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드루쉬아는 기사에게 밖을 살피도록 지시한 뒤 아시카가 있는 안쪽으로 들어왔다. 잔느가 반사적으로 아시카의 앞을 가리며 드루쉬아를 보았다.
“공작님.”
“왜? 무슨 일이야?”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드루쉬아의 표정도 덩달아 굳어졌다. 아시카는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조차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두려운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잔느의 목소리마저 떨려온다.
“…양수가 터졌습니다.”
“무슨… 말이지?”
잔느가 하는 말이 이해되지 않아서 드루쉬아는 바보처럼 되물었다. 잔느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표정을 수습했다.
“아이가 언제 태어날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지금?”
드루쉬아는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시카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밀랍처럼 굳어버렸다. 이제 겨우 일곱 달 남짓이다. 공작성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해도 위험한 상황인데 하물며 여기는 의원도 산파도 없는 숲속 한가운데였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드루쉬아의 말끝이 힘을 잃었다. 아직 산달이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그런 아이가 지금 태어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드루쉬아는 뒤늦게 이해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충격은 잠시뿐, 잔느는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렸다.
“가능하게 만들어야지요.”
잔느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바닥에 깔았다.
“다른 기사들의 망토도 가져다주세요. 불을 피워야 합니다. 마른 장작도 구해주시고요.”
“지금… 여기서?”
아시카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내어 물었다.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 당사자인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건 어떤가?”
하다못해 호수가 있는 근처까지만이라도 간다면 나을 것 같았다. 드루쉬아는 흙먼지가 가득한 비좁은 내부를 보고 암담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잔느의 태도는 단호했다.
“여기서 더 도망치는 것보다는 이미 지나간 자리에 숨는 편이 낫습니다.”
더 움직였다가는 산모와 아이의 목숨 둘 다 장담하기 어렵다. 잔느는 아시카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고 망토를 깔아둔 바닥으로 이끌었다.
“진통은 없었습니까?”
“아팠어. 아까부터….”
별장을 나온 뒤부터 통증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아프다고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진작 말씀을 해주셨어야…. 아니, 이제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질 겁니다. 더는 움직일 수 없어요.”
아시카의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졌다. 결국 저 때문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은신처가 언제 발각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 자리를 떠날 수도 없게 되었다.
드루쉬아는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난생처음 겪는 위험이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베르트 경, 할 수 있겠나?”
“산파 노릇을 해본 적은 없지만, 아이를 둘이나 낳았습니다.”
적어도 여기 있는 미혼의 남자 기사들보다야 나을 터였다.
“그래. 할 수 있어야지. 그래야지.”
드루쉬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순간만큼은 잔느가 구명줄처럼 느껴졌다. 아시카와 배 속의 아이를 구해줄 유일한 구명줄.
“달리 준비할 건 없나?”
“물이 있어야 하는데….”
구할 방법이 없었다. 가지고 있는 도구라고 해봐야 기사들이 들고 다니는 수통이 전부였고 메마른 숲에서 물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입구를 단단히 지켜주십시오.”
이 일대에 깔려있는 적들이 언제 은신처를 찾아낼지 모른다. 목전에 닥친 위협이 안에서 밖에서 숨통을 죄어왔다.
아시카는 바닥에 웅크려 앉은 채 입술을 사리물었다.
“진통을 참지 마세요. 아프면 아프다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잔느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웠다. 마치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그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에 진작부터 참고 있던 통증이 와락 몰려들었다.
아시카는 진땀을 흘리며 간신히 입을 벌렸다. 할딱거리는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아파… 너무 아파…. 너무….”
울고 싶을 만큼 아팠다. 배를 움켜쥔 채 웅크린 아시카를 보며 드루쉬아는 안절부절못했다. 잔느를 제치고 제가 안아주고 싶은데 또 그래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들었다.
“주기적으로 통증이 올 겁니다. 간격이 짧아질수록 출산이 임박한 겁니다.”
이게 정상이라고. 잔느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거짓말 같은 위로를 건넸다. 그러나 위로가 무색하게도 짙은 피비린내가 확 풍겼다.
“베르트 경.”
드루쉬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아시카가 앉아있는 바닥에서 망토가 붉게 물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공작님, 자리를 비켜주십시오. 여기 계셔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말을 잔느는 가감 없이 쏟아냈다.
드루쉬아는 바닥에 스며든 피와 아시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뭔가 말하고 싶지만 저보다 더 겁에 질려있는 아시카를 두렵게 만들까 봐 차마 꺼내지 못했다.
“공작님.”
