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53화 (153/153)

#153.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기사들의 검에 베인 이들이 숨이 끊어져 바닥에 나뒹군다. 드루쉬아의 검은 시차를 두지 않고 연이어 상대의 팔다리를 끊어냈다.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검에 상대가 놀라 주춤했다.

그러나 점점 늘어나는 적을 상대하기에는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아아악!”

드루쉬아의 등 뒤를 지키고 있던 기사가 세 사람의 공격을 한꺼번에 받아 결국 쓰러졌다. 펄번이 황급히 빈 자리를 채우고 드루쉬아에게 소리쳤다.

“물러나십시오! 저희가 막아볼 테니까, 어떻게든….”

타다닥. 화살이 날아들었다. 검을 휘두르던 펄번의 오른팔에 강력한 석궁의 화살이 박혔다. 간신히 검을 움켜쥐었지만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스며드는 검푸른 여명에 숲 언저리로 모여드는 새카만 자객들의 모습이 선명하다.

상대도 현저한 전력의 차이를 깨닫고 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스무 명 가까운 적들이 전투 현장 뒤쪽에 자리 잡고 석궁을 준비했다.

드루쉬아는 어금니를 사리물며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하나라도 더 죽이면 아시카와 아기가 살아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나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또 한 명의 기사가 쓰러지는 걸 보면서 자객들이 물러났다. 물러나는 이를 쫓아 끝끝내 목을 베었지만, 결국 수십 명의 자객들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한꺼번에 쏴라! 도망갈 빈틈을 주지 마!”

후작은 신이 나서 소리쳤다. 상대는 독 안에 든 쥐였다. 이제 진짜로 끝을 낼 때가 되었다.

명령이 떨어지는 동시에 수십 발의 화살이 활시위를 떠났다. 펄번은 순간적으로 드루쉬아의 앞으로 달려갔고 드루쉬아는 마이헬러 후작을 노려보았다. 죽여도 죽지 않는 상대를 저주하면서.

그 순간이었다. 드루쉬아와 펄번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기가….”

작게 터져 나온 소리는 분명 아기의 울음소리였다. 너무 작아서 파묻힐뻔한 그 소리를 용케도 알아들었다.

드루쉬아가 느낀 절망과 공포는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아이의 탄생을 기뻐하기보다 자신의 죽음 뒤에 아시카와 아이에게 닥쳐올 재앙이, 그를 벼랑 끝으로 밀어 기어이 떨어뜨리고야 만다.

새벽빛을 가르며 날아드는 수십 발의 화살이 남아있는 이들의 마지막을 고한다. 찰나의 순간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분노하고 염원하며 힘껏 죽음을 향해 달려드는 것뿐.

드루쉬아가 쇄도하는 화살을 향해 달려드는 순간,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동시에 생경한 빛이 폭발하며 시야를 가렸다.

“아아악!”

“으악!”

그를 향해 날아오던 화살들이 허공에서 멈췄다. 멈춰버린 것은 화살만이 아니었다. 비명을 지르던 수십 명의 적들이 입을 벌린 채 함께 멈춰버렸다.

그 기이한 순간에 드루쉬아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시리도록 시야를 가득 채운 빛 사이로 천천히 무언가가 흘러들었다. 사위를 잠식한 검푸른 빛 사이로 흘러드는 기묘한 청보랏빛.

아니,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창백한 빛이었다. 검푸른 새벽빛을 밀어내고 저 홀로 빛을 내는 것처럼 창백한 백금발이 길게 허공에 흘렀다.

긴 백금발의 주인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장신의 사내만큼이나 훤칠한 키에 침의처럼 헐렁한 옷을 걸치고, 걷고 있지만 땅에 닿아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는 드루쉬아를 지나쳐 곧장 마이헬러 후작에게 다가갔다. 느린 움직임이었지만 공간이 멈춰서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는 창백하리만치 하얀 손을 뻗어 마이헬러 후작의 목을 틀어쥐었다. 후작은 두 눈을 번뜩이면서도 꼼짝하지 못했다.

그는 제 손에 들어온 후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차디찬 청보랏빛의 눈동자는 무기질처럼 아무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푸른빛이 감도는 창백한 입술이 열렸을 때 처음으로 인간의 것이 아닌 기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 놈이로구나. 계속 나를 방해한 것이.]

“끄…으읍.”

목구멍이 틀어막힌 것처럼 후작은 꺽꺽 숨을 토했다.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차디찬 시선은 동요가 없는데도 온몸의 신경이 바늘 끝처럼 곤두서서 비명을 지른다.

