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결혼 계약 (1)
제라니아의 하루는 단출하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간단히 정원 산책을 한 뒤에 독서, 그 이후에는 외출을 나간다.
평민들이 입을 법한 밋밋하고 단조로운 옷차림으로 시내를 돌며 음식이나 식재료를 샀다. 혼자 들기 버거워 보이는 양을 척척 들고 가는 뒷모습이 퍽 익숙해 보였다.
오늘은 주에 한 번, 고아원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어머, 어서 오세요. 제나.”
“안녕하세요.”
눈에 띄고 싶지 않아 아무렇게나 지었던 가명 역시 이제는 귀에 착 감겼다. 딱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주변을 신경 쓰이게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애들이 좋아하겠네요. 공녀님께도 감사하다 전해주세요.”
공녀님의 하녀로서 제라니아는 가만히 웃어 보였다. 몸짓이나 말투에서 귀한 신분임을 아주 감출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공작가에서 오래 일했다고 얘기하니 어영부영 넘어갈 수는 있었다.
호의 어린 미소를 지나 제라니아는 커다란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의 시선이 제라니아가 있는 쪽으로 돌아가더니, 순식간에 제라니아의 치마폭으로 와르르 뛰어들었다.
“제나!”
“제나, 어서 와!”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이 꼭 어미 새 주변에서 짹짹거리는 새끼 새처럼 조잘거렸다. 다른 곳에 비하면 환경이 낫다지만, 자주 씻을 수 없어 다소 기름진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쓰다듬어준 뒤 제라니아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연극을 감상하는 이들처럼 아이들이 제라니아를 둘러싸고 동그랗게 원을 그려 앉았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거야?”
“《고양이 공주님》이라는 동화야.”
싱긋 웃은 제라니아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양이 공주님》
옛날 옛적에 아름다운 공주님이 살았답니다. 그 아름다움이 타국에도 널리 퍼져, 구혼자가 물밀 듯이 밀려들었지요. 그중에는 공주님만큼이나 유명한 이웃 나라의 왕자님도, 꾀죄죄한 로브를 뒤집어쓴 사악한 마법사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주님이 갑자기 실종되었어요. 태양과 같던 공주님의 부재에 왕국은 슬픔에 잠겨 들었습니다.
아버지인 왕은 공주님을 찾아내는 자를 공주와 결혼시키겠다는 공표를 했어요.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백방으로 공주님을 찾았지만, 아무도 공주님을 찾지 못했답니다.
그러던 중, 공주님이 다시 나타났어요. 공주님의 손을 잡고 온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왕자님?”
“마법사!”
“공작님이 아닐까.”
왁자지껄 의견을 쏟아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제라니아는 가볍게 웃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바로, 공주님의 방을 청소하던 젊은 시종이었습니다.
놀라는 좌중에게 시종은 찬찬히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공주님은 청혼을 거절당하고 앙심을 품은 마법사의 저주에 걸려, 고양이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던 겁니다.
고양이의 모습으로 어슬렁거리던 공주님을 구한 건, 평소 궁인들에게 구박받던 어린 시종이었습니다.
시종은 자신이 주워 온 고양이가 공주라는 사실은 까맣게 몰랐습니다. 음식을 가져다줘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 모습에는 안절부절못했지만요.
하루, 이틀, 굶주림에 지친 고양이는 겨우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그렇게 시종은 고양이와의 기묘한 동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둘 사이엔 묘한 유대감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으로 나갔던 공주님은 평소 시종을 괴롭히던 이들에게 걸려 위험에 처합니다.
피를 흘리고 쓰러진 고양이를 소중히 안아 든 시종이 고양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고, 그 순간 고양이는 원래 모습인 공주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 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야기를 끝마치자 여기저기서 짝짝,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산만하지만 귀여운 관중들의 열렬한 호응에 제라니아 역시 치맛자락을 들고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고양이가 인간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끝났다. 결말은 전해져 내려오지 않았다. 여러 가지 해석과 추측이 난무하지만,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라면 행복한 엔딩인 게 나을 것이다.
동화를 들려주는 건 고아원에 올 때마다 반드시 하는 일과 중 하나였다. 제라니아는 다독가였고, 공작가의 서재에 있는 책들 중 제라니아의 손을 거치지 않은 책은 없었다.
꿀을 찾아 떠나는 꿀벌처럼 뿔뿔이 흩어지는 아이들을 아쉬운 기색 없이 흐뭇하게 지켜보던 제라니아의 옆에 한 아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곱슬곱슬한 짧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니? 메리.”
처음으로 고아원에 왔을 때, 제게 가장 낯을 가리던 아이였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상황은 장족의 발전이라 할 만했다.
투명한 구슬을 닮은 갈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아이가 주섬주섬 물건을 꺼내 내밀었다. 제라니아가 이 고아원에 기부했던 책 중 하나인 《한여름 밤의 동물들》이었다.
“읽어줘?”
수줍은 듯 살며시 고개를 끄덕거리는 꼬마 숙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제라니아는 아이의 볼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쓰다듬었다.
책을 활짝 펼치자 메리가 제라니아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하는 제라니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집요하다면 집요했다.
아무리 봐도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이제 막 동물들이 광장에 모인 장면을 읽어주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동물들은 돌아오는 신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악기를 연습하기로 했….”
“제나는 대단해.”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가 말허리를 쑥 잘라먹었다. 제라니아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대신 메리를 돌아보았다. 이제 막 열 살이 된 어린아이는 예전에 비하면 다소 웃음이 늘었다.
“내가 대단해?”
“응! 메리는 커서 제나처럼 되고 싶어.”
