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8화 (9/171)
  • 제8화. 왕자님과 춤을

    “뭐지?”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을 돌아보자, 입구에서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플래티넘 블론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결 좋은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잘생긴 미남자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쨍하다 싶을 정도로 새파란 눈동자는 멀뚱히 서 있는 제라니아를 발견하고 천천히 밝아졌다.

    성큼성큼 다가온 프란츠가 제라니아의 앞에 멈춰 싱긋 웃었다. 전에 보았던 무뚝뚝한 얼굴 대신 다소 능글맞다 싶은 미소를 짓고 있는 프란츠를 보며 제라니아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프란츠를 바라보는 크리스토퍼의 눈빛이 묘하게 굳어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를 올려다보며 제라니아는 재빨리 표정을 관리했다. 연회장의 모두가 자신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제라니아.”

    “…저희 얼굴 본 게 그저께 아니었나요?”

    조심스럽게 묻자, 프란츠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가장 매력적으로 보일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남자였다. 잘생긴 얼굴에 미소가 깃들자 주변 여인들이 일제히 얼굴을 붉혔다.

    “매일 봐도 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라서 말입니다.”

    프란츠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제라니아의 손을 붙잡고 손등에 짧게 입맞춤을 남겼다. 터치는 의외로 정중하고 담백했고, 예절 역시 완벽했다. 그 일련의 태도가 무척 자연스러워서 제라니아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래서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구나. 자신과 있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빈틈없다는 느낌이 강했다.

    “전하께서는 어쩐 일로 여기에…?”

    “그대가 오늘 여기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절 만나러 여기까지 행차하셨다고요.

    물론 저한테 열렬히 구애했다는 다소 계면쩍은 설정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행동이긴 했다. 다만 왕세자가 이렇게 열심히 약속을 이행할 줄은 몰랐는지라, 좀, 아니 많이 놀라웠다.

    “춤을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제라니아의 손을 꼭 붙잡은 채 프란츠가 지그시 시선을 마주했다. 제라니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대답이 돌아오자 프란츠는 제라니아를 붙든 손을 제 쪽으로 살며시 끌어당겼다. 그 손길을 따라 몇 걸음 앞으로 걸어온 작은 몸이 프란츠의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얼떨결에 품에 안기다시피 한 제라니아는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속삭였다.

    “저어…?”

    “너무 놀라시는 것 아닙니까. 곧 결혼할 사이인데 말이죠.”

    나지막한 속삭임에 제라니아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구나! 하긴 약혼자인데 너무 담백해도 좀 그런가!’

    하지만 이런 곳에서 이렇게까지 애정행각을 벌여도 되는 건가? 그렇지만 춤을 추면 어차피 스킨십을 하긴 해야 하니까….

    살면서 이런 문제에 직면한 적이 없었는지라 제라니아는 고민에 빠졌지만, 일단은 프란츠가 유도하는 대로 그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좀 민망하긴 했지만 전하가 나보다는 이런 부분에서 낫겠지, 라는 계산하에서였다.

    꼼지락거리는 갈색의 작은 뒤통수를 내려다보던 프란츠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는 가늘고 연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천천히 손을 내려 숄이 둘러져 있는 제라니아의 허리께를 감싸 안던 프란츠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건 뭡니까.”

    와인이 쏟아진 부위였다. 반응이야 예상했던 고로 제라니아는 태연하게 속닥거렸다.

    “별일 아니에요.”

    “갈아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춤부터 추고 갈아입으러 다녀올게요. 모처럼 신청해 주셨는걸요.”

    “그렇지만.”

    “프란츠, 이건 제 일이에요.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제 이름까지 불러가며 선을 긋는 태도에 프란츠는 조용히 대답했다.

    “약혼자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 타인의 손을 빌리는 게 당연한 건 아니죠.”

    그와 함께 살짝 뒤로 물러난 제라니아가 가자는 듯 그를 이끌었다. 서늘한 눈빛을 하고서도 프란츠는 순순히 제라니아를 따라 춤을 추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섰다. 그 와중에도 입가에서 미소를 거두지는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둘의 얼굴을 따갑게 찔렀다.

    음악이 바뀌고 두 사람은 부드럽게 스텝을 밟았다. 춤에는 영 소질이 없는 제라니아와 달리 프란츠의 춤은 완벽했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리드하는 움직임에 제라니아는 얌전히 몸을 맡기고 움직였다. 확실히 춤에 능숙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워낙 움직임이 우아한 편이라서 그런지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다.

    열심히 따라오고 있는 제라니아를 내려다보며 프란츠는 밀어를 말하듯 나긋하게 속삭였다.

    “당신은 생각보다 더 만만치 않군요.”

    드레스에 난 자국이 어떻게 생긴 것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공작의 딸인데도 이런 식으로 구는 자들이 있다니, 어지간히 만만해 보이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키는 다른 여성들에 비해서도 작은 편이고, 이목구비는 화려하기보단 단아한 쪽에 가깝고, 나긋하게 웃는 미소가 무척 잘 어울리는 여인.

    제라니아가 어떤 이미지로 보이고 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겉으로만 보면, 문제가 생겼을 때 제게 울며 매달릴 것같이 연약해 보인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는 이 일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 자부한다. 망설이지 않고.

    “그래서 절 선택하신 거잖아요.”

