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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0화 (1/171)
  • < 그 왕세자비의 사정 >

    Prologue

    평범한 게 좋다.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공작가의 딸로 태어난 입장에서 하기엔 지극히 모순적인 말일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풍파 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에 가까웠다.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언니와 여동생은 너는 뭐 그렇게 꿈이 없냐는 이야기를 했고, 오라버니는 그게 말처럼 쉽겠냐고 나를 걱정했다.

    혼담이 쏟아지는 자매들과 달리 내게는 들어오는 혼담이 거의 없었다. 둘을 장미라 생각하면 나는 들꽃에 가까우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화려한 꽃들 사이에 있는 소박한 꽃이, 사람들 눈에 차기나 할까.

    왕국에서 결혼 적령기는 대체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이다. 한 살 많은 언니야 들어오는 혼담을 거절하고 있어서 그렇다지만, 나는 정말로 별다른 제안이 들어오지 않았다.

    파티에도 거의 나가지 않고, 만나는 사람과만 주로 교류했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그 대다수는 절대 부모님 눈에 차지 않을 신분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스무 살이 넘어선 이후로는 이대로 영영 결혼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하셨다.

    어머니의 심정을 아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나, 사실 별다른 위기의식은 없었다. 굳이 나 하나쯤 결혼하지 않아도 우리 집에 자식은 셋이나 더 있었다.

    공작위를 물려받을 오라버니를 위시해, 사교계의 꽃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답고 멋진 언니와 여동생이 있는데 뭐가 걱정인가. 내가 괜한 부채감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공작가에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있으면 뭐 어떨까. 먹고사는 것에 지장이 없는 이상, 결혼하지 않는 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어머니는 결혼하는 것이 여자의 행복이라 하셨지만 그리 실감 나지는 않았다. 일단 내가 결혼을 해봤어야 알지.

    책이나 읽으며 여유롭게 혼자 늙어가는 것도 그리 나쁜 인생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오늘은 볕이 무척 좋았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과 살랑거리며 부는 바람, 너무 덥지 않은 날씨는 티타임을 가지기에 제격이었다.

    갑자기 손님이 찾아와 당황하기도 했지만, 같이 차를 마시는 것쯤이야 별일 아니었다. 무엇보다 손님의 신분이 어마어마했는지라 나는 내심 눈치를 보고 있었다.

    혹시 환청을 들은 건 아닐까? 현실부정을 하며 따뜻한 차로 속을 달래려는 순간, 상대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나와 결혼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하마터면 마시던 차를 뱉는 결례를 저지를 뻔했다. 겨우 입을 다무는 데 성공한 나는 맞은편에 앉아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상대의 얼굴을 차분히 응시했다.

    금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거리는 금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는 가을 하늘을 떠올리게 했다.

    이목구비 역시, 미인이라 명성이 자자하던 어머니를 닮았는지 무척 수려했다. 선이 굵기는 했지만 남자답다 칭송되는 켄드릭 국왕과는 그다지 닮지 않은 것도 특징 중 하나였다.

    풀잎들 사이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처럼, 아마 어딜 가도 가장 먼저 눈에 띌 것이 분명할 만큼 화려한 남자였다. 지나치게 특징이 없다 일컬어지는 자신과는 전혀 달랐다.

    공작인 아버지 편에 듣기에는 재치 있고 능글맞은 성격이라 하던데, 실제로 만나본 그는 상당히 무뚝뚝했다. 대체 누가 이런 얘기를 저토록 무심한 얼굴로 한단 말인가.

    아무튼 지금 이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 반짝거리는 왕자님이 지금 나한테, 그러니까….

    “제라니아 바이첸, 당신을 내 비로 맞고 싶습니다.”

    쐐기를 박는 대답에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티타임을 즐기기 딱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도 아닌 모양이다.

    “왕세자 전하.”

    사교계 미혼 여성들의 동경과 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왕세자, 프란츠 리나엔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제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에 묘하게 한기가 들었다. 이상하다, 오늘 날은 분명 따뜻한 편인데.

    “제가 지금, 무척 당황스러운데요.”

    “급작스러운 이야기니 이해합니다. 그럼, 나중에 날을 잡아 제대로 의논하도록 할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왕자님처럼 화려하고 멋진 분이 저같이 평범한 여자를 비로 맞으시겠다니, 진심이신가요?”

    말을 뱉어놓고도 아차 싶었다. 무심코 튀어나간 진심에 왕자님은 선선히 대답했다.

    “장난으로 혼담을 입에 담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장난이 아니겠지. 고작 몇 번의 만남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런 농담을 꺼낼 만큼 가벼운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째서?

    곰곰이 생각하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저희 가문의 힘이 필요하신 거라면, 저보다 더 아름답고 멋진 자매들이 있습니다.”

    당장 언니 칼리아도, 동생 코델리아도 무척 사랑스럽고 매력적이었다. 사교계에서 저 둘을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고 불릴 만큼 유명한 이들이 아닌가. 늘 자랑스러운 자매들이었고, 그렇기에 왕자님이 그들이 아닌 자신을 선택했다는 게 더 놀라웠다.

