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2화 (3/171)
  • 제2화. 결혼 계약 (2)

    생각지도 못한 주제였다. 제라니아는 멍하게 생각했다. 그렇지, 결혼하면 아무래도 그렇겠지? 결혼을 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모든 것이 당황스러웠다.

    “참고로 말해두지만, 나는 정비가 아닌 다른 이에게서 아이를 볼 생각이 없습니다. 상당히 지긋지긋해서 말이죠.”

    낮아진 목소리가 흡사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무리도 아니었다. 왕국 사람이라면 국왕의 여성편력을 모르는 이가 없다 말할 만큼 국왕의 호색한 기질은 유명했다.

    그리고 눈앞의 이 남자는 제3왕자이면서 이미 죽은 전 왕비, 아그네스 리베라의 소생이었다.

    전 왕비가 남편의 바람기로 인해 많은 마음고생을 했었다는 것 역시 대충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그네스 왕비님이 돈독한 말동무 사이였던 덕이다.

    심지어 왕은 왕비가 죽은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새 왕비를 들였다. 그게 지금의 왕비, 아이렌이었다.

    어머니와의 인연 덕분에 어릴 때도 몇 번 왕자님과 마주쳤던 적은 있었다. 그때도 미모에 감탄하긴 했지만, 같이 놀거나 그러지는 못했는데.

    “저한테서 후사를 보실 거란…. 뭐 그런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결혼 서약에 의거된 바에 따르면 당연한 일이지만.”

    왕자님의 말끝 하나하나에서 아버지인 켄드릭을 향한 짜증이 묻어 나왔다. 딱히 심기를 거스를 생각은 없었으므로 제라니아는 조용히 답했다.

    “전하께서 저를 과대평가하시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골치 아픈 일은 사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결혼은 사양하고 싶었다.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가 말했다.

    “원하는 게 있습니까?”

    “저는 지금에 만족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나중에 제 몫의 재산을 받으면 학교를 만들어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꿈이라면 그게 다였다.

    “왜 제게 이런 제안을 하시는 건가요?”

    제라니아의 질문에 프란츠는 침묵했다. 한참 뒤, 그가 느릿하게 내뱉었다.

    “직감입니다.”

    “…네?”

    순간 할 말을 잃은 제라니아와 달리 프란츠는 덤덤하게 말했다.

    “당신을 만난 순간, 이 사람이다 싶었습니다.”

    “…….”

    “나는 내 감을 꽤 신뢰하는 편입니다. 내 비로 당신보다 더 적격인 상대는 없을 겁니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뭘 믿고 그걸 확신하시냐고요.

    답답함에 미쳐버릴 것 같은 제라니아와 달리 프란츠의 태도는 더없이 느긋했다. 찻잔을 힐끗 내려다본 그가 말을 꺼냈다.

    “제라니아 공녀.”

    “말씀하세요.”

    “저저번 만남 때였나, 그대가 동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억합니까?”

    “아, 《고양이 공주님》 이야기요.”

    마침 오늘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온지라 금방 알아들었다.

    “그대가 결말부에 대해 얘기했던 말이 흥미롭더군요.”

    ‘둘은 정말 결혼했을까요?’ 당시에 했던 말을 떠올리고 제라니아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 시종이 공주님을 구해준 건 맞죠. 그렇지만 공주님이 시종을 사랑하느냐는 별개의 이야기잖아요. 이 이야기에는 공주님의 입장은 하나도 드러나지 않아요. 무엇보다 결혼은 왕이 약속한 거지, 공주님이 약속한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겁니까?’

    ‘어…. 저라면 아무래도 그 시종한테 많은 보답을 하겠죠? 절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줬으니까. 그렇지만 사랑하지 않는다면, 굳이 결혼까지는 하지 않을 것 같아요.’

    ‘왕의 명을 거역하는 일이 될 텐데도?’

    ‘아, 불경하게 들리셨던 거라면….’

    ‘아닙니다.’

    무뚝뚝하긴 했지만 정말 별로 화난 기색은 없었는지라, 제라니아는 조심스레 질문했다.

    ‘화내지 않으실 거죠?’

    ‘못 들은 셈 치겠습니다.’

    ‘…그렇게 고마우면 왕이 그 시종이랑 결혼해 주든가 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차를 마시던 프란츠가 사레가 들린 듯 쿨럭거렸다. 입가를 가리고 짧게 웃음을 터트리던 그의 얼굴은 이제껏 보았던 얼굴 중 가장 편안해 보였다.

    그래서 특히 기억에 남았고, 어쨌거나 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못 들은 셈 치시겠다더니.”

    억울하다는 듯 볼을 살짝 부풀리는 제라니아의 모습이 흡사 다람쥐를 떠올리게 했다. 프란츠의 입가가 일순 움찔거렸으나, 그는 언제나와 같이 능숙하게 표정을 관리했다.

    “배경이야 있으면 나쁠 건 없습니다. 다만, 주변 환경이나 누군가에게 휘둘려서는 곤란합니다. 필요에 의해서는 자기 가문의 뜻이라도 반할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합니다.”

    “…지금 굉장히 엄청난 소리를 하고 계시다는 건 알고 계신 거죠?”

    평온하던 제 인생을 박살 내겠단 소리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 거 아니에요?

    공작가랑 대립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할 줄은 몰랐다.

