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50화 (150/153)

#150.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 멀리 산등성에서 융단처럼 퍼져나가는 시뻘건 불길이 확연히 보였다. 드루쉬아의 눈앞도 뻘겋게 물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산 아래 숲이 끝나는 곳에 모인 사람은 열 명 남짓. 모두 별장에서 일하던 사용인들이었다.

“아시카는? 공작부인은 어딨나!”

왜 피신 온 사람 중에 아시카가 보이지 않는지, 드루쉬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불길을 피해 도망온 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엉망이었다. 집사를 비롯한 몇몇 사람은 연기를 마시고 의식을 잃었고 다친 사람도 있었다.

순식간에 몰아닥친 불길로 소지품 하나 챙겨 들지 못하고 허겁지겁 도망 나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공작님. 저희는 밖에 있었던 터라.”

“공작부인께서는 기사들과 함께 별장 안에 계셨습니다.”

“그럼 별장에서 나온 사람은?”

모두 고개를 떨구며 시선을 피했다. 선뜻 나서는 이가 없는 가운데 숲 언저리에서 뛰어나오는 사람이 보였다.

“공작님!”

펄번이었다. 화상을 입었는지 한쪽 팔은 검게 그을렸고 얼굴도 검은 먼지투성이였다.

“아시카는? 다른 기사들은 어딨지?”

“불이 급격히 번지면서 별장에 있던 인원과 나머지 사람들이 갈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뵀을 때 피신 준비를 하고 있었고 호위 기사들도 모두 함께였습니다.”

펄번은 아시카의 지시대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다시 별장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서 별장 일대는 이미 불바다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산 아래로 내려오는 길이 불길에 막혀서 위쪽으로 피하셨을 겁니다.”

지금 펄번과 함께 있는 기사는 불과 다섯 명이었다. 원래 별장에 따라온 아시카의 호위 인원은 스무 명가량. 지금 보이지 않는 나머지는 모두 함께 있을 가능성이 컸다.

드루쉬아는 붉은 바다가 해일처럼 몰아치는 산등성이로 시선을 옮겼다.

감옥에 심어두었던 사람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 사흘 전이었다. 마이헬러 후작이 병사를 살해하고 사라졌다는 소식에 모든 일을 팽개치고 주둔지를 뛰쳐나왔다.

차라리 마이헬러 후작이 그대로 도주했기를 바랐다. 그러나 만에 하나 또다시 아시카와 저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표적이 되기 쉬운 것은 아시카였다.

지난 사흘 동안 어떻게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기억이 가물거릴 만큼 마음이 다급했다. 그렇게 허겁지겁 달려왔는데 아시카가 보이지 않는다. 심장이 오그라들 만큼 두려웠다.

‘아니, 괜찮아. 괜찮을 거야. 판단이 빠른 사람이니까.’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대범하게 상황을 헤쳐나가는 여자다. 이 정도로 큰일을 당할 사람은 아니었다. 드루쉬아는 덜덜 떨리는 손을 말아쥐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불길이 번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산에서 내려오기보다 불을 피해갔을 겁니다. 갈만한 곳이 있겠습니까?”

펄번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져서 창백했다. 바라보는 것조차 공포스러운 불길이었다. 그 속에서 아시카를 놓치고 홀로 나왔다는 사실에 참담함 마저 느꼈다.

드루쉬아는 펄번을 보다가 문득 기억을 떠올렸다.

“호수….”

“네?”

“호수가 있어.”

어둡게 가라앉았던 푸른 눈동자에 빛이 돌아온다.

“애거나이트가 함께 있었나?”

“네, 제가 지시를 받을 때 잔느와 애거나이트는 소공작님과 함께 움직인다고 들었습니다.”

불길이 어디로 번질지 모르는 상황. 이곳 지리를 잘 아는 애거나이트라면 가장 안전한 호수로 움직였을 것이다.

드루쉬아의 시선이 거센 불길이 몰아치는 산 쪽으로 향했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나와 함께 간다.”

* * *

마음은 조급한데 걸음마다 조심스러웠다. 힘든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써도 숨이 턱까지 차올라 절로 입이 벌어졌다. 숨이 답답한 이유가 힘들어서인지 매캐한 공기 탓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시카는 오로지 앞사람의 걸음만을 쫓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줄줄 흐르는 땀에 얇은 상의가 척척 달라붙는데도 덥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잠시만, 쉬었다 가죠.”

아시카의 상태를 확인한 잔느가 걸음을 멈췄다. 애거나이트와 기사들이 아시카를 둥글게 에워싸며 멈춰 섰다.

“누구 물 가지고 있는 사람 있나?”

애거나이트의 질문에 기사 하나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물통을 내주었다. 애거나이트는 물통을 흔들어 확인하고 뚜껑을 열어 아시카에게 건넸다.

아시카는 멍한 눈을 들어 애거나이트를 보았다. 머릿속이 마비된 것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탈수가 오면 위험합니다. 땀 흘린 만큼 물을 마셔야 합니다.”

“나일은? 뒤따라온 사람은 더 없어?”

기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애거나이트는 굳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적당한 때에 알아서 빠져나갔을 겁니다.”

