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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6화 (7/171)

제6화. 각오

“아니, 그럴 리가!”

내가 어떻게 널 외면해. 애절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제라니아에게 닿았다. 제라니아가 말했다.

“물론 나도 내 안위를 챙길 거야. 늘 말하지만, 난 조용하고 평화롭게 오래오래 사는 게 꿈이고. 그래도 내가 도울 수 있겠다 싶으면 해봐야지. 모처럼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건데.”

녹색 눈동자가 단단한 보석처럼 굳어졌다. 그 예쁜 눈동자를 크리스토퍼는 말없이 쳐다보았다.

장난스럽게 말하지만 진심이다. 제라니아는 진심을 말할 때 저런 눈을 했다. 크리스토퍼는 허탈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너는 그런 사람이지.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왜 억지로 참고 있는 거야?’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크게 혼난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은 몸집도 작았고 힘을 쓰는 요령도 부족했기에, 건장한 무인이었던 아버지의 눈에 차지 않을 만도 했다.

아버지를 이해하는데도 가슴이 답답했고, 때문에 며칠간 많이 우울했다. 오랜만에 놀러 왔던 제라니아의 눈에도 그게 보였던 걸까.

‘…남자인데도?’

‘남자는 울면 안 되는 거야?’

‘아버지가 그러면 안 된댔어. 늘 자랑스러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러시는걸.’

‘그럼 내 앞에서만 울어! 비밀로 해줄게. 약속이야.’

새끼손가락을 내밀고 약속을 말하던 말간 얼굴이 사랑스러워서, 시야를 가리는 눈물이 원망스러웠다.

꼴사나운 모습일 텐데, 제라니아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품에 끌어안고 도닥였다. 그게 그만 울라기보단, 더 울어도 된다는 뜻으로 보여서 조금 더 울고 말았다.

짧은 회상을 마치고 크리스토퍼는 현재의 제라니아를 쳐다보았다. 너의 그런 다정함을 좋아하지만, 그럼에도 자꾸 못된 생각이 든다.

네가 나한테만 상냥하다면 좋을 텐데. 내 눈에만 예뻐 보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이 먼저 발견했는데, 어째서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만 하는 걸까. 그것도 이런 방식으로.

“…힘들면 꼭 나한테 얘기해.”

그럼에도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뿐이었다. 그는 제라니아를 좋아했지만, 제 짝사랑의 역사가 억울하기도 했지만, 제라니아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 역시 진심이었다.

“응, 그럴게. 너도 왕실에서 근무하니까 가끔 마주칠 수도 있겠다.”

밝게 웃는 제라니아를 보니 자꾸만 속이 울컥 치솟아, 크리스토퍼는 제법 못된 소리를 입에 담았다.

“사실 마음에 안 들어.”

“응?”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보아하니 사랑해서 하는 결혼도 아닌 것 같고….”

불만을 토로하는 크리스토퍼의 얼굴이 어린 시절의 모습과 겹쳐지는 통에, 제라니아는 웃고 말았다.

“괜찮을 거라니까.”

“…그래.”

정말 미덥지 않았지만, 크리스토퍼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 *

“결혼이요?”

듬직한 몸에 제법 잘난 얼굴을 가진, 짧게 자른 흑발의 남자가 입을 떡 벌렸다. 소파에 앉은 채로 프란츠는 고개를 까딱했다. 티레인 보데로아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결혼? 지금 결혼이라고 하셨습니까?”

“왜 그런 반응이지?”

“제 반응이야 지극히 상식적이죠. 아니, 대체 왜 갑자기 결혼 타령을 하시는 겁니까? 왕이 되신 뒤에야 생각하신다면서요?”

지금 이 상황에 결혼을? 네가 정말 제정신이냐는 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는 티레인에게 프란츠는 쐐기를 박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적당한 시기가 있는 법이지.”

티레인이 기가 막힌다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제 가슴을 툭툭 내리쳤다.

“왕궁에 적이 넘쳐나는 이 시기에 말이죠, 그래요. 비전하가 되실 분께서는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결혼하기 싫다고 해서, 잘 설득했어.”

“…합법적인 경로이긴 한 거죠?”

당최 믿을 수가 있어야지. 티레인이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프란츠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뭘 믿고 기어오르나?”

“충신의 진언일 뿐입니다만.”

깨갱 꼬리를 내리면서도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티레인의 옆에 앉아 있던 회색 머리칼의 남자, 이렌스 빈즈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뇌까지 근육으로 되어 있는 것 같은 인간의 말이라지만, 일리는 있습니다. 전하, 정말 괜찮겠습니까.”

“호오. 빈즈, 그게 무슨 말인지?”

“어라, 제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자연스럽게 시치미를 떼는 그를 티레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만.”

프란츠가 시끄럽다는 듯 손을 내젓자 둘은 입을 다물고 동시에 프란츠를 쳐다보았다. 멀끔한 제복 차림으로 프란츠의 뒤에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제롬이 생각했다.

아닌 척하면서 죽 한번 잘 맞는다고.

이렌스가 물었다.

“그래서, 상대는 누구입니까.”

“제라니아 바이첸. 바이첸 공작의 둘째 딸이야.”

티레인이 놀란 얼굴을 했다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바이첸 공작의 딸이라…. 나쁘지는 않은 상대로군요.”

장난기가 가득하던 얼굴은 어느샌가 진지해졌다. 상황을 계산하고 있는지 말이 없어진 티레인과 달리 이렌스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게 한 술 더 떴다.

