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4화 (5/171)

제4화. 소꿉친구 크리스토퍼 (1)

자기가 말하고도 어색한지 프란츠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예를 들어 그렇다는 겁니다.”

“그, 그렇군요.”

“…그래서, 내 이름은 부르지 않을 생각입니까?”

안력이 실재한다면 지금 자신은 찌부러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시선에 제라니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이런 게 긴장되는지 모르겠다. 심호흡을 한 뒤, 느리게 말을 뱉어냈다.

“프, 프란츠?”

비록 조금 더듬기는 했지만.

“네, 제라니아.”

프란츠의 입가에 미소가 만연했다. 이제까지 중 가장 만족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왜? 솟아난 의문을 도로 마음 한구석에 끼워 넣으며 제라니아는 제 몫의 계약서를 챙겼다.

부드러워 보이는 연갈색 머리카락, 녹음을 떠올리게 하는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는 사교계가 원하는 화려한 미인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온화하고 다정하며, 가녀려 보이는 여인이다.

제 아무리 심지가 굳다 하나, 정말 왕궁의 생활을 견뎌낼 수 있을까. 그러리라 믿었기에 결혼을 제안한 건데 묘한 찜찜함이 몰려들었다. 프란츠는 속으로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실소했다.

이제 와서 계약을 무르자고 할 것도 아니면서.

“당신이 뭘 생각하든, 아마 그 이상으로 귀찮을 겁니다.”

귀찮다는 말에 왜 이렇게 많은 의미가 내포된 것 같지. 제라니아는 장난기를 담아 말했다.

“저 지금 계약 취소해도 돼요?”

아주 조금, 진심이 섞인 건 사실이지만.

“안 됩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그럼 그렇지 싶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한 다음에야 말해준 걸 보면, 아무리 봐도 노린 게 분명했다.

이제 더 이상 용건은 없는지 프란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웅하기 위해 그를 따라 일어서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죠.”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라니아가 살며시 손을 맞잡았다.

마디마디가 굵고 단단한 손은 굳은살이 거의 없었으나, 무척 크고 따뜻했다. 참 의외인 구석이 많은 상대라 생각하며 제라니아는 손을 잡고 악수하듯 가볍게 흔들었다.

작고 보드라운 손이 제 손아귀에 오롯이 잡히는 것에 프란츠는 생경한 기분을 느꼈다. 제라니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계약이 체결되었다.

* * *

한참 자신을 붙들고 질문을 퍼붓던 두 사람이 사라진 뒤에야 제라니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둘이 사라지자 문으로 나이가 지긋한 여인이 들어왔다.

유모인 샬럿이었다.

찻주전자와 찻잔이 들린 접시를 들고 사뿐히 걸어온 샬럿이 제라니아에게 차를 권했다. 목이 말랐는지라 제라니아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샬럿은 호호 웃으며 차를 내려놓았다.

말없이 따라주는 차를 음미하는 제라니아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샬럿의 눈빛이 다 큰 자식을 보는 것처럼 훈훈해졌다.

“정말, 제라니아 님이 결혼이라니…. 아직도 믿기지 않는군요.”

그것도 이렇게 빨리. 샬럿이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농담처럼 말하지만 뼈가 있는 대답에 제라니아는 말없이 웃었다.

그러게, 나도 몰랐는데.

프란츠와 그런 대화를 나눈 지도 어느새 일주일이 넘어갔다.

결혼식은 두 달 뒤에 올리기로 했고, 내일쯤 공표하기로 말을 맞춘 상태였다. 무슨 결혼을 그렇게 빨리 하냐며 놀라는 그에게 프란츠는 이미 전부터 조금씩 준비하고는 있었다 대답했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빨리? 이야기를 듣자마자 제라니아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계획적이시네요.’

애써 순화했지만 ‘계략’이라는 단어가 제라니아의 뇌리에 둥둥 떠다녔다. 휘휘 손을 내저어 생각을 덜어냈다.

‘싫습니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싫은가?

‘그렇지는 않아요.’