공포였다. 전신을 압도하는 생경한 공포 앞에서 후작의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내 것을 돌려주는 것이 그리도 아까웠을까.]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공포에 질려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진작에 깨어졌어야 할 감옥이었어. 너희가 나를 깨웠던 그 순간부터.]

무기질처럼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 기이한 침묵 한가운데 스며들었다. 그 목소리를 따라 재앙은 소리 없이 시작되었다.

“끄흐… 억.”

그의 손끝에서부터 마이헬러 후작의 살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아니 타는 것이 아니라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물기가 바짝 말라버린 나무처럼 생명이 빠져나가고 쪼그라들어 짙은 갈색의 덩어리로 변해갔다.

아무도 도망칠 수 없었다. 재앙은 후작에게서 곁에 있는 사람에게로, 또 그 옆의 사람에게로 차근차근 번져나갔다.

드루쉬아는 완전히 얼어붙은 채 눈앞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마른 가지처럼 바싹 말라버리는 것을 보았다. 수십, 수백 년 동안 사막에 방치된 미이라처럼.

그리고 더는 말라버릴 것조차 남지 않았을 때 수십 구의 시신이 부슬부슬 부서져 내렸다. 언젠가 대공성에서 보았던 짙은 검갈색의 흙먼지 덩어리처럼.

상상할 수 없었던 잔혹한 몰살이었다. 마침내 그의 시선 앞에 살아남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을 때 그가 돌아보았다.

“허억… 누….”

드루쉬아는 숨을 헐떡이며 목소리를 쥐어 짜내려 했다. 그러나 상대의 시선은 그가 아닌 등 뒤의 바위틈으로 향해 있었다.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본능적인 공포. 드루쉬아는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저 존재가 대공성에 오래도록 잠들어 있었던 비밀이라는 것을.

상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물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느리게 흐르는 걸음으로 드루쉬아를 지나쳐 바위틈으로 향했다.

“안….”

어떻게든 움직여보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드루쉬아와 기사들을 두고 천천히 아시카가 있는 바위틈으로 들어갔다.

온몸이 바짝 긴장되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와도 같았다. 동시에 힘 조절이 되지 않아 맥이 쭉 빠지기를 반복했다. 아시카는 자신이 느끼는 과정이 정상인지 아닌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알기 어려웠다.

시야가 가물거릴 때마다 잔느가 다가와 계속 말을 걸었다. 무슨 소리인지는 들리는데 정작 이해되지 않아서 귓가를 스쳐 가기를 반복했다.

“흐으… 르, 쉬아는?”

“입구를 지키고 계십니다. 말씀하지 마시고 숨 쉬는 데 집중하세요.”

진땀이 배어 나와 머리칼이 얼굴에 엉겨 붙고 온몸이 축축하게 젖었다.

왜 하필 오늘일까. 과연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는 있을까. 제가 뭔가 크게 잘못한 것만 같아서 아기에게 미안한 동시에 서러워졌다.

“흐으윽.”

두려움은 이내 머릿속에서 날아갔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격통이 온몸을 휘감았다. 마지막으로 겪었던 죽음보다도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고통이었다.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시야가 새카맣게 암전되었다.

이대로 의식을 잃게 되는 걸까. 그럼 아기는 어찌 될까. 우리의 아기는…. 하지만 이대로 숨이 끊어지면 고통도 사라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또 얼마간. 고통으로 새카만 어둠 속에 잠겨버린 의식 한가운데 희미한 울림이 새어들었다.

[…놓아… 줘.]

희미한 울림은 형태를 지닌 것처럼 스며들어 아시카를 휘감았다.

[…아이야, 아크펠라의 아이야….]

그녀가 의식을 잃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양 강하고 날카로운 힘이었다. 열에 들뜬 몸이 얼음물에 내던져진 것처럼 시린 한기가 느껴졌다.

[…놓아줘. 이제 그만 내 힘을 돌려줘….]

한기가 고통을 집어삼키며 꾸역꾸역 덩치를 불려갔다. 누군가 그녀를 어루만지는 것도 같고 날카롭게 쥐어짜는 것도 같았다.

“소공작님!”

정신을 잃어가는 아시카의 뺨을 잔느가 세게 쳤다. 충격이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정신없이 휘둘리는 자신이 느껴질 뿐.

“정신 차리세요. 소공작님! 힘을 놓으면 아기가 죽습니다!”

