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7화 (8/171)
  • 제7화. 파티에서

    “제라니아!”

    떠들썩한 파티장의 한복판에서, 샴페인이 담긴 잔을 든 채로 제라니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싱긋 웃고 있는 금발의 여자가 와락 달려와 그를 껴안았다. 재빨리 팔을 벌려 저보다 한참 큰 여자를 끌어안은 뒤 제라니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술을 쏟을 뻔했어.

    숨이 막힌다 싶을 정도로 제라니아를 찐하게 끌어안았던 여인이 몸을 떼고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과하게 반짝이는 푸른색 눈동자가 영 부담스러웠다.

    “너 진짜 얼마 만에 보는 거니? 얼굴이 너무 비싼 거 아냐?”

    “미안, 엘레나. 요즘 바빴어.”

    “그 핑계 벌써 몇 번짼지는 알지?”

    “…여섯 번?”

    “열 번은 족히 넘었거든!”

    하여간 당사자는 기억도 못 한다며 툴툴거리는 친구가 귀여워 제라니아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도 이미 상한 기분은 돌아오지 않는지 엘레나가 손가락을 척 내뻗었다.

    코끝에 닿을락 말락 한 손가락을 사팔눈으로 내려다보는 제라니아에게 엘레나는 섭섭한 티를 양껏 냈다.

    “너 결혼한다며? 이런 중요한 소식도 안 알려주고!”

    “아….”

    2주쯤 전, 왕실에서는 왕세자인 프란츠 리나엔의 결혼을 공식 발표 했다.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일이건만 그 뒤로 딸려온 이야기는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우연한 계기로 말동무가 된 여인에게 첫눈에 반한 왕세자가 열렬한 구애 끝에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어찌 보면 흔하다고 해도 좋을 만한 사랑 이야기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고로 남의 사랑 이야기를 가장 즐기는 법이었다. 왕세자가 스물이 넘어가도록 그 흔한 스캔들 하나 터진 적이 없었던 인물이라는 점 역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때문에 요즘 사교계의 최고 이슈는 두 가지로, 왕세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은 과연 누구인가, 와 결혼식 초대장을 받을 이가 누구누구인가에 대해서였다.

    왕세자도 그렇지만 결혼 상대는 바이첸 공작가의 직계였다.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귀족이라 해도 무방한, 개국 공신 출신이며 지금까지도 공고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 권세가.

    그러나 그런 것치고 결혼 상대에 대한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활발하게 소식이 들려오는 다른 자매들과는 달리 그 정체가 베일에 싸여 있는 공작의 따님.

    원래 넉넉할 때보다는 없을 때가 더 아쉬운 법. 사람들은 자연히 더욱 불타올랐다.

    언니와 동생 편에 소식을 듣고야 있었지만 영 실감이 나지 않아, 제라니아는 뺨을 긁적거렸다.

    “그것도 미안, 내가 너무 정신이 없었네.”

    “미안하면 꼭 결혼식에나 초대해줘. 세 번째 줄로!”

    보통 결혼식에서 친족들이 앉는 자리는 두 번째 줄까지였다. 가장 좋은 자리를 달라는 귀여운 투정에 제라니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볼게.”

    다정하게 웃던 제라니아는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제게 콕콕 쏟아지는 시선들이 저 멀리로 삐끗하거나, 슬쩍 부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제라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티는 오랜만인데, 오늘따라 번잡스러운 것 같네. 이쪽에 시선이 오는 것도 같고….”

    “당연하지, 다들 널 보고 있으니까.”

    “응?”

    엘레나가 슬쩍 몸을 숙여 제라니아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왕세자 전하가 그토록 열렬하게 구애했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궁금한 거 아니겠어?”

    “아, 하하…. 하….”

    열렬하다면 열렬하긴 했다. 그게 모두가 생각하는 열렬한 감정은 아닐 뿐이지. 오히려 건조하기 짝이 없는 관계에 가까웠다. 이런 사정을 외부에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제라니아는 얼버무리듯 웃었다.

    당장 프란츠와는 엊그제도 만났지만, 그에게서는 결혼에 대한 설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제라니아 역시 딱히 실감 나지는 않았으므로 그의 그런 태도를 무심히 흘려 넘겼다.