    제라니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점차 사라져가는 것을 본 프란츠가 이마를 쓸어 올렸다. 금색 머리칼이 그의 손길을 따라 흐트러졌다.

    “예를 들어 그렇다는 겁니다. 바이첸 공작은 분명 호인이나, 귀족들은 국가보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불편한 진실을 언급하는 목소리가 더없이 묵직했다. 그 말의 의미를 제라니아라고 모르지는 않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권리를 가장 우선하기 마련이다.

    “대가 없이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다 해줄 겁니다. 사랑은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당신 말고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생각은 없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 있던 제라니아가 나직하게 고했다.

    “왕자님, 저는 사랑에 환상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이게 정략결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바라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프란츠는 가만히 제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응시했다. 작은 몸집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여인. 언뜻 보기에는 평범하고 순진해 보이나 강인하고 완고한 눈빛은 아버지인 바이첸 공작을 연상시켰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그대가 이 결혼을 받아들인다면 왕실의 이름을 걸고, 나중에 그대가 원하는 것 하나는 꼭 들어주겠습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파격적인 발언에 제라니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을빛이 어렴풋이 섞여든 녹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그 눈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던 프란츠가 한 글자, 한 글자를 신중하게 나열했다.

    “권력이란 귀찮고 번거로운 구석도 있지만, 있으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대가 민생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압니다. 나는 언제나 그대의 조언을 새겨들을 것입니다.”

    제라니아의 머릿속이 실을 잡아당기듯 팽팽하게 굴러갔다. 제라니아는 분명 욕심이 없는 편이었으나, 그런 그라도 이루고 싶은 꿈 하나쯤은 있었다. 자신처럼 되고 싶다 말했던 작은 소녀의 얼굴이 눈가에 어른거렸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나, 왕실의 힘으로라면 가능한 것.

    침착하게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프란츠에게 제라니아는 재차 질문했다.

    “정말, 제가 바라는 한 가지를 들어주실 건가요?”

    “물론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은 굳건한 눈동자가 신뢰를 주었다. 굳게 다물려 있던 제라니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려, 말을 자아냈다.

    정말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면,

    “…일단 계약서부터 쓰죠.”

    까짓것, 한번 해볼 만했다.

    * * *

    청혼을 받아들인 뒤부터는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갔다.

    왕세자는 바로 다음 날 혼담을 보냈고 집안에서는 온통 난리가 났다. 간만에 서재로 불려 가자 아버지는 왕실에서 온 편지를 건네며 이게 사실이냐고 물었고,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왕세자 전하와 결혼하고 싶으냐.”

    “네.”

    단호한 대답에 공작의 이마에는 한 가닥 주름이 늘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하께서 너와 결혼하고 싶다 하시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요즘 들어 저택을 찾아오신다는 보고는 들었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버지에게 제라니아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전하께서는 좋은 분이세요.”

    “글쎄다. 이 문제에서, 전하의 성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이미 알지 않느냐. 왕세자 전하와 결혼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는 있는 거냐.”

    제라니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공작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제가 왕세자 전하와 결혼하게 되면, 아무래도 가문이 왕실과 엮이게 되겠죠.”

    제 아버지인 바이첸 공작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고수하는 인물로 유명했다.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권세가인 점을 생각하면 특이하다 할 만한 행보였다.

    가문의 성을 단 이상, 자신과 왕세자의 결합이 어떤 의미로 보일지는 자명했다. 국왕에게 충성한다는 의미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드디어 바이첸이 권력에 욕심을 낸다는 의미로 읽힐 가능성이 더 높았다.

    어쨌거나 제 결혼 상대는 차기 국왕으로 내정된 사람이니까.

    그런 복잡한 정치관계를 생각하면, 너무 저 혼자서 결정한 일인가 싶어 제라니아는 가만히 아버지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걸리는 점이 많으실 거 알아요. 하지만….”

    “아니, 네가 좋다면야 상관은 없다.”

    뜻밖에도 선선히 승낙의 의사를 보이는 공작에 제라니아는 깜짝 놀랐다. 정말요? 재차 되묻는 제라니아에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이 친서까지 보내 설득하는데 뭘 어떻게 하겠는가. 속사정을 조용히 담아둔 채 바이첸 공작은 인자하게 웃기만 했다.

    보나 마나 왕세자의 입김이 작용했겠지. 무슨 수를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징그러울 정도로 철저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네가 결혼하는 걸 보겠나 싶기도 하고 말이다. 네 어머니가 아주 좋아하더구나.”

    피로한 듯 이마를 짚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제라니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새 한숨이 늘어난 아버지에게 제라니아는 괜찮을 거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라는 난관을 넘어서자 그다음으로 기다리는 건 자매들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 언니와 코델리아에게 제라니아는 한참을 시달렸지만, 유감스럽게도 해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서로의 판단하에, 부득이하게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계약 자체에 대해서는 함구하자고 서로가 합의했기 때문이다.

    왕세자가 공식적으로 혼담을 보내기 전날, 그러니까 청혼을 받아들였던 날 두 사람은 고심하며 계약서를 작성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장소를 야외 테이블에서 응접실로 옮기고 문단속을 했다.

    제라니아는 시간이 늦었으니, 나중에 논의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했지만 프란츠는 기왕 정한 거 빨리 해결하는 게 마음 편하다며 양해를 구했다.

    왠지 다 잡은 고기가 그물에서 빠져나갈까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음, 착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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