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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5화 (6/171)
  • 제5화. 소꿉친구 크리스토퍼 (2)

    태연한 얼굴이었지만 제라니아는 속으로 당황했다. 그와 오랜 친우로 지냈다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렇잖아. 나도 널 마음에 들어 하고, 우리 성격도 잘 맞는 거 맞고, 잘생겼다며. 네가 그런 이유로 결혼을 한다면야, 겨우 몇 번 만난 사람보단 오래 알고 지낸 쪽이 더 낫지 않겠어?”

    “어….”

    그렇게 나온다면 할 말은 없었다. 크리스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하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말이지.

    “이미 집안끼리 혼담이 오갔는걸. 내일이면 왕실에서 결혼을 발표할 거야.”

    “…….”

    크리스토퍼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황망한 얼굴을 한 그가 제라니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왠지 모르게 간절하다 싶은 크리스토퍼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제라니아는 깨달았다.

    아, 이건 위험하다.

    “한 가지만 물어도 될까.”

    “으응.”

    “왕세자 전하랑 혼담이 결정되기 전에, 내가 결혼하자고 했으면 나랑 결혼했을 거야?”

    제라니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크리스의 성격을 아는데, 빈말로라도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크리스토퍼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단정한 얼굴이 허망하게 일그러졌다.

    “것 봐.”

    “…….”

    “넌 그런 소리 못 해. 그렇게 오래 봐온 나와도 결혼에 대해 쉽게 대답하지 못하잖아. 그러니 왕세자 전하에 관해 말한 건 전부 헛소리겠고. 하지만 뭔가 이유는 있겠지. 말할 수 없는 거야?”

    머뭇거리던 제라니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말하지 못할 건 없는데.”

    “협박당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런 건 절대 아니야.”

    “그럼 그냥 말하지 마. 뭘 듣든 울화통이 터질 것 같으니까.”

    그가 비어 있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한숨을 내뱉는 크리스토퍼의 얼굴이 자못 우울해 보여서 제라니아는 눈치를 보았다.

    “그렇게 싫어?”

    혹시 그 왕자님한테 이상한 소문이라도 붙어 있는 건가. 크리스를 걱정시킬 만큼?

    청혼을 받았을 때는 황당하긴 했지만 그건 곤란하다는 감정이었지, 불쾌하다거나 싸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계약이라지만 어쨌거나 선뜻 결혼을 받아들인 건데, 생각해보니 자신은 사교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자신이 모르는 뒷사정이 있는 걸까.

    크리스를 지그시 바라보자 그가 곧 대답했다.

    “그런 게 아니야. 그저….”

    너무 억울해서 미쳐버릴 것 같을 뿐이지.

    튀어나가려는 말허리를 툭 잘라 다시 제 안으로 쑤셔 넣으며 크리스토퍼는 애매하게 웃어보였다.

    “널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어, 제리.”

    크리스토퍼가 애써 밝게 말했다. 우수를 담아낸 것 같은 푸른빛 눈동자가 제라니아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하는데?”

    “일단 예정은 두 달 뒤야.”

    “…그렇게 빨리?”

    귀족만도 결혼 준비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석 달은 걸린다. 왕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으니 크리스토퍼가 놀라는 건 당연했다. 제라니아도 처음 들었을 땐 귀를 의심했다.

    “결혼 발표를 하고 나면, 바빠지겠네.”

    “그런가? 하긴 준비할 게 많아 보이기는 하더라.”

    자매들 중에는 아직 결혼한 이가 없지만, 적령기를 지난 만큼 제라니아는 이미 결혼한 친구들을 몇 두고 있었다.

    “결혼식에 올 거야?”

    “…가야지.”

    어떻게 안 가. 그렇게 덧붙이며 크리스토퍼는 저도 모르게 제라니아의 손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픈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는 제라니아를 본 그가 황급히 손을 놓았다.

    “미안해.”

    “괜찮아. 그나저나 너 정말 힘이 세졌다. 어릴 때는 나보다도 작고 귀여웠는데.”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제라니아는 자신이 인형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눈을 의심했다.

    도자기를 연상시키는 하얀 피부에 까만 머리카락, 어떻게 이목구비가 저기 다 들어갈까 싶은 작은 얼굴도 그렇지만 눈이 특히 예뻤다. 제 아버지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있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는 경계하는 기색이 가득했었다.

    그때는 아직 휴스타인과 바이첸 사이를 둘러싼 복잡한 정치 관계를 모를 나이였기에, 제라니아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갑내기 친구를 사귀는 건 처음이라 제법 들떠 있기도 했었다.

    “그렇게 보인다니 노력한 보람이 있네.”

    크리스토퍼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제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눈을 빛내는 제라니아와 시선을 맞추고, 그는 매끄럽게 입을 놀렸다.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거든.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지.”

    “그런 사람이 있었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제라니아를 보며 크리스토퍼는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예상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머리가 좋은 것과 별개로, 타인이 자신에게 보내는 호감에 대해서만은 유독 관심이 없는 너라서.

    그렇기 때문에 안심했고, 그렇기 때문에 충격적이었다. 네가 결혼을 한다는 사실이.

    “그렇구나….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겠네.”

    제라니아의 말에 크리스토퍼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그게 너라고 말하면, 넌 과연 어떻게 나올까. 기대하지 않기로 했음에도 너의 무지한 다정함은 여과 없이 심장을 파고든다.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으니 신기하지.

    “그러고 보니, 넌 나 처음 봤을 때 어땠어?”