잔느의 목소리가 재차 채근했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은 각자 할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할 때였다. 드루쉬아는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 끝내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사납게 요동치던 바람이 잦아들었다. 멀리서 타고 있는 불길도 더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화재 현장에서 흘러드는 매캐한 연기가 느린 공기의 흐름을 따라 연무처럼 사위에 깔렸다.
숲조차 숨을 죽이는 느낌이었다. 얼마 전까지 돌풍에 난장을 치던 것이 거짓말인 양 느껴졌다.
드루쉬아와 기사들 모두 바위틈에 숨어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두운 숲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기이한 침묵 속에 숨을 죽였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긴 긴 밤이었다. 서로의 숨소리가 매 순간순간의 시간을 단절하며 잡아 늘이는 것처럼.
모두의 바람은 하나였다. 부디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를. 이 밤과 함께 목전에 닥친 위협도 어서 빨리 사라지기를.
드루쉬아의 신경은 밖이 아니라 안쪽으로 향해 있었다. 비명조차 맘껏 지르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계속되고 있는 곳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이 이토록 피를 말리고 심장을 쥐어뜯는 고통일 줄은 몰랐다. 간간이 들리는 잔느의 목소리가 평정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공작님.”
펄번이 한껏 낮춘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안쪽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드루쉬아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바스락거리며 숲을 헤치는 움직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타다닥, 탁, 가벼운 발소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준비해.”
드루쉬아의 지시에 기사들이 검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얼마 뒤 어둠 속에서 커다란 검은 형체가 후두둑 튀어나왔다. 늑대의 무리였다.
이대로 모른 척 지나가기를 기도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가장 앞선 우두머리가 사람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이빨을 드러냈다. 우두머리의 신호에 나머지 늑대들이 몸을 바짝 낮추며 바위 근처로 다가왔다.
으르렁거리는 위협적인 울음소리가 고요한 숲속에서 선명하게 들려온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늑대들은 더욱 사납게 털을 곤두세웠다. 사람의 기척뿐 아니라 피비린내까지 맡은 탓이다.
한 마리가 바위틈 쪽으로 뛰어드는 순간 드루쉬아가 단검을 날렸다.
캥.
정확히 목덜미에 단검을 맞고 늑대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동시에 나머지 무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시간 끌지 마라!”
드루쉬아의 지시에 펄번과 기사들이 밖으로 나와 늑대들과 맞붙었다.
훈련된 최정예 기사들과 늑대의 무리는 싸움이 되지 않았다. 단칼에 목이 베이고 다리가 잘리며 늑대의 수는 순식간에 반으로 줄었다.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까지 늑대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동료를 잃은 늑대들은 뒤늦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한 마리가 숲으로 뛰어들자 나머지가 꼬리를 말고 뒤를 이었다.
기사들이 검을 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드루쉬아의 손짓에 펄번이 늑대의 사체를 잡아 인근 풀숲으로 밀어 넣었다.
“혈흔은 어쩔까요?”
“티 나지 않게 지워야지. 곧 동이 틀 것 같아.”
시간은 어느덧 새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새카만 지평선 언저리에 희미한 빛이 새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안도하는 것도 잠시뿐.
쇄에에엑. 타다닥, 타닥.
숨 돌릴 틈도 없이 어둠 속에서 눈먼 화살이 날아들었다.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를 화살들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른다.
“제기랄!”
늑대가 피 냄새를 맡고 온 것이 화근이었다. 고요한 숲에서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린 것이다. 대체 이 숲에 얼마나 많은 적들이 깔려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상대가 정비할 틈을 주지 마라!”
드루쉬아 일행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이쪽은 개인전에 능한 최정예 기사들. 방어진을 만드는 것보다 적들이 모이기 전에 치고 나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드루쉬아가 어둠 속으로 뛰어들며 검을 휘둘렀다. 숲의 그림자만큼이나 새카만 인영이 검을 맞받아치는 동시에 튕겨 나갔다. 순식간에 가장 앞쪽에서 달려들던 자객 서넛이 기사들의 검에 베여 쓰러졌다.
한꺼번에 달려들던 이들이 주춤하며 멈췄다. 나무가 많은 숲이라 저희가 불리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지원을 불러!”
“어딜!”
“아악!”
화살에 불을 붙이려던 적은 드루쉬아의 검에 팔이 잘려나갔다. 호선을 그리며 되돌아온 검날은 비명을 지르는 상태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빼곡한 나무기둥이 시야를 가로막아 적들은 드루쉬아 일행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깊이 들어가지 마라! 치고 빠져!”
펄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드루쉬아가 소리쳤다.