제라니아의 낯빛이 서리 낀 창문처럼 일순 흐려졌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듬성듬성 잘려 있던 머리카락이 이제는 퍽 정돈되어 있었다.
물론 제라니아의 솜씨는 아니었다. 그는 똑똑했지만, 손재주는 궤멸 수준이었기에 저택에서 입이 무겁고 솜씨 좋은 하녀를 데려와 부탁했다.
“내 어디가 그렇게 메리 마음에 드는데?”
메리가 눈을 반짝거리며 이것저것 말을 늘어놓았다. 주머니에서 우르르 물건을 쏟아내듯 나오는 대답들을 제라니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주워 담았다.
아는 것도 많고, 다정하고, 목소리가 예쁘다든가, 차분한 분위기가 좋다든가. 평생 들을 칭찬을 다 듣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무기력해 보이던 얼굴에는 활기가 돌았고, 제게 보내는 시선에는 동경과 애정이 가득했다.
메리는 똑똑한 아이였다. 말수가 적고 사람을 가리긴 하지만 이해력이 빨랐고 한 번 알려준 이야기는 절대 잊지 않았다.
그런 아이에게 너는 평민이고 가난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도 어려울 거라는 현실을 굳이 지금 알려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속이 쓰렸다.
저택에 돌아왔더니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 앞에 앉아 속 모를 얼굴을 하고 있는 상대를 보고 제라니아는 바짝 긴장했다.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는 했지만 하루 종일 밖을 돌아다닌 만큼 티가 날 것 같았다.
“저번에 다녀가신 게 사흘 전이지 않으셨습니까.”
다음에 오겠다고 예고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다음 만남이 성사될 줄은 몰랐다.
원래도 주에 한 번 오기는 했다지만 갑자기 기간이 확 줄다니. 한가해지신 건가? 왕세자의 하루는 분 단위로 쪼개야 할 만큼 바쁘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요. 그때는 말동무로서 방문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공녀에게 구애하는 입장이지 않습니까.”
말투는 혀에 꿀을 바른 듯 부드러웠지만 제라니아의 귀에는 그게 더 어색하게 들렸다. 전략을 바꾸셨나? 작고 하얀 얼굴에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것도 아닌가 싶어 프란츠는 얼굴 위에 발라둔 웃음기를 천천히 지웠다. 서늘하고 무뚝뚝하지만, 굳건한 푸른색 눈동자가 제라니아를 쳐다보았다.
“역시 설명이 너무 짧았던 것 같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사람을 물러뒀기 때문에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슬슬 해가 서산 너머로 지고 있었다. 물감을 캔버스 위에 짓이긴 듯 붉게 흐려지는 풍경이 둘을 감싸 안았다.
차를 마신다는 핑계로 가져다 둔 찻잔과 찻주전자가 테이블 위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제라니아 바이첸.”
“…….”
“나와 함께 이 나라를 바꿔볼 생각이 없습니까.”
예상치 못한 말이 남자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놀라서 눈만 깜빡이는 눈앞의 여인에게 프란츠는 진중하게 말했다.
“나는 이 나라를 이전과 다른 곳으로 바꿀 겁니다. 정복전쟁이 끝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는 걸 그대도 알고 있겠죠.”
전쟁이 끝나고 나라의 영토는 넓어졌으나, 그만큼이나 국내에서는 잦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전쟁을 위해 자금을 끌어다 썼던 만큼 재정 상태는 심각했고, 내수가 멀쩡할 리도 없었다.
실제로 왕실은 마지막 전쟁 이후 6년 동안은 개판 상태인 나라 상황을 수습하는 것을 중점으로 두고 움직였다.
“결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만, 내가 왕이 된다면 언젠가는 결혼을 해야 할 겁니다.”
슬슬 본론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서, 이상적인 파트너를 찾고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비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춘 상대를 말이죠.”
“그게 저라는 말씀이신가요?”
프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현명하면서도, 다정하고 선량합니다. 이상적인 왕비의 조건을 모두 갖췄죠.”
“자수도 못하고 미인도 아닌 데다, 책이나 읽으며 하루를 보내는 이인데 말입니까.”
크레이츠의 귀족 여인들이라면 누구나 어린 시절부터 배워오는 덕목이 있다. 남편의 말에 순종하고 영지와 성을 관리하며, 자수나 춤, 음악 등에 조예가 있을 것.
손재주가 없으니 자수 역시 못하고, 파티에 크게 흥미가 없으니 춤 솜씨가 좋을 리도 없었다. 영지나 성을 관리하는 정도는 할 수 있을 법했으나 그뿐이었다. 책을 좋아하지만 시나 문학보다도 정치적인 문제나 관개, 토목과 같은 실용적인 분야에 더 관심이 많았다.
차분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게 순종적인 성격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실제로 남매들 중 가장 공작의 말을 안 듣는 것도 자신이었다.
“대신 그대의 견식은 가히 훌륭하지요. 세상에 미인은 많지만, 현명한 이는 흔하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현명한 이가 자신뿐이지는 않을 텐데. 제라니아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켰다.
“나는 아름다운 인형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색을 탐할 생각도 없고.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 생각합니다. 차기 국왕의 하나뿐인 왕비라면.”
제라니아는 그제야 프란츠가 진심으로, 자신과 결혼하려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나 결혼이라고 한다면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부부지간이잖아요. 사랑 없는 결혼인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귀족들 사이에서 정략결혼이 넘쳐나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제라니아의 부모님도 정략으로 만난 사이였다. 그럼에도 마음에 걸렸다. 초연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 드문드문 엿보이는 음울한 그림자가.
“나야말로 묻고 싶은 말이로군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네?”
“내 아내가 된다는 건, 나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걸 의미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