    어쨌거나 결혼 준비에 자신보다 그가 더 열심인 건 사실이었다. 결혼이라는 행사가 절대 만만하지 않다는 걸 제라니아는 요 2주간 똑똑히 체감했다.

    “그리고 너, 조심해.”

    “내가 왜?”

    “몰라서 물어? 왕세자 전하는….”

    그렇게 말하던 중 제라니아의 옆으로 누군가 다가와 부딪혔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하게 깨졌다. 잔에 담겨 있던 와인이 제라니아가 입은 하늘색 드레스의 옆구리에 쏟아져 새빨간 얼룩을 남겼다.

    연주홍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인이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어머, 죄송해요. 너무 작아서 서 있는 줄도 몰랐네요.”

    물론 사과치고는 다소 비아냥거리는 투였다. 제라니아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아뇨,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대답을 들은 상대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게 아닌데?’라는 듯 제 얼굴을 뚫어져라 살피는 모습에 제라니아는 덩달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이봐요, 남의 드레스를 다 버려놓고 죄송하다 한마디면 다예요?”

    엘레나가 표독스럽게 쏘아붙이자, 잠시 움찔하던 여자가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그럼 뭐 어떻게 하나요? 무릎 꿇고 사죄라도 하란 말인가요?”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여자의 옆에 서 있던 무리가 조용히 키득거렸다. 엘레나가 화가 나 소리쳤다.

    “뭐예요?!”

    “그만해, 엘레나. 드레스는 됐으니 이만 가보세요.”

    한 걸음 나서려는 엘레나를 제라니아가 손을 뻗어 막았다. 실랑이를 더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의지 표명에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는지 여자는 제가 어울리는 무리에게로 돌아갔다.

    허리께에 선명한 얼룩을 냅킨에 물을 묻혀 대강이나마 수습하고 있는 제라니아의 주변에 작은 수군거림이 번졌다.

    ‘착한 척하는 게 아주 고단수네.’

    ‘저런 모습에 넘어가셨을까?’

    ‘전하께서는 다정한 분이니까. 저렇게 평범한 여자가 전하를 홀린 거라면 그것밖에 없지 않겠어?’

    ‘대체 크리스토퍼 경은 왜 저런 여자를….’

    제법 악의적인 속삭임과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들이 뿌연 먼지처럼 풀썩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가만히 상황을 귀담아듣고 있던 제라니아의 옆에 서 있던 엘레나가 드레스를 살피며 분통을 터트렸다.

    “진짜 이것들이. 이 드레스 너한테 되게 잘 어울렸는데.”

    “괜찮아. 그것보다 아까 하려던 말은 뭐였어?”

    순진무구해 보일 정도로 맑은 녹색 눈동자를 쳐다보며, 엘레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전하는… 인기가 많잖아.”

    “인기?”

    “너 모르니? 왕세자 전하가 파티에 나온다고 하면 눈길 한번 받겠다고 치장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기가 많으신 것 같긴 했다. 사교계에 관심이 없는 제 귀에도 들릴 정도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멀뚱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제라니아의 얼굴을 보며 엘레나는 속이 터졌다.

    프란츠 리나엔은 인기가 많았다. 아니, 인기가 많다는 말로는 그의 주변을 둘러싼 사건사고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의 손을 한번 잡아보고 싶어 난리를 치는 여성들이 파티마다 속출했다.

    크레이츠 왕국은 무를 숭상하는 나라다. 척 보기에도 무인이다 싶은 켄드릭 국왕과 달리 그는 어머니를 닮아 아름답다고 할 만한 미모를 지녔다. 골격이 장대하고 몸이 좋은 편이긴 했으나, 왕세자는 굳이 따지면 검을 휘두르기보단 정치인에 더 가까웠다.

    아무리 그가 차기 권력자라 하나, 저렇게까지 열광할 상대인가? 도대체 다들 왜 저렇게까지 왕세자를 좋아하는 걸까, 라는 의문을 토해내면 제가 어울리는 친구들은 참 열성적으로 말을 토해냈다.

    그때는 대충대충 흘려 넘겼던 이야기들을 엘레나는 억지로 하나둘씩 떠올렸다.

