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3화 (4/171)

제3화. 결혼 계약 (3)

계약서 얘기를 꺼낼 때 혹시 무례하다는 소리를 들을까 걱정했지만, 왕자님은 정말로 모든 것에 선선했다.

오히려 한 술 더 뜨기까지 했다.

“제가 공녀에게 반한 걸로 하는 게 낫겠죠.”

“네? 왜 굳이?”

“그게 왕실에 적응하기는 한층 쉬울 테니까요.”

사랑 없는 정략결혼보다야, 왕세자가 총애하는 걸로 보이는 게 물론 낫기야 할 것이다. 당장 왕궁만 봐도 왕의 총애가 곧 권력이 되지 않던가.

정치적인 결합으로 보이는 건 피할 수 없겠지만, 겉으로나마 사랑으로 얽히는 게 나았다.

왕궁에서 여인의 권력이란 권력자의 총애에 기반한다. 공작의 직계라는 배경을 제외하고 아무 기반도 없는 자신에게 왕세자의 총애는 기본적인 보호막이 되어줄 터였다.

여전히 자신이 대관절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가급적 평화로운 생활을 보내고 싶었던 제라니아는 냉큼 동의했다.

물론 사랑이라는 개념에 둔한 두 사람은, 오히려 그런 모습이 외부를 자극할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고 있지 못했다.

프란츠는 밖에서 최대한 다정하게 굴 것을 약조했고, 제라니아는 조용히 수긍했다. 냉랭한 것보단 당연히 다정한 게 나았다.

“가만, 그럼 둘만 있을 때는요?”

“그때도 다정하면 됩니까?”

뭐든 해줄 것처럼 진지하게 묻는 수려한 얼굴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그냥 보면 웃는 법을 모르는 게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냉랭한 얼굴이었다.

위압감이 드는 눈동자에도 제라니아는 겁먹지 않았다.

“혹시 왕자님, 그게 원래 성격이에요?”

“원래 성격?”

“아버님이 왕자님에 대해 말씀하신 거랑 좀 다르다 싶어서요. 능글맞고 재치 있고, 늘 웃고 있는데 방심할 수 없다고 하던데. 빈틈없다는 점만 똑같네요.”

가만히 투덜거리자 왕자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와, 지금 웃은 거야?

살며시 위로 휘어지는 입꼬리와 더불어, 아주 약간 누그러지는 눈매가 잔상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홀린 듯이 그 얼굴을 쳐다보던 제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비빌 뻔했다.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아까 전 구애한다고 했을 때 웃던 얼굴보다도 훨씬 인상에 남는 얼굴이었다. 마치 조각상에 감정이 깃든 것 같았다.

왜 이런 표현을 쓰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웃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한 채, 프란츠는 제라니아를 지그시 관찰했다. 초식동물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과 달리 배짱이 상당한 걸 보면, 역시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은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좀 편해지긴 한 모양입니다. 말이 전보다 거침없군요.”

머쓱해질 만도 하건만 제라니아는 뻔뻔하게 대꾸했다.

“결혼까지 하기로 한 마당에 뭘 따지겠어요. 이런 제 태도가 싫으시다면, 지금이라도 파혼하셔도 괜찮아요.”

“아니, 나쁘지 않습니다.”

자신을 어려워하는 것보다는 편해하는 게 나았다. 제라니아의 말대로 평생 같이 지내야 한다면, 한쪽만이 편해서는 안 됐다.

그는 그런 관계가 초래하는 비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 서로 간에 예의만 차린다면 저는 지금의 왕자님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좀, 피곤하잖아요.”

그렇지만 지금의 말은 꽤 의외로웠다.

“그리 살가운 성격이라 생각하진 않는데, 괜찮겠습니까.”

대답하기 전 제라니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확실히 무뚝뚝하기는 했다. 말수도 별로 없었고.

그렇지만 제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어준다. 계약 내용 역시 자신이 제안하는 것들을 듣고 추가하고 싶거나 곤란한 것들을 제시했다.

아, 그래. 합리적. 합리적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그렇지만, 저한테 평생 성격을 숨기시려는 게 아니었다면…. 이미 저랑 처음 만났던 날부터, 입 안의 꿀처럼 더없이 다정하게 구셨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제법 장난스럽게 말한 제라니아와 다르게 프란츠의 얼굴은 살짝 경직되었다. 굳었다기보다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네?”

“…아닙니다.”

왜 말을 하다 마시지? 말끝을 흐리며 슬쩍 시선을 피하는 얼굴이 답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제라니아는 그러려니 넘겼다.

합의가 마무리되자, 두 사람 앞에는 계약서 두 장이 남았다. 프란츠 바로 옆에 제 이름을 적으며 제라니아는 계약서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결혼 계약서

위 두 사람은 결혼을 함에 있어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한다.

1. 부부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매사에 존대한다.

2.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한다.

3. 부득이한 경우가 아닌 이상 계약에 대한 것은 비밀로 한다. 이는 계약이 누설될 염려가 없거나, 양 당사자의 생명의 위협과 직결되는 경우를 보통으로 한다.

(중략)

9. 자식의 경우, 최소 두 명 이상 낳을 것을 기본으로 하되 왕자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의무를 다한 것으로 한다.

10. 프란츠 리베라-리나엔은 제라니아 바이첸이 아래에 적은 소원을 반드시 들어주어야 한다.

이는 거절할 수 없으며 왕실의 이름으로 이행된다. 단, 시기는 프란츠 리베라-리나엔이 국왕이 된 이후로 지정한다.]

마지막 문단 바로 아래에 적혀 있는 소원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프란츠가 차분하게 말했다. 꽤 떨떠름한 목소리였다.

