔나 했더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 드레스에 벌어진 문제에 관해서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엘레나가 말한 걸까. 제라니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 정도는 위협도 아니잖아.”

    동의하지 않느냐는 듯 눈꼬리를 접어 웃는 동생을 칼리아는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아. 어떻게든 좋게 해결하려고 한 거겠지. 하지만 제라니아, 정말 대화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니? 저런 것들이면 몰라도, 정말 악의가 깊은 인간에게는 오히려 역효과일 수 있다고.”

    지금도 마음에 안 드는지 칼리아의 우아한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제라니아의 파티 참석률이 워낙 저조한 탓에 자매가 같은 파티에 함께 간 적은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태평하게 굴 정도라면 최소 한두 번 겪은 일은 아닐 터였다.

    당장 멀리 갈 것도 없이, 자신은 공작의 딸이니 무례를 저지르지 말라고 하면 끝날 문제였다. 대충 봐도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심지어 이제 곧 세자비가 될 텐데, 이래서야….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상대는 나름 가리고 있으니까.”

    “제라니아.”

    “미안. 그래도 시도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더 싫은걸.”

    “정말이지.”

    고집을 부리는 동생의 볼을 칼리아가 가볍게 꼬집었다. 손끝에 잡히는 볼이 말랑말랑했다. 고작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도, 칼리아의 눈에는 여전히 어려 보이기만 하는 동생이었다. 한참 어린 코델리아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표독스러움과는 정말이지 거리가 먼 그 온유한 성정 때문일까.

    “널 화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도 참 대단한 사람이겠다 싶네.”

    칼리아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재미있는 말을 들은 양 제라니아는 웃음을 흘렸다.

    “언니가 그렇게 아버님을 존경하는 줄은 몰랐는걸.”

    “아.”

    칼리아의 머릿속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제라니아는 어지간한 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나, 하기 싫다 표현하는 일에는 강경했다. 언제는 공작이 부인 등쌀에 떠밀려 제라니아에게 맞선을 보라 요구한 적이 있었다. 그 정도는 별일 아니겠다 싶었는지 제라니아는 순순히 맞선에 응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맞선 상대가 제라니아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라니아는 맞선에 나간 당일 그와 맞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그날 정중히 혼담을 거절했다.

    딸이 정말 결혼을 못 할지도 모른다 걱정했는지 몇 번 더 만나보라고 요구하던 공작에게 제라니아는 생긋 웃으며,

    ‘그렇게 그분이 마음에 드신다면, 아버님이 어머님이랑 이혼하시고 그분과 결혼하시는 게 어떠세요?’

    라고 말했고, 말문이 막힌 공작에게 아버님이 절 보데로아 가문에 영지 관리인으로 보내고 싶으신 줄은 몰랐다며 쐐기를 박았다.

    실제로 남자는 제라니아의 놀라울 정도로 빠른 두뇌회전과 얌전해 보이는 외모에 관심이 있었던 거지, 사교계에서는 숨은 바람둥이로 유명했다.

    제라니아 역시 남자의 그런 속내를 금세 간파했다.

    사랑 이전에 인간적으로 믿을 수 없는 상대와 결혼할 수는 없었으므로 제라니아는 거절로 문제를 마무리하려 했다. 공작이 끈질기게 굴지만 않았어도 저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남자에 대한 평판을 맞선 전 이미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던 아버지가 제라니아의 말에 뒷목을 잡고 넘어가는 장면은 칼리아의 입장에서도 솔직히 좀 통쾌했다. 코델리아는 아예 우리 가문 최강자는 둘째 언니라고 공인할 정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