    눈앞의 이 대책 없는 친구를 위해서.

    “다들 전하를 좋아하는 모양이네.”

    위기감 한 점 없이 느긋하게 말하는 제라니아를 보며 엘레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일단 잘생겼잖아. 왕족들이야 다들 한 얼굴 한다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잘생겼대. 태도가 다정다감한 데다 매너가 그렇게 완벽한데 질척거리지 않는 느낌인 것도 좋다더라. 강한 남자도 좋지만 대부분 거칠기만 해서 별로라고도 했고.”

    남의 이야기를 하는 양 엘레나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물론 남의 이야기가 맞았다.

    “전하께서 잘생기시긴 했지.”

    그런 얼굴이 흔할 리가 없었다. 흔하다면 그건 그것대로 사람들의 미의식에 도움이 되긴 할 것 같지만.

    그런데 다정다감이라니, 그건 대체 뭐지. …내가 아는 전하가 맞긴 한가?

    여기서 캐물었다간 그림이 좀 이상하게 될 것 같아 제라니아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잘못하면 그의 이미지에 문제가 갈 수도 있으니까.

    조용히 샴페인을 홀짝이던 제라니아는 제 어깨를 꽉 붙잡는 손에 눈을 깜빡거렸다. 엘레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제라니아. 넌 바이첸 공작의 딸이잖아. 곧 왕세자비가 될 거고.”

    “그렇지.”

    “아니, 뭐가 ‘그렇지.’야? 내가 쟤네들을 알거든? 너네 언니랑 동생한텐 꼼짝도 못하는 것들이! 너한테 이러는데 화도 안 나?”

    엘레나는 속닥속닥 방금 전 부딪혔던 여자가 속한 무리가 있는 쪽을 힐끗 쳐다보며 열변을 토했다. 얌전히 엘레나가 말을 끝내기를 기다리던 제라니아가 차분한 눈을 했다.

    “옷은 세탁하면 되는걸. 그리고, 와인 좀 쏟은 걸로 화낼 건 아니지. 이 이상 나한테 뭘 하지도 못할 텐데.”

    엘레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친구를 쳐다보았다. 왕세자비가 된다고 해서 좀 여우 같은 기질이 생겼으리라 기대했건만, 제라니아의 태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참 한결같았다.

    하긴 이런 시련이 이번만도 아니었으니 그럴 만한가.

    “제리!”

    나왔다. 제라니아 인생의 또 다른 시련.

    둘은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새까만 정장을 차려입은 크리스토퍼 휴스타인이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머리를 뒤로 넘기고 있어 평소보다 훨씬 깔끔한 인상이었다. 한쪽 팔에는 남색 숄을 들고 있었다.

    영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는 엘레나와 달리 제라니아는 퍽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크리스.”

    산뜻하게 웃으며 다가온 크리스토퍼가 냅킨을 들고 있는 제라니아의 손과 그 손이 닿은 옆구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쩌다 보니.”

    크리스토퍼가 가지고 온 숄을 제라니아의 허리에 둘러주었다. 엘레나가 그런 크리스토퍼를 보며 혀를 찼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크리스토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갈아입을 드레스는 있어?”

    “저택 측에 요청하려고. 크리스,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야?”

    “…그냥, 혹시 몰라서.”

    더 말하기 싫은 듯 크리스토퍼는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여 꼼꼼히 천을 여며주는 크리스토퍼에게 제라니아는 민망한 듯 말했다.

    “내가 할게.”

    “안 돼. 너한테 맡기면 끝이 안 나거나, 엉성하게 해서 흘러내릴 게 분명해.”

    그는 딱 잘라 거절했다. 제 손재주에 대해 얘기하면 할 말이 없어지는지라 제라니아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건지, 크리스토퍼가 슬그머니 덧붙였다.

    “그나저나 이 드레스, 너한테 잘 어울린다.”

    “그래?”

    “자국이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누가 이랬어?”

    “몰라. 얼굴이 기억 안 나네.”

    제라니아는 태연하게 둘러댔고, 크리스토퍼는 미심쩍은 얼굴을 하면서도 한숨을 쉬는 걸로 그쳤다.

    그때, 연회장 입구에서 소란이 일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방금 전보다 확연히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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