잔느의 필사적인 독촉에 기계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아시카의 정신은 반쯤 어딘가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동굴이 아니었고, 그저 새카만 어둠뿐인 공간이었다. 별이 보이지 않는 밤처럼 어둡기만 한 공간.

그곳에서 저를 향한 시선을 느꼈다. 서늘한 빛을 내던 그믐달처럼 매서운 눈초리. 사람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청보랏빛의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흐아악!”

비명과 함께 아시카의 눈이 번쩍 떠졌다. 창백한 야광석의 빛이 지나치게 밝게 느껴질 만큼 감각이 곤두섰다.

“정신 놓지 마세요. 소공작님. 아기입니다.”

잔느의 목소리였다. 모닥불 연기와 함께 비릿한 탄내가 진동했다.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잔느가 탯줄을 잘라내고 있었다.

“흐으… 아….”

“잘하셨어요. 정말 잘 해내셨어요.”

잔느는 손에 든 작은 형체를 망토로 황급히 감싸 안았다. 그러나 잔느의 표정이 이내 어두워졌다.

“…잔느… 왜….”

분명 아기의 울음을 들었다. 그러나 미약한 울음소리는 금세 잦아들었다. 동굴 안에는 아시카의 가쁜 숨소리와 모닥불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가늘게 들릴 뿐.

“…아이를 이리….”

아시카는 잔느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기를 달라고, 제게 보여 달라고. 그러나 잔느는 선뜻 내주지 못했다.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기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아시카는 정신이 확 들었다.

“잔느!”

절규와도 같은 외침이었다. 아시카의 비명이 신호가 된 것처럼 눈앞에서 시린 빛이 폭발했다. 순간적으로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공간이 요동친다. 사위의 공간이 모조리 찢겨나간 것처럼 갈라지고, 그 틈새로 쏟아져나온 기이한 빛이 사위를 잠식했다. 시공이 멈춰버린 찰나의 순간.

다가오는 존재는 사람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창백한 하얀 피부에 그린 듯이 선이 고운 이목구비와 푸른 기가 도는 입술까지.

바람이 없는데도 일렁이는 백금색의 머리칼과 무기질처럼 빛을 내는 청보랏빛 눈동자만이 기이한 느낌을 줄 뿐.

강력한 힘이 전신을 옭아매 잔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공포와 경악으로 벌어진 눈을 감을 수조차 없었다. 상대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도.

아기를 앞에 둔 그는 기이한 것을 보듯 고개를 갸웃했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뻗은 손이 아기에게 향했다.

순백의 머리칼만큼이나 창백한 하얀 손이 아기의 얼굴 언저리를 맴돌았다. 조금은 망설이는 것도 같았다. 차디찬 빛이 흘러나와 아기에게 닿았을 때, 실금처럼 갈라져 있던 아기의 눈이 빠끔히 열렸다.

기묘한 빛을 내는 청보랏빛의 눈동자. 붉은 핏기가 가시지 않은 아기의 얼굴에 보석처럼 선명한 청보랏빛이 박혀있었다.

아기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크고 길쭉한 눈매가 곱게 접히고 생명이 느껴지지 않던 얼굴에 표정이 생겼다.

[…나의 구원자.]

차디찬 음성이 뱉는 달콤한 희열이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숨이 꺼져가는 아기의 이마에 축복의 입맞춤을 선물했다.

축 늘어져 있던 아기가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작디작은 팔을 바르작거리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힘찬 울음소리였다.

“아아….”

아시카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바깥쪽에서 부산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시카!”

드루쉬아의 목소리에 그가 돌아보았다. 처음과 다르지 않은 차디찬 시선으로.

드루쉬아의 손에는 검이 있었으나 그것이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망설이는 짧은 순간 드루쉬아의 시선이 아시카와 아기를 오갔다.

잔느는 아기를 안고 재빨리 물러났다. 순간 잔느와 아시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아시카는 아기를 건네받고 불안하게 이리저리 살폈다.

“왜….”

분명 태어난 아기는 백금발에 청보랏빛의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 모든 것이 변했다.

이븐을 닮아 있던 아기는 이제 아시카와 같은 검은 머리칼에 드루쉬아를 꼭 닮은 푸른 눈동자를 느른히 깜박이고 있었다.

아시카의 의문을 알아차리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라. 아이는 건강할 거야.]

분명 차디찬 표정인데도 웃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드루쉬아는 들고 있던 검을 천천히 내렸다. 드루쉬아가 아시카에게 다가가는 동안 그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밖으로 향한 그의 시선이 허공 언저리를 배회했다.

[이제는 그만할 때도 되었지.]