“공작님, 북쪽을 보십시오!”
기사들 중 하나가 다급히 소리쳤다. 빼곡한 나무숲 사이로 환한 빛이 아른거리는가 싶더니 단숨에 허공을 가르고 날아들었다.
“이런, 미친놈들!”
“물러나!”
적들은 거침없이 불화살을 날렸다. 마른 나무에 불이 붙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불보다 더 짙은 연기가 매캐하게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산 전체를 태워서라도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악의가 느껴졌다.
“콜록… 공작님.”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드루쉬아의 신호에 펄번과 기사들이 절벽이 있는 방향으로 빠져나왔다. 바로 뒤 바위틈 안쪽에는 아시카가 있었다.
드루쉬아는 검을 틀어쥐며 입구를 막아섰다. 가만히 있으면 불길은 점점 더 크게 번질 것이고 출산 중인 아시카는 이 자리를 피해 달아날 수도 없을 터였다.
‘이럴 수는 없어.’
두려움보다 분노가 치밀었다. 죽음보다 더한 절망을 경험했고 끝내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 모든 고통을 겪고서야 간신히 얻어낸 기회인데, 저주받을 마이헬러 후작은 그것조차 빼앗아가려 한다.
“진작에 죽였어야 했어.”
온몸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살기에 숨이 턱 막혀온다. 죽여 없애야 할 것은 마이헬러 후작인데, 억울하고 분해서 제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황제의 손에 넘기는 것이 아니었다. 차일피일 처벌이 미뤄지는 것을 보면서 기다릴 게 아니라 직접 손을 썼어야 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지독하고 집요하게 두 사람을 쫓을 줄은 몰랐다.
매캐한 연기를 가르며 숲에서 적들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가까이 불이 번지고 있는데 두렵지도 않은지 상대는 거침없이 다가왔다.
그 뒤로 절뚝이며 나타난 사내가 드루쉬아를 발견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네놈들이 도망쳐 봤자지.”
놀랍게도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아는 얼굴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자객들이 채 모이기도 전이었다. 드루쉬아는 상대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검을 틀어쥐고 단숨에 튀어 나갔다.
“공작님!”
속속들이 모여드는 자객들 한가운데로 드루쉬아는 홀로 달려들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겨냥해서.
“어억!”
“후작님!”
자신의 안위를 포기하고 달려든 일격이었다. 펄번과 기사들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자객들의 무리로 뛰어들었다. 드루쉬아에게 날아드는 검을 단숨에 쳐내면서 그를 에워쌌다.
“컥.”
후작은 제 심장에 박힌 검을 보며 황망한 눈을 크게 떴다. 드루쉬아는 이를 사리물며 시린 분노를 토해냈다.
“너만 죽으면 끝나.”
설령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면 아시카와 아이는 안전해질 테니까.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울컥 토해내는 것은 분명 붉은 피였다.
“크큭….”
고통으로 일그러진 줄 알았던 얼굴이 기괴하게 웃는다.
“이게 무슨….”
분명 검 끝이 마이헬러 후작의 심장을 꿰뚫었다. 솟구치는 피가 드루쉬아의 옷을 적실만큼 깊게.
그러나 후작은 웃고 있었다. 울컥울컥 피를 토해내면서도 천천히 손을 들어 제 심장을 꿰뚫은 검을 쥐었다. 펄번과 기사들뿐 아니라 검은 옷을 입은 자객들조차 충격을 받아 얼어붙었다.
“나는 죽지 않아. 죽지 않는다고!”
후작은 실성한 사람처럼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새삼 확인한 제 몸의 능력이 놀라워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이헬러 후작이 황궁에 손을 뻗친 것은 한두 해의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오랜 세월 쌓아온 기반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도주뿐이었다. 그 사실에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데 저를 죽이겠다고 달려든 드루쉬아의 검이 이토록 허망하게 길을 잃었다. 후작의 지위를 잃어버린 것도 아쉽지 않을 만큼 통쾌했다.
드루쉬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후작을 발로 걷어차면서 검을 회수하는 순간 가까이 있던 자객들도 정신이 들었다.
“큭.”
심장에 검을 맞고도 죽지 않았던 후작은 드루쉬아의 발길질에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후작님을 보호해!”
대여섯 명이던 자객의 수는 어느새 열 명이 넘게 늘어나 있었다. 그리고 숲 너머에서 속속들이 모여드는 적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물러나라!”
“죽여라! 모조리 죽여!”
드루쉬아가 물러나는 순간 마이헬러 후작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드루쉬아와 기사들은 서로를 등지고 달려드는 자객들의 검을 맞받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