신붓감을 구하고 계셨던 거라면, 결혼식 정도야 이미 준비하고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끝까지 거절했으면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찾으셨겠지. 설마 자신 하나만을 위해 그 많은 걸 준비했을 리는 없으니까. 과민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래, 어차피 계약서도 다 썼겠다! 별문제 없겠지.

그럴 거라고 재차 다짐하는 제라니아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샬럿이 입가를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참, 상심할 분이 한둘이 아니겠네요.”

“무슨 소리야? 날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당장 옆에도 한 분 계시지 않나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 문가에 로사가 나타났다. 정중하게 말하려 애쓰지만 숨길 수 없는 발랄함이 목소리에 묻어났다.

“제라니아 님, 크리스토퍼 님이 오셨는데요.”

“크리스가 왔다고?”

찻잔을 내려놓은 뒤 제라니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 응접실로 가자, 태양을 본뜬 무늬가 그려진 새하얀 제복을 입은 흑발의 미남자가 손을 흔들어 그를 맞이했다.

“제리! 오랜만이야.”

애칭으로 부르는 목소리가 무척 다정했다. 언제 들어도 듣기 좋은 음성이라 생각하며 제라니아는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하녀들이 곧 차와 쿠키를 가져왔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제라니아가 대답했다.

“임무는 잘 다녀왔어?”

왕실 기사단 소속이 된 후로 크리스토퍼는 늘 바빴다. 요 근래는 왕실에서 시찰을 나갈 일이 있었는지라 그에 동행했다 들었다. 제 몫의 찻잔을 들고 있던 크리스토퍼가 미소를 지었다.

“늘 하던 대로지 뭐.”

“제복을 입고 왔길래, 급한 일이라도 있었나 싶었는데.”

“그런 건 아니고, 네 얼굴 보고 싶어서 빨리 왔지.”

청량한 웃음소리와 함께 크리스토퍼의 눈꼬리가 반달처럼 접혔다. 차를 마시는 손짓 역시 더없이 우아했다. 덩치가 큰데도 움직임이 전혀 둔해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저택이 평소보다 어수선하더라. 무슨 일 있어?”

평소와 별다를 게 없는 방문이었는데도 묘하게 자신을 대하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수군거리는 거야 익숙하다 치더라도, 속닥거리는 이들의 입에서 제라니아의 이름을 들은 것도 같았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도 정작 제라니아의 얼굴은 태연했다.

“응? 아마 그건….”

제라니아는 고민했다. 내일까지는 함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상대가 크리스인데 뭐 어떠랴 싶었다. 힐끔 닫혀 있는 문을 본 제라니아가 작게 속삭였다.

“비밀로 해줄 거지? 어차피 내일이면 알게 될 거긴 한데.”

“네 부탁이라면야 얼마든지.”

“그게, 나 결혼해.”

순간 크리스토퍼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손가락을 벗어난 찻잔이 카펫 위로 떨어져 데구루루 굴렀다. 푹신한 만큼 찻잔이 깨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발등 위로 쏟아진 찻물이 붉은 카펫 위로 스며들었다.

제라니아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등에 차를 엎질렀는데도 멍한 얼굴을 한 크리스토퍼에게 다가간 제라니아가 급히 신발을 벗기자 살짝 붉어진 발등이 보였다.

“괜찮아, 크리스?”

“아, 잠깐 손이 미끄러져서.”

아무것도, 아니야. 끊어 말하는 크리스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일단 제라니아는 사람을 불러 찬 수건을 가져오게 했다. 크리스는 거듭 괜찮다고 했으나, 제라니아의 성화에 결국 신발을 벗고 차가운 수건을 발 위에 얹어두었다.

다시 둘만 남게 되자 소파로 돌아가려는 제라니아의 손목을 커다란 손이 붙들었다. 의아함에 돌아보는 제라니아를 크리스토퍼가 앉은 자세 그대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방금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뭐라고?”

늘 잔잔하던 크리스토퍼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쯤 되니 조금 이상하다 싶어, 제라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세자 전하랑 결혼하기로 했어.”