모두의 시선이 아시카와 드루쉬아에게 집중되어 있는 동안 공간을 잠식했던 빛이 사그라들었다. 천천히 사라지는 빛처럼 그의 모습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드루쉬아가 처음으로 아기를 품에 안았을 때, 밖에서 시원한 빗소리가 들려왔다. 긴 가뭄이 끝나는 소리였다.

#Epilogue.

습하고 끈적한 공기가 숨결에 스며들었다. 빗소리가 잦아든 새벽, 아시카는 불현듯 눈이 떠졌다. 어둠 속에서도 익숙한 침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홀린 듯이 침대에서 내려와 옆방으로 이어진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데도 아기의 유모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예민하게 아이를 살펴야 할 유모가 깨어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시선이 아기의 침대로 옮겨갔을 때 아시카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

아기 침대 옆에 서 있는 훤칠하게 큰 남자의 형체가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홀로 빛을 내는 기이한 백금발이 바람에 날린다. 그는 처음 그랬던 것처럼 물끄러미 아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시카는 저 존재가 그들을 도왔다는 걸 안다. 그러나 동시에 몹시 두려운 존재라는 것도 알았다.

“제가….”

두려운 마음을 다잡으며 아시카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꿈속에서 본 것이 당신이 맞나요?”

그제야 상대가 고개를 들어 아시카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시리도록 차디찬 시선이었다.

[네가 본 건 보석에 남겨진 기억이야.]

이제껏 매 순간마다 아시카를 일깨웠던 환각 모두가 그러했다.

“당신의 이름이….”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제 것이 아닌데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시카는 가슴 언저리를 손으로 쓸며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디솔리야.”

차디찬 상대의 얼굴에 미미한 동요가 일었다. 청보랏빛의 눈동자가 살며시 접히며 조금은 반가워하는 듯도 했다.

[이제는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인 것을.]

아시카는 용기 내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디솔리야라 이름 불린 상대는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아시카는 디솔리야의 대답에서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제가 겪은 환각이 모두 신석에 남겨진 기억이라면 한번은 일어났었던 일이라는 말인가요?”

디솔리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

내내 마음속에서 지워낼 수 없었던 기억이었다. 위험이 사라지고 드루쉬아와 함께 아이를 안았을 때, 벅차도록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아파 왔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탁하게 흘러나왔다.

“그게 꿈이 아니었나요? 어딘가에 실제 했던 시간이었다는 말인가요?”

아무리 현재가 행복해도 두 사람이 맞이했던 비참한 죽음을 지워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흔이었다. 드루쉬아에게 말하면 상처가 될까 봐 차마 입에 올리지도 못하는 깊고 아픈 상흔.

이제 괜찮다고 모조리 덮어버리기에는 그 시간 속의 자신이, 그 시간 속의 드루쉬아가 안타깝고 서러웠다.

“그렇게 불행한 삶이 우리의 것이었다고… 정말 그런 건가요?”

디솔리야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도 했다.

[정말 그 삶이 온전히 불행하기만 했느냐.]

순간 아시카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얼굴이 되었다.

불행한 운명으로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으나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그 시간 속에서 아시카와 드루쉬아는 언제나 함께였다. 함께 자랐고 함께 배웠으며 서로만을 바라보며 사랑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오롯이 서로만을 바라보던 시간이었다.

그 모든 것이 마지막 불행으로 인해 아무 의미 없는 고통뿐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아. 오히려….’

아시카는 쓰게 웃었다.

“아니요. 제가….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그래요. 당신이 뭘 말하려는지 알 것 같아요.”

그 시간 또한 두 사람의 것이었다. 아무리 아파도 아픈 만큼 소중했던 기억을 가슴속에 그러안고야 만다.

디솔리야의 서늘한 얼굴이 느슨해졌다.

[아파하지 않아도 돼. 사라진 시간 속의 너희도, 이미 지나버린 과거 속의 나도.]

체기가 올라오는 것처럼 가슴속의 응어리가 목구멍을 틀어막는 기분이었다. 이제 털어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쉬이 털어지지 않는 감정을 아시카는 제 손으로 쓸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고. 괜찮다고 말하는 상대의 얼굴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데도 기이하게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인간의 힘이란 참으로 기이하지. 나는 그저 힘을 나눠주었을 뿐, 그 힘의 형태를 정의한 것은 모두 너희였어. 인간의 염원이 어디까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지 직접 보았어.]

아시카는 습해지는 눈을 들어 올렸다.

“르쉬아가….”