    “나? 글쎄.”

    곰곰이 생각하던 크리스토퍼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궁금한 기색이 역력한 제라니아에게 그가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

    “당연하지.”

    “다람쥐 같다고 생각했어.”

    “뭐?”

    제게 선뜻 손을 내밀던 연갈색 머리칼의 여자아이. 밝고 명랑하다기보단 연약하고 투명한 느낌이 물씬 났다. 갓 이슬비가 내린 아침의 풍경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웃는 얼굴은 달랐다. 제라니아가 해사하게 웃던 순간을 그는 아마 잊지 못할 것이다. 투명하다고 느꼈던 얼굴에 웃음이 깃들자, 불을 켜는 것처럼 인상이 확 밝아졌다. 발랄하게 말을 거는 아이에게서 햇살의 냄새가 났다.

    머뭇거리다 손을 잡자, 아이는 망설이지 않고 제 손을 잡아끌었다. 앞장서서 도도도 걸어가는 그 뒤통수가 마치 좋은 걸 주워서 신난 작은 동물을 떠올리게 했다.

    왜 갑자기 날 끌고 간 거냐고 나중에 물어보니, 내 얼굴을 보니 그 자리가 너무 불편해 보였단다. 그래서 빨리 다른 곳에 가서 같이 놀고 싶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땐 사실 좀 놀랐다.

    보기와 달리, 눈치가 굉장히 빠르구나 싶어서.

    “딱 봐도 다람쥐를 닮았잖아.”

    “내가 어딜 봐서.”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반박하는 제라니아에게 크리스토퍼는 장난스레 고개를 저었다.

    “원래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법이야, 제리.”

    “…그런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중하기로 유명한 소꿉친구가 하는 말이라 그런지 제라니아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시선을 내리깔고 고민에 빠진 듯한 모습이 귀여워서, 크리스토퍼는 조용히 웃었다.

    “왜, 다람쥐 귀엽지 않아?”

    “작으면 만만해 보이잖아. 최근 봤던 맞선 상대도 좀 그런 태도였고 말이야.”

    “아, 그 개자식.”

    크리스토퍼가 싸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에게 결투를 신청하러 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이었다.

    제라니아는 조용히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새 찻잔에 차를 더 따라주었다. 마시고 진정하라는 사인에 크리스토퍼는 표정을 풀고 찻잔을 손에 쥐었다. 워낙 손이 커서 그런지 찻잔이 유독 아기자기해 보였다.

    “대체 공작 각하께선 어쩌다 그런 인간을 맞선 상대로 데려오신 거야?”

    “결과적으로 파투가 났으니 됐지, 뭐.”

    차를 한 모금 꿀꺽 삼킨 크리스토퍼가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결과적으로라니, 그렇게만 넘어갈 일은 아니잖아. 넌 늘 그래. 충분히 화낼 만한 상황인데 너무 무른 거 아니야?”

    “아버지가 더 밀어붙였으면 화를 냈겠지. 하지만 바로 수긍하셨는걸. 굳이 화를 내지 않아도 된다면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해.”

    가능하다면 둥글게 둥글게, 제라니아가 가지고 있는 신조 중 하나였다. 그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 크리스토퍼는 진심을 꺼냈다.

    “누가 널 만만하게 보는 게 싫어. 그게 공작 각하라도.”

    그 뒤에 왕세자 전하, 가 포함되어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낀 제라니아의 머릿속이 바삐 굴러갔다. 생각해보니 걸리는 점들이 상당했다.

    전하가 나한테 청혼을 한 이유가 사실 내가 왕비로 삼아도 될 만큼 유능해 보여서 그랬대! 여차하면 가문이랑 등 돌릴 각오도 하래!

    …역시 계약 내용은 일단 숨기는 게 낫겠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많은 오해가 생길 것 같았다.

    “날 그렇게 대할 분은 아닌 것 같았어.”

    좀 많이 무뚝뚝하긴 하지만, 자신에게 필요 이상으로 간섭할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약간의 변호를 섞어 말했음에도 크리스토퍼의 얼굴에서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말 괜찮겠어? 무려 왕실이야. 너도 알잖아.”

    “예의범절은 배울 만큼 배웠는데 뭐.”

    “그게 아니라….”

    “알아. 버틸 수 있겠냐는 거지?”

    머뭇거리던 크리스토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유독 왕궁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왕궁 이야기를 밖에서 쉬이 떠들어봐야 도움이 될 게 뭐가 있겠냐마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어떻게든 되겠지.”

    호기롭게 말하는 제라니아에게 크리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제리, 약속해줘. 결혼한 뒤에, 왕궁에서 무슨 일을 겪든지 간에 네 안위를 우선적으로 챙기겠다고.”

    “뭐?”

    뜬금없는 말에 제라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크리스토퍼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난 널 잘 알아. 너는 사람에게 다정하지. 부조리한 일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성격도 아니야. 그러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힘들지도 몰라.”

    공작의 딸로 태어났지만 제라니아는 태생적으로 욕심이 없는 편이었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만큼 남의 고통을 쉬이 외면하지도 못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참견이 많은 편이라고 해도 되었다.

    “하지만, 보이는 걸 외면할 수도 없잖아.”

    태연하다 싶을 정도로 침착한 제라니아의 얼굴을 보니 불안함이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그 부피를 키웠다. 다시 한번 못 박으려는 크리스토퍼에게 제라니아가 덧붙였다.

    “그럼 내가 위험에 처하면 너는 외면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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