    녹색 눈동자가 프란츠를 올려다보며 싱긋 휘어졌다. 부드럽고 다정한 눈빛이 그를 향했다.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연회장을 한 바퀴 돌아, 두 사람의 주변을 맴돌았다.

    천천히 춤을 추면서도 프란츠는 제라니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말문이 막히는 감각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성난 국왕의 앞에서도 세 치 혀는 살아 있다 평해지던 자신이, 고작 이 작은 여인의 앞에서 당황하다니.

    계약 조건을 말할 때는 꺾이지 않을 것처럼 눈을 반짝거리더니, 이럴 때는 잘 휘어지는 버드나무를 떠올리게 했다. 분명한 건 제가 겉으로 내보이는 이미지가 다르듯이, 눈앞의 여인 역시 비슷한 면모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미 가지고 있던 흥미가 몸집을 부풀리는 것을 느끼며 프란츠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미소를 본 제라니아가 발을 삐끗했다.

    제 발이 밟힐 위기를 가볍게 넘긴 프란츠가 제라니아의 허리를 다정하게 끌어안고 몸을 더욱 바짝 붙였다. 살짝 고개를 숙인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이 절 선택한 거겠죠.”

    * * *

    “와우, 저게 뭐지.”

    멀찍이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티레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분명 계약으로 성립된 관계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더 그럴듯하게 보였다. 프란츠를 따르기 시작한 지 7년이 넘어가는 만큼, 웃고 있어도 그의 심기가 어떤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프란츠는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본인이 자각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티레인은 가만히 제 턱을 매만졌다.

    “이야, 이거 생각보다….”

    더 재미있어지겠는걸.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제롬과 지금도 한창 서류와 씨름하고 있을 이렌스가 이 모습을 봤으면, 왜 이런 좋은 구경을 자신 혼자 하고 있냐고 억울해했을 것이다. 실컷 약을 올려줄 생각에 티레인이 와인을 홀짝이며 즐겁게 흥얼거렸다.

    무사히 한 곡이 마무리되고 둘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제라니아는 붙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프란츠는 손을 놓지 않았다. 제라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프란츠는 곧 어느 무리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얼떨결에 프란츠를 따라 걸어가던 제라니아가 손을 빼려고 했으나 커다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리에는 나이 지긋한 남성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중 한 명이 활짝 웃으며 프란츠를 반겼다.

    “왕세자 전하! 어서 오십시오. 파티는 잘 즐기고 계십니까.”

    이 파티의 주최자인 펜라르 백작이 인사를 건넸다.

    “충분히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백작. 혹시 비어 있는 방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 시중을 들 만한 하녀도 둘 정도 필요합니다.”

    “예? 아,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백작이 근처에 있던 하인 중 한 명에게 눈짓했다. 하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라니아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프란츠의 뒤로 시종들이 후다닥 다가왔다. 소리 없이 제 뒤를 따르는 시종들에게 프란츠는 지시했다.

    “내 약혼자한테 새 드레스가 필요한 것 같은데. 마침 준비해둔 것이 있지 않나.”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이 정도는 괜찮겠지요.”

    푸른색 눈동자가 엄격함을 띠었다. 프란츠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고, 제라니아는 그렇게까지 고집을 피울 생각이 없었다.

    “알겠어요.”

    그 말을 들은 뒤에야 프란츠는 조심스레 손을 놓았다. 선선히 시종을 따라가는 제라니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란츠가 몸을 돌려 자신을 기다리는 무리에게로 걸어갔다.

    시종을 따라간 제라니아가 한참 뒤 옷을 갈아입고 파티장으로 돌아왔다.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편에서 걸어오던 엘레나를 발견한 제라니아가 쪼르르 그에게로 다가갔다. 뒤로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엘레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진하고 아름다운 눈가가 휙 치솟았다.

    “너 대체 어딜 갔었어? 내가 한참을 찾았…. 와, 붉은색 드레스야?”

    엘레나가 화를 내다 말고 감탄을 흘렸다.

    제라니아는 붉은 원단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강렬한 색상인데도 단정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풍성한 소매가 신기한지 이리저리 흔들어보던 제라니아가 멋쩍게 말했다.

    “전하가 입으라고 주셨어. 그런데, 나한텐 너무 화려하지 않아?”

    엘레나가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제 어깨를 꽉 붙드는 엘레나의 눈동자에서 제라니아는 광기를 읽었다.

    “아니! 너무 잘 어울려! 앞으로도 제발 이런 걸 입고 다녀라.”

    붉은색은 왕실의 상징 중 하나로,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색깔이 아니었다. 현왕의 자식이 서른 명이 넘어가는 바람에 파티에서 보기는 꽤 흔해졌다 하지만.

    “그것보다, 엘레나. 아까 그 아가씨가 누군지 안다고 했지?”

    “어, 그건 왜?”

    “어디로 갔는지 알아? 해야 할 말이 있어.”

    “뭐야, 드디어 권력을 휘둘러볼 생각이 든 거야?”

    엘레나가 신난 얼굴로 방금 전 그 여자들이 사라진 복도 쪽을 가리켰다. 여자들에 대한 정보는 덤으로 따라왔다.

    지켜보고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역시나였는지라 제라니아는 속으로 하하 웃었다. 엘레나는 뒤끝이 장난 아니니까.

    “…나 혼자 갈게.”

    “미쳤어?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갈 거면 나랑 같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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