금세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사라진 시간 속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저를 보던 짙푸른 눈동자와 그 속에 담긴 간절한 염원이 멍울처럼 가슴에 남았다.

디솔리야는 담담한 어조로 아시카가 뱉지 못한 말을 이었다.

[그래, 탈리온의 아이는 그토록 간절했더구나. 너를 살리고자, 너를 제 자리로 돌려놓고자 하는 염원이.]

욕심이 없어서 오랜 세월 장식처럼 방치되었던 탈리온의 신석은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힘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힘에도 한계는 있단다. 그래서 왕국을 세운 아이에게 경고했는데. 결국 누군가는 듣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 아이… 는 초대 왕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너희가 왕이라 이름한 아이는 제 사람들 모두를 지키고 싶어했었지.]

고향을 잃고 황량한 황무지를 떠돌던 사람들. 그런 그들을 이끌던 왕과 충실했던 동료들이 있었다.

그래서 도왔다. 무지와 순수한 선의만으로. 그리고 왕이 아끼던 세 사람, 아크펠라와 탈리온, 마이헬러를 디솔리야도 아꼈다. 그랬기에 제게 목숨처럼 소중했던 보석을 그들 넷에게 맡겼다. 그것이 왕의 탐욕을 더욱 부추길 줄도 모르고.

마지막으로 제 할 일을 마쳤을 때 디솔리야는 경고했다. 변화는 이것으로 족하니, 더는 욕심부리지 말라고.

그러나 3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왕의 자손은 시조의 경고를 잊었다. 새로운 트리델리아의 왕은 더 많은 땅을 원했고 그걸 위해 자신의 신석과 마이헬러의 신석까지 빼앗아 사용했다.

“그래서 저주를 내린 건가요?”

[저주?]

디솔리야는 사람인 양 고개를 갸웃했다.

“황족에게 내려진 피의 저주요. 각화병이라고 하는. 대공령은 왜 저주를 받은 건가요?”

[아아….]

아시카가 말하는 의미를 그제야 이해했다.

[그건 저주가 아니란다. 황족은 스스로 제 생명을 소모한 거야. 내 경고를 어긴 대가로. 그리고 대공령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는데도 공기가 차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아시카는 그의 기분이 조금 상했다는 걸 느꼈다.

[나 역시 살아야 했으니까.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에 갇혀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끌어쓴 것뿐이야. 아마도 계속 갇혀 있었다면 대공령뿐 아니라 제국 전체가 말라 죽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제국을 통째로 몰살시킬 수도 있었다는 말이 진실로 느껴져서 몸서리가 쳐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온 걸까. 어떤 힘이 그토록 견고했던 감옥을 깨트린 것일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신방이 감옥… 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돌아올 반응이 두려워서 아시카의 말끝이 흐려졌다.

[영악한 그 아이는 내 힘이 피에서 피로 이어지는 것을 이미 알았더구나. 그러니 그런 경고를 내렸겠지.]

샤프리에게서 받았던 수첩이 생각났다. 초대 왕이 남긴 경고라고 했던가.

“‘열쇠를 내어주지 말지어다, 나누어 받은 힘을 한 그릇 안에 담지 말지어다’…. 아, 에일린!”

아시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아이가 태어난 동굴 안에서 그가 했던 말의 의미는 그런 것이었다.

「나의 구원자.」

네 개의 혈족에게 이어지는 힘의 근원도 그였고, 결국 그 힘을 거둬간 것도 그였다. 디솔리야의 시선이 요람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아시카는 내내 묻어두었던 질문을 입에 올렸다.

“또 어떤 힘이 남아있는 건가요?”

아시카는 두려웠다. 늙지도 죽지도 않으며 가문의 멸문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겪어야 했던 이븐의 삶이 혹시 제 것이 될까 봐.

[이제 너희에게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아. 나로 인해 틀어진 모든 것들이 제 자리를 찾게 될 거야.]

“그럼 대공령에 번진 전염병은요?”

[그것 또한 나로 인해 생긴 일이니 내가 사라지면 없어질 테지.]

“황족에게 내려진 저주도 말인가요?”

[걱정되는 사람이 있느냐?]

아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의 황제가 건너뛴 병을 나일이 물려받았다. 완치되지 않는 이 병은 시간이 흐르면 결국 나일을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것 또한 마찬가지일 터.]

내내 그림처럼 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디솔리야가 느릿하게 아시카에게 다가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아시카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이는 신비로운 존재는 생각보다 더욱 사람과 같은 모습이었다. 섬세하게 그려진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느른하게 깜박이는 눈동자.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희미한 호기심마저 어려있었다.