착실하게 대답을 내놓자 크리스토퍼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제라니아를 쳐다보았다. 마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그가 조용히 경악했다.

“…너 분명, 결혼엔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

“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계약 내용까지 말할 수는 없어 가볍게 얼버무렸다. 크리스토퍼는 심각한 얼굴로 질문했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야?”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

무난한 대답이었으나 크리스토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인데?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잖아. 무엇보다 제리, 넌 그런 거 싫어하잖아. 권력다툼이니 뭐니, 그런 건 골치 아파서라도 피하겠다고 하지 않았어?”

제라니아는 할 말이 없었다. 16년 지기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크리스는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얘기하자니 혼날 것 같았다. 크리스가 실제로 자신을 혼낸 적은 없었다지만, 분위기가 그랬다.

그렇다고 해도 크리스가 오늘따라 묘하게 집요하긴 했다. 저런 눈을 한 크리스는 만족할 만한 대답이 나오기 전까지 물러나지 않았다.

일단 그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관념이 확고했다. 휴스타인 공작가의 맏아들인 그가 아직까지도 들어오는 혼담을 거절하고 있는 건, 연애결혼을 하겠다는 더없이 로맨틱한 이유에서였다.

그냥 정략결혼이라고 하기엔, 자신 말고도 다른 자매들이 아직 미혼이었다. 게다가 제가 정략결혼을 순순히 받아들일 성격은 아니지 않은가. 자신은 제 의사 없이 결혼하라는 말을 듣는 순간, 조용히 짐과 보석을 싸들고 집을 나갈 성격이었다.

이걸 어떻게 얼버무리지? 싶어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제라니아의 머릿속에 묘안이 떠올랐다. 진짜 묘안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제라니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얼굴!”

“얼굴?”

“전하가 날 워낙 마음에 들어 해주셨거든. 대화를 나눠보니까 성격도 그럭저럭 맞는 것 같고, 무엇보다 잘생기셨잖아. 보고 있으면 즐겁달까. 그 정도에서 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나도 이제 결혼 적령기가 되었고, 괜찮은 상대를 만나기도 어려우니까…. 말끝을 흐리면서도 답지 않게 시선을 피하는 제라니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크리스토퍼가 입을 열었다.

“얼굴이라면…. 나도 딱히 부족하단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제 자랑에 제라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바로 긍정했다.

“너도 무척 잘생겼지.”

굳이 말을 할 일이 없었을 뿐, 실제로 제라니아는 친하게 지내는 사람 중 크리스만큼 잘생긴 상대를 본 적이 없었다.

밤을 풀어놓은 것처럼 거칠지만 새까만 머리카락과 맑고 투명한 눈동자, 기사로 오래 단련한 만큼 몸도 무척 좋았다. 워낙 몸이 단단하다 보니, 어릴 때와 달리 자신을 와락 포옹할 때면 슬슬 숨이 좀 막히기도 했다.

검술 실력이야 말해 무엇 하랴. 차기 기사단장이라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올 정도였고, 휴스타인 공작가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성격도 이만하면 괜찮지 않나. 워낙 기사단 일로 바쁘고, 친한 사람 아니면 낯을 좀 가린다지만 성실하고 다정하고, 자기 사람한테 잘한다. 당장 나한테 하는 걸 보면 분명 자기 아내한테도 잘할 텐데.

크리스와 같이 파티에 참석하면 여자들이 너도나도 크리스한테 춤을 신청하러 온다. 그러니 인기 역시 많은 게 확실했다.

사실 제라니아는 그가 아직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게 더 놀라웠다. 얼굴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동화책에 나오는 기사님처럼 세기의 로맨스를 찍을 것 같았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객관적으로 잘생긴 얼굴이지. 예술품을 감상하듯 크리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제라니아에게 크리스토퍼가 가벼운 어투로 대응했다.

“그럼, 그냥 나랑 결혼할 수도 있지 않아?”

그 말과 함께 제 팔을 붙든 손의 힘이 좀 더 강해졌다. 아프지는 않을 정도라지만, 쉽게 빼낼 수 없는 정도인 게 꼭 올가미에 걸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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