“오, 역시. 전하가 좋아하지도 않는 차를 마셔가면서, 주마다 시간을 내서 만나러 가셨던 그 공녀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업무는 다 저희한테 떠넘기고 말이죠.”

더없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언뜻 듣기엔 시비를 거는 것처럼도 들렸으나, 그는 순수하게 호기심이 일었을 뿐이었다. 프란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돈은 달라는 대로 주잖나.”

“돈보단 인력이 더 시급합니다. 제가 재정부의 일까지 다 해결하면서 전하를 보필해야겠습니까.”

재정부에서도 괴짜라고 불리는 남자가 투덜거렸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으나 그는 관리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 인사였다.

주로 그 괴물 같은 일처리 능력과 그에 비례하는 신랄한 성격으로 말이다. 국왕의 앞에서 진언하는 대담함부터가 이미 난놈이었다. 프란츠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미 몇 번은 위기를 겪었을 것이다.

재정장관은 제발 그에게 사고치지 말라고 하면서도 그를 해고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도 유능했다.

“아무튼 참 의외로운 말씀 아닙니까. 이 시기에 결혼이라니.”

“감당 못 할 정도는 아닐 텐데.”

“굳이 감당할 필요도 없는 일이기도 하죠.”

주군에게조차 가차 없이 냉정하게 말하는 점이 참으로 공평했다. 딱히 상대의 감정에 연연하는 성격은 아닌데다, 확실한 결과를 원하는 프란츠와는 죽이 잘 맞는다고 해도 좋았지만.

“바이첸 공작이 혼담을 받아들였다는 것도 의외긴 합니다. 그 능구렁이 같은 양반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네 명의 공작들 중에서도 제일 속내를 읽기 어려운 상대였다. 자신을 애송이 취급 하던 그의 여유로운 작태를 떠올리는 이렌스의 미간에 줄이 그어졌다.

“대화를 해보니, 어떻게 자기 딸한테서 결혼이 하고 싶다는 말이 나오게 했는지를 더 궁금해하긴 하더군.”

“하긴, 공작의 딸 중 가장 소문이 적은 편이긴 하죠.”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화려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다른 자매들과 달리 굉장히 평범한 축에 속한다고 했다.

대체 그런 여자의 어디가 이 목석같은 왕세자의 마음을 끈 걸까. 문득 떠오른 생각을 이렌스는 그대로 입에 담았다.

“혹시, 그분을 사랑하기라도 하시는 겁니까.”

“사랑? 내가 말인가?”

프란츠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해가 되지 않는 행보였다. 프란츠가 픽 비웃음을 흘렸다.

“웃기지도 않는 소릴 하는군. 말했을 텐데.”

늘 푸르던 눈동자가 새파랗게 짙어졌다. 프란츠가 저런 눈을 할 때는 오로지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제 어머니, 아그네스를 떠올리고 있으리라.

강인하고 다정했던 여인. 왕을 사랑했으나 결국 끝이 좋지 않았던 전 왕비. 인간적인 감정과는 인연이 없는 저 남자가 그토록 집착하는 유일한 존재.

“사랑은 인간을 연약하게 만들지. 그러니, 나는 사랑 같은 건 하지 않아.”

무감하게 말하는 왕세자를 보며 티레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게 전하 마음대로 되는 건 줄 아십니까?

사랑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거였다면 이 세상에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대체 왜 있단 말인가.

하나 그렇게 진언하기엔 왕세자가 너무 무서웠던 만큼 티레인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주 사람 홀릴 것처럼 생긴 것과 다르게, 잔혹하기 짝이 없는 왕세자의 성정은 측근인 그들도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그나마 입이 살아 있는 이렌스가 말했다.

“예, 뭐…. 아니시라면야 제가 더 할 말은 없습니다만, 비전하가 전하의 그런 성격을 알고 계시긴 합니까?”

“대충은. 일단 합의할 건 전부 끝냈어. 곧바로 계약서부터 제시하는 게 보통은 아니더군.”

“적어도 맹탕은 아닌 모양이네요. 하긴 그랬으면 전하가 눈독을 들였을 리도 없겠고요.”

“그래. 그리고 사랑은 못 하더라도, 난 아버지처럼 내 사람을 방치하는 쓰레기가 될 생각은 없어.”

“그래요. 기왕 결혼하시는 거, 서로 잘 지내시는 게 낫겠죠.”

그게 과연 전하의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재미있다는 듯 대꾸하는 이렌스를 티레인과 제롬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도대체 저 인간은 이중 제일 연약한 주제에 뭐 저리 입이 살아 있는 걸까.

눈앞의 왕자는 무척 차분하지만, 그 차분한 얼굴로 상대를 도륙 내는 인종이었다. 그런 면모는 참 아버지인 국왕과 비슷했다. 이걸 입에 담았다간 진짜 칼부림이 날 것 같아서 말을 못 할 뿐이지.

프란츠가 물끄러미 이렌스를 쳐다보았다. 압박감을 주는 시선에도 이렌스는 꿋꿋이 그와 눈을 마주했다. 곧 흥미가 떨어졌는지 프란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결혼식 준비로 바빠질 테니, 준비나 해두도록 해.”

“그 전에 제대로 소개는 시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맞습니다. 앞으로 저희가 전하를 대하듯이 보필해야 하는 분이지 않습니까. 결혼식 전에 미리 얼굴 알아둬서 나쁠 건 없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각기 다른 성격의 셋이 지금만큼은 말이 일치했다. 아마 생각하는 바도 비슷할 것이다.

궁금했다. 대체 저 인간이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결혼을 주장하게 만든 상대가 누군지.

프란츠가 말했다.

“조만간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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