불과 한 걸음 앞. 디솔리야는 가만히 멈춰 섰다.

[너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지.]

환각을 통해 느꼈던 두려웠던 마음이 서늘하게 가라앉는다. 아시카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너는 네게 주어진 선택의 순간마다 물러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어.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텐데 포기하지 않았지.]

끈질기게 진실을 좇던 노력이 모두를 이끌었다. 포기하고 은둔해 있던 이들과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이들 모두를.

[고맙구나.]

청보랏빛 눈동자가 곱게 휘었다. 무기질처럼 기이한 빛을 내던 눈동자에서 이 순간만큼은 온기가 느껴졌다.

문득 디솔리야가 고개를 들었다. 상대에게 정신이 팔려있던 아시카는 그제야 방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아시카.”

침실 중간의 문이 벌컥 열리고 드루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디솔리야를 발견하고 다급히 아시카에게 다가왔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손을 끌어당기며 앞을 가로막았다.

“르쉬아.”

저는 괜찮다고, 표정으로 말을 했지만 드루쉬아의 신경은 바짝 곤두섰다.

아시카는 보지 못했지만 드루쉬아는 보았다. 눈앞의 존재가 얼마나 잔인하게 사람들을 몰살해버렸는지.

일말의 동요도 없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모습은 가히 충격이었다. 그것이 결국 저를 도왔다 해도 본능적인 공포는 지워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속이 빤히 보이는 행동에 디솔리야는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드루쉬아의 손은 아시카의 손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그의 불안을 느끼고 아시카는 나머지 손으로 커다란 손을 감싸 다독였다.

“당신은….”

드루쉬아는 디솔리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누구입니까? 혹은 무엇입니까?”

가문에 남아있는 기록 속에서 그는 신적이고 우호적인 어떤 것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디솔리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생각보다 훨씬 더 잔인했으며 또한 생각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청보랏빛 눈동자가 느리게 깜박였다.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나도 그걸 몰라서 오래도록 헤매었지.]

기대와 다른 대답에 드루쉬아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썩 믿음이 가는 대답도 아니었다.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손을 가만히 당겼다. 좀 진정하라는 의미였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동족을 찾으려고 해.]

“동족이요?”

아시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와 같은 힘을 지닌 또 다른 누군가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 땅 어딘가에서 내 동족의 자취가 느껴져.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이질적인 어떤 것이.]

“…찾으면요?”

디솔리야는 시선을 들어 창밖을 돌아보았다. 흐린 밤하늘은 빛 한점 없는 새카만 어둠 그대로였다.

[물어보려고. 왜 우리를 잃어버렸는지.]

“아….”

아시카는 그가 말하는 바를 이해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어조였으나 디솔리야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지막 인사는 없었다. 디솔리야는 자신이 시작되었던 그곳처럼 새카만 어둠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걸음마다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는 은회색의 빛무리가 공간을 휘돌다가 끝내는 본래의 형체를 삼켜버렸다.

디솔리야는 기이했던 첫 만남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아시카는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 별일 없는 거야?”

디솔리야가 사라진 뒤에야 드루쉬아는 안도의 숨을 토했다.

늦은 시간까지 집무실에 있다가 침실에 돌아온 참이었다. 비어있는 침대를 보고 왈칵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혹시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을까 해서.

“난 괜찮아. 그냥.”

땀이 배어난 아시카의 얼굴을 드루쉬아의 손끝이 가만히 쓸어올렸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는 건가?”

아시카는 아직 마지막 신석이 깨어진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감추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꿈이었기 때문이다.

“꿈을… 꾸었어.”

“무서운 꿈이었어? 그래서 그래?”

아시카는 입술을 말아 물며 고개를 저었다.

열려있는 문 너머에서 습한 바람이 흘러들어온다. 잔잔하게 부는 바람과 요람에 잠든 아기의 평화로운 숨소리.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드루쉬아의 눈동자가 선명했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긴 시간을 돌고 돌아 마침내 그녀가 손에 쥔 평화.

그에게 숨길 것은 없었다. 이제야 이해되는 마지막 꿈속의 이야기도.

“차고 슬픈 꿈이었던 것 같아. 내가 있던 그곳은 끝도 없는 어둠뿐인 곳이었어.”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며 조용조용 이야기를 시작했다. 드루쉬아는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 *

입에서 새어 나온 숨이 하얀 연기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처음 느낀 감각은 한기였고,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것은 청보랏빛이 아름다운 네 쌍의 눈동자였다.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그를 내려다보는 네 명의 아이들의 눈동자.