“정말 이거면 되겠습니까?”

“네.”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로 가득 찬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거렸다. 지금까지 중 가장 생기가 넘치는 얼굴에서는 화사함이 가득했다.

눈앞의 공녀가 평범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를 프란츠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번 보지 않은 자신조차, 이렇게도 눈이 가는데.

“더 대단한 걸 바랄 줄 알았는데.”

“충분히 대단한 일이잖아요.”

“자기 자신을 위해 소원을 빌 줄 알았다는 겁니다.”

“충분히 절 위한 소원이에요. 평생의 꿈이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지는 것뿐이죠.”

제라니아가 적은 소원은 간결했다.

[교육 체제의 개편. 단, 위와 관련된 모든 사항은 전적으로 제라니아 바이첸에게 위임된다.]

간결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소원이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예고라도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간단해요.”

싱긋 웃으며 제라니아는 생각하고 있는 바를 털어놓았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은 교육 시설을 아주 많이 만들고 싶어요. 가난한 사람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요.”

“포부가 엄청나다면 엄청나군요. 하긴 만만치는 않아 보입니다만.”

교육 시설이라 부를 수 있는 건 아카데미나 대학 정도였으나, 왕국에 있는 아카데미는 채 열 개를 넘지 않았다.

그마저도 귀족이나 아주 부유한 평민들을 제외하면 입학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수요가 많지도 않았다. 귀족들에게 교육이란 가정교사를 붙이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대학은 또 어떻겠는가. 왕국에서 대학이라 부를 수 있는 건, 신전이 운영하는 신학대와 종합대학 두 곳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교육 기간이 긴 데다 등록금이 비싸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한 판도를 뒤집겠다는 당찬 포부에 프란츠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것처럼 턱을 만지작거렸다.

“가난한 이들에게도 교육을 받게 한다라….”

“귀족 중에만 똑똑한 이들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사람이 많을수록 인재를 발굴할 가능성도 높고요.”

말하면서도 제라니아는 힐끗 눈치를 봤다. 그동안의 교육은 귀족들의 전유물이나 다름없는 분야였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평민들을 태생부터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라 여겼다. 제가 하는 말이 파격적인 이야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헛소리라 치부하면 어떡하지?

“과연, 그럴듯하군요.”

타박을 들을 것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제라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납득하시는 건가요?”

“이전과는 다른 나라를 만들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과 같은 방식만을 고려해서는 안 되겠지요.”

나른한 목소리로 답하며 프란츠는 제 손에 들려 있는 계약서를 무심히 훑었다.

날이 완전히 저물었는지 창문 너머는 이미 캄캄해졌다. 보랏빛이 섞인 어둠이 유리창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빛이 나는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계약서의 항목을 다시금 읽어보던 제라니아가 불쑥 말했다.

“전 사실 왕자님이 1번이나 2번을 먼저 제의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고 했던 부분을 그가 먼저 짚을 줄이야. 의외라는 듯 묻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짧게 대꾸했다.

아까 전보다 온도가 한 단계 낮아진 목소리였다.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그 말과 함께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하기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캐낼 생각은 없었는지라 제라니아는 대답 대신 끈을 내밀었다. 프란츠가 끈으로 계약서를 돌돌 말아 두루마리 형태로 묶었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뭔가가 있는지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잘 합의해놓고 왜 저러시지? 멀뚱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제라니아에게 프란츠가 조용히 질문했다.

“계약서에 적은 건 아니지만…. 한 가지 더 합의해도 괜찮겠습니까.”

“무엇을요?”

역시 제 몫의 계약서를 소중히 집어 든 제라니아가 말했다. 프란츠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름.”

“네?”

“언제까지 왕자님이라고 부를 겁니까?”

호칭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잘생긴 미간에 금이 그어진 걸 보면. 하지만 제라니아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는 왕자님이야말로 절 공녀라고 부르시잖아요.”

“저는 이름은 붙여서 불렀지 않습니까.”

그랬나? 기억을 더듬어보니 확실히 그는 당신, 그대 같은 호칭이 아닌 이상 대부분 꼬박꼬박 제 이름을 불렀다.

…그게 뭐라고 이렇게 낯간지러운 기분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왕궁에 왕자는 많습니다. 지긋지긋하게.”

지긋지긋을 강조하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그대가 나보다 한 살이 많은 걸로 아는데, 맞습니까.”

“그…렇겠죠?”

상대의 나이를 이제야 알았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좀 놀랍기는 했다. 딱히 나이가 들어 보인다든가 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만 보면 자신보다 한창 연상일 것 같았는데.

“그러면, 제가 편히 부르는 게 껄끄러울 수도 있겠군요.”

“어, 아니요.”

이름 정도가 뭐 그리 어렵다고 그럴까. 손사래를 쳤음에도 프란츠의 얼굴은 심각했다. 이상할 정도로 격식에 집착하는 남자라 생각하면서도 제라니아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서로 이름으로 부르도록 하죠.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격식대로 하되,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름을 부르는 걸로.”

“네, 그럼….”

제라니아가 호기롭게 입을 열었다.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말이 되어 나오는 건 없었다.

이름이 뭐라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부르려니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제라니아를 프란츠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응시했다.

자신에게 계약을 이야기할 때도 태연하더니, 지금은 마치 난제를 맞이한 것처럼 끙끙댄다.

“제라니아.”

“네?”

화들짝 놀라는 제라니아를 보며 프란츠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표정입니까.”

“무슨 표정이요?”

“제가 당신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구는군요.”

“잡아먹어요?”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이 말하던 제라니아가 한 박자 늦게 뜻을 눈치채고 얼굴을 화악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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