    “물론 다른 영애들 역시 무척 매력적인 여성들이긴 합니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건 당신이니까요.”

    필요하다는 표현에 도리어 안심이 되었다. 그가 애정을 말했더라면 더욱 난감했을 터였다. 하긴, 자신은 그런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제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생각보다 평범하다든가, 재미없고 고지식하다는 뭐 그런 이야기였다.

    “저에 대해 많이 아시는 건 아니잖습니까.”

    결혼이란, 즉 평생 가약을 맺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특히 왕족의 결혼이면 반역죄를 저지르는 정도의 대형 사건이 없는 한 이혼은 어려웠다.

    결혼이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자신과 달리 그에게 이건 왕실의 대소사였다. 말마따나 제가 내세울 만한 게 신분밖에 더 있나? 오리무중이었다.

    “알 만큼은 안다고 생각합니다.”

    말문이 막혔다. 저도 왕자님을 잘 모르는데, 왕자님이 저를요?

    가까스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혀로 짓눌렀다. 신중하신 편이라 생각했는데 저돌적인 성향이 있으셨던 걸까.

    “제게 선택권은 있는 건가요?”

    “거절하겠다는 뜻입니까?”

    눈치 하나는 정말로 빠르시군. 부정할 것도 없었는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오해가 생길라 재빨리 덧붙였다.

    “그, 전하께 문제가 있어서는 절대 아니라, 제가 결혼에는 전혀 뜻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람은 문제가 없는 한 차기 국왕이 될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과 결혼한다면 후일 왕비가 되어야 한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현재 왕궁의 상황만 봐도 그랬다.

    현왕인 켄드릭은 정복전쟁을 통해 크레이츠의 영토를 확장시킨 뛰어난 무인으로 그 명성이 자자했지만, 여자를 밝히는 바람둥이로도 유명했다. 덕분에 왕실에는 왕자와 공주가 도합 30명은 넘어갈 정도로 많았다.

    말이 많고 마부가 유능하지 못하면 마차는 제대로 나아가지 못한다. 켄드릭 왕은 답도 없는 왕궁을 거의 방치해둔 상태였고, 덕분에 왕궁 내부의 관계도는 정말 답이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라고 들었다.

    총애를 얻기 위해 후궁들 사이에서 온갖 암투가 벌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왕자나 공주들 사이에서도 치열한 경쟁이 오가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끝없는 권모술수와 계략이 판치는 곳이 바로 왕궁이었다. 난장판이 예상되는 곳에 굳이 들어가서 고생을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압니다. 나중에 학교나 하나 차려서 선생이나 하며 나이를 먹고 싶다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그런 말도 했었나. 가족들한테도 아직 꺼내지 못한 말인데.

    왕세자라는 점을 제외하면 그는 정말 좋은 이야기 동무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들떠 있었던 것 같아 민망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긴장해 있는 나와 달리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그가, 급히 나오느라 들고 온 책을 가리킨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이 책을 아세요? 워낙 좋아하는 책이라 눈을 빛내며 물었더니 그 역시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다. 같은 주제가 나온 것에 어색함을 떨쳐내고자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 혼자 조잘조잘 떠들고 있었다.

    숙녀답지 못하다 생각하시려나. 슬쩍 눈치를 살폈지만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간간이 장단을 맞춰 주기까지 했다.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뚝뚝한 표정 뒤로 이런 세심함이 숨겨져 있다는 게 놀라웠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던 그의 방문을 차츰차츰 기다리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도합 다섯 번의 방문 끝에, 이런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알겠습니다.”

    선선히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왕자님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화려한 미형의 얼굴만 봐서는 상상도 가지 않지만, 의외로 그는 내 머리가 간신히 어깨에 닿을 만큼 키가 컸다. 적당히 붙은 근육들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유려하게 흐트러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문득 소소한 궁금증이 일었다. 단련에는 뜻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나? 그런데 어떻게 몸이 저렇게 좋은 걸까.

    심지어 그는 손도 크고 발도 컸다. 발이 큰 만큼 걷는 보폭 역시 넓었으나 그 움직임은 생각보다 느렸다. 내게 맞춰 나란히 걸어가는 왕자님을 볼 때마다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배웅하러 정문 앞까지 나서자, 왕자님은 간단한 작별 인사와 함께 놀라운 말을 덧붙였다.

    “그럼 다음에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또 오신다고요?”

    이걸로 끝난 거 아니었어? 입을 벙긋거리는 내 태도에서 답을 읽었는지 왕자님이 싱긋 웃었다. 방금 전까지 무표정하던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퍽 장난스러운 태도였다.

    “어차피 한 번에 넘어오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음에는 좋은 대답을 기대하죠.”

    저더러 어쩌란 말인가요?

    어쩐지, 평탄한 인생계획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 것 같다는 예감이 내 발목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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