[눈 떴다.]

[이게 마지막이지?]

[응, 이제 비었어.]

한 아이가 기묘하게 생긴 투명한 무언가를 허공에 던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주위를 에워싼 투명한 장막을 통과해 어둠 속 어디론가 흘러갔다.

의문은 들지 않았다. 처음 받아들이는 정보에 의문을 품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기에.

[너무 가까이 가지 마. 놀라잖아.]

[아냐, 뭐가 뭔지도 모를 거야. 나도 그랬어.]

아이들이 주고받는 말을 그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이해되지 않는 그런 이상한 기분.

꼭 같은 청보랏빛 눈동자를 지닌 네 명의 아이는 머리칼까지 모두 같은 색이었다. 눈이 시릴 만큼 창백한 백금색의 머리칼이 허공에서 물결친다.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겨 잠시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들이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다가 그에게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기억나는 거 있어? 뭐라도 좋아.]

[이름은?]

그는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질문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이름? 기억?]

[아아, 이번에도 아닌가 봐.]

기대감에 가득 찼던 아이는 슬며시 고개를 뒤로 물렸다.

[괜찮아. 이럴 줄 알았잖아.]

[그래, 뭐 그렇지.]

꼭 닮은 아이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주고받으며 이제 막 깨어난 마지막 아이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는 아이들이 무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아 처음으로 질문을 입에 올렸다.

[…왜?]

[여긴 너무 추워. 혼자 있으면 안 돼.]

넌 처음이라 더 힘들 거야, 라고 중얼거리며 아이들이 서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를 중심으로 모여든 아이들은 작은 둥지를 만들어 서로의 어깨를 기댔다.

그 너머에는 어둠이 있었다. 끝도 없는 어둠이.

그 어둠은 다행히 경계 너머에 있었다. 투명한 막이 어둠과 경계를 만들며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것을 잡으려고 하자 아이 하나가 그의 손을 잡아 끌어내렸다.

[위험해. 하지 마.]

[왜?]

[장막 밖으로 나가면 죽어. 숨 막혀 죽거나, 얼어 죽거나.]

[누가 죽었어?]

그의 질문에 아이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무도 안 죽었어. 그건 그냥 아는 거야.]

[그럼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도 알아?]

그의 질문에 아이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시무룩하게 쳐지는 어깨에서 긴 시간 기다려온 아이들의 실망이 느껴졌다.

[그럼 여기 있으면 계속 살 수 있어?]

[그건….]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명에게 모였다. 아까부터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아이였다. 네 명의 아이 중 가장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것이 제 형제의 힘이라는 것을. 텅 비어있는 광막한 어둠 속에서 아이들이 살기 위해 태울 것이라고는 스스로의 생명밖에 없다는 것을.

아이들은 자신들이 무언가 잃어버렸다는 걸 알았다.

그들 모두 자신들의 기억 속에서 공백을 느꼈다. 있어야 할 무언가가 사라진 자리, 혹은 채워져야 할 무언가가 미처 자리 잡지 못하고 소멸해버린 것을.

하나씩 형제가 태어날 때마다 그 자그마한 흔적이라도 건져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끝끝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섯 명의 아이가 머무는 공간을 유지하는 건 꽤 힘들어 보였다. 그는 형제를 돕고 싶었다. 순번을 정하던 아이들은 그가 돕겠다고 나서자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렸다.

[쟤는 빛이 너무 약하지 않아?]

[괜히 나섰다가 금세 꺼져버리면 어떻게 해.]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지?]

형제들은 그렇게 저희끼리 결론을 내리고 다시 그에게 다가왔다.

[넌 아무것도 하지 마. 제일 약한 주제에 괜히 힘만 빼잖아.]

[아…, 그래….]

단호한 결론에 그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온전한 기억을 품은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랬기에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숨 쉴 공간을 유지하고 살아있는 것이 전부였다.

아이들은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둥지를 만들었고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 생명을 이어갔다.

그러나 스스로의 생명을 태워 유지하는 공간은 무한하지 않았다.

첫 번째 아이가 빛을 잃고 사라져갈 때 아이들은 슬퍼했다. 처음으로 제 형제의 죽음을 마주하고 슬픔을 느꼈지만 눈물을 흘리는 아이는 없었다. 그것 또한 배우지 못한 것 중 하나였다.

두 번째 아이가 또다시 연기처럼 스러져갔다. 형제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는 마지막 흔적처럼 작은 보석 하나만이 남았다.

형제의 눈동자를 꼭 닮은 청보랏빛의 보석은 한 개에서 두 개로, 두 개에서 세 개로 그렇게 늘어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아이들은 광막한 어둠 속을 흘러가고 있었다. 방향도 목적지도 없는 유영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둘 뿐이었다. 그의 형제는 소중하게 품고 있던 형제들의 흔적을 그에게 넘기며 손등을 토닥였다.

[네가 마지막이야. 이제 이걸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건 너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형제는 이미 희미하게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형제가 건네는 그것을 받고 싶지 않기도 했고, 너무 소중해서 품에 꼭 안아주고 싶기도 했다.

말 없는 그를 향해 형제는 재차 손을 토닥였다.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뭔가를 잃었다는 걸 알아. 그걸 네가 찾기를 바라.]

[나 혼자서?]

[넌 혼자가 아니야.]

[혼자 남는데 어떻게 혼자가 아니야?]

그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형제는 사라져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마지막 태어난 아이가 염려되었다. 잠시 고민하더니 빙그레 미소지었다.

[이름을 줄게. 네가 혼자가 아닌 모두라는 걸 알 수 있도록.]

무얼 하려는지 아이는 한참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빛이 잦아들어 거의 꺼져갈 무렵에야 고개를 들어 눈을 반짝였다.

아이가 입을 열었을 때 기묘한 발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쉽사리 알아듣기 어려운 음성이었다.

[디…, 디에…. 뭐라는 거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지 않아? 아니다, 너는 못 봤겠구나. 네가 태어나기 전에 빛무리가 가득한 공간을 지나왔거든. 거기서 들었어.]

누군가 그들을 부르는 소리 같기도 했고 누군가의 이름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어둠 속으로 흘러든 아이들은 다시는 그 음성을 듣지 못했다.

아이가 다시 내뱉는 발음을 그는 주의 깊게 들었다.

[디…, 디솔… 리야. 아, 디솔리야.]

[음, 그렇게 들리는 것도 같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아이는 대략 수긍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살아남는다면 너는 하나가 아닌 다섯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너의 이름 디솔리야는 우리 다섯의 이름인 거고, 넌 혼자가 아닌 거야.]

이상한 논리였다. 하지만 그는, 디솔리야는 다정한 형제의 설득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저를 위해 뭔가 하나라도 더 남겨주고자 애쓰는 형제였다. 그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기억 속에 담아두고 싶었다.

디솔리야는 다정한 이름을 선물 받고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그가 있는 공간은 여전히 어둠 속이었다. 어째서 이곳에 흘러들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끝없이 떠돌던 시간. 그를 에워싼 장막의 빛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장막 너머의 시린 한기가 조금씩 스며들고 가끔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힘이 약해지는 만큼 그가 머물고 있는 공간도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제 그의 시간도 끝나간다는 걸 느꼈다. 머지않아 자신도 형제들처럼 스러질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변이 찾아들었다.

[저게 뭐야?]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온몸에 전율이 일 만큼 강렬한 충격을 느꼈다.

그를 끌어당기는 강한 인력. 거기에는 여태껏 보지 못했던 진짜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새카만 동공이.

검은 동공이 모든 것을 산산이 조각내 집어삼키고 있었다. 요동치는 대지와 천지사방에 넘쳐흐르는 붉은 화염, 파랗게 빛나던 대기까지. 광막한 어둠 한가운데 벌어진 이변은 경이롭고 아름다우면서도 위험한 무엇이었다.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그곳으로 그도 휩쓸려가고 있었다. 끌려가지 않기 위해 버티는 것도 소용없었다. 소용돌이에 휩쓸려가는 검은 달의 조각들과 함께 그의 시야도 새카맣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끝도 없는 어둠, 어둠.

정신을 차렸을 때 그가 있는 곳은 메마른 땅 위였다.메마른 먼지바람이 불어오는 뜨거운 대지. 맨살에 닿는 뜨거운 감각은 고통이었다.

디솔리야는 처음으로 갈증이라는 걸 느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도.

그래서 고통뿐인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았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제 형제들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스러질 수 있으리란 생각에.

그곳에서 그는 고향을 잃은 여행자들을 만났다.

“세상에, 너 여기서 뭐 하는 거니?”

“사막 한복판에 누가 아이를 버리고 갔어?”

처음 다가온 사람은 귀하디귀한 물주머니를 선뜻 그에게 건네주었다. 홀로 남은 그에게 건네진 작은 온정의 손길.

그것이 긴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믐달의 초대 Fin.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