설령 제때 몸을 피했다 해도 길을 모르는 나일이 뒤따라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시카는 건네받은 물통을 입에 대며 눈을 감았다.

‘당장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제 몸 하나도 운신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짐이 되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 그나마 아시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쉿.”

순간 애거나이트가 손을 들어 신호했다.

거센 바람이 잠시 잦아든 참이었다. 일행이 모여있는 앞쪽으로 수풀이 크게 흔들렸다.

적이라고 하기에는 노골적인 움직임. 얼어붙어 있던 순간 수풀이 갈라지며 시커먼 형체가 튀어나왔다.

“악!”

잔느는 검을 빼 드는 동시에 아시카를 확 밀어내며 방향을 틀었다. 정면에서 거구의 회색곰이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부딪혔다가는 검을 쓰기도 전에 깔려 죽을 판이다.

기사들이 검을 틀어쥐고 바짝 긴장해 있던 찰나, 회색곰은 달려오던 관성 그대로 직진해서 건너편 숲으로 뛰어들었다.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다급히 도망치고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위험이 지나갔다. 기사들은 검을 내리고 얼굴에 흥건하게 배어난 땀을 쓸어냈다.

“괜찮으십니까?”

“하아.”

아시카는 안도의 숨을 토해냈다. 몸에 힘이 쭉 빠져서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동물들조차 사람과 싸우기보다 도주가 급한 상황. 맹수와 싸우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이제부터는 길이 험해집니다.”

“길이 있기는 한 겁니까?”

잔느는 영 미심쩍은 얼굴로 애거나이트를 보았다. 지금껏 헤쳐온 길도 사람이 다닐만한 길은 아니었다.

“저쪽이 약초꾼들이 다니는 길인데 호수까지 가는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애거나이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수풀에서 연결된 꽤 높은 언덕이었다. 가파른 비탈은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만큼 거리가 상당했다.

애거나이트는 아시카를 돌아보았다. 보통 사람에게는 조금 힘든 정도지만 아시카에게는 어떨지 모를 일이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게 업혀 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낙엽과 수풀이 엉겨있는 곳이었다. 자칫 미끄러지면 그대로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도 같았다. 업혀 가다가 중심을 잃으면 그게 더욱 위험하지 않을까.

“나 혼자 갈 수 있어. 그만 가지.”

아시카는 애거나이트의 제안을 거절하고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주저앉아 기절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지만 그저 바람일 뿐. 둔한 움직임에 미아와 잔느가 양쪽에서 팔을 잡아 부축했다.

애거나이트가 먼저 나서서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길을 잡아주기 위함이었다. 기사들과 잔느도 그 뒤를 따랐다.

걷는다기보다는 손과 발을 이용해 기다시피 올라야 하는 가파른 비탈이었다. 드레스 차림으로는 더더욱 쉽지 않았다.

아시카는 발로 지탱하다 안 되겠으면 무릎을 이용하고 그도 안되면 몸을 바싹 기대며 올랐다. 드레스 아래와 다리가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다.

“하아, 하아….”

토벽에 바짝 붙어 있느라 숨을 들이쉴 때마다 흙먼지 냄새가 스며들었다. 암벽이 아니라서 쉬울 줄 알았는데 흙덩어리가 엉겨있는 비탈은 더욱 위험했다. 땅이 메마르고 나무가 없는 탓이다.

아시카는 간신히 숨을 가다듬고 다시 손을 뻗었다. 순간 무심결에 잡은 수풀이 맥없이 뽑혀 나왔다.

“악!”

한껏 힘을 실었던 팔이 튕겨 나오며 몸이 중심을 잃었다. 발밑이 순간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부스러졌다. 미아가 재빨리 아시카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긴장으로 젖어있던 손은 아시카를 잡는 순간 놓치고 말았다.

“아악!”

“소공작님!”

순식간에 몸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다급히 손을 뻗어 뭐라도 잡아보려 했지만 메마른 풀뿌리는 잡히는 대로 뽑혀 나왔다. 비탈길 아래로 이어진 새카만 숲이 괴수의 입처럼 그녀를 빨아당기고 있었다.

아래쪽에 있던 기사가 다급히 손을 내밀었지만 채 닿지 않았다. 급하게 움직이던 이들 몇몇이 발을 헛디뎌 함께 미끄러졌다.

“아시카!”

있을 리 없다고 생각되는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더는 잡을 것이 없어 몸이 뚝 떨어진다고 느끼는 순간 아시카는 눈을 감았다. 동시에 강한 힘이 그녀의 허리를 확 낚아챘다.

“흐윽.”

복부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상대가 있는 힘껏 당겨 안아 아랫배가 부딪힌 탓이다.

머리끈이 뜯겨나가면서 긴 머리칼이 얼굴에 휘감겨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랫배의 통증에 이어 사지가 발작하듯 떨려온다. 저를 잡아준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아시카, 나를 봐. 아시카.”

다급히 채근하는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아시카는 그제야 짙은 땀 냄새와 저만큼이나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의 진동을 느꼈다.

“하아, 하아. …르…쉬아?”

“괜찮으니까 겁먹지 마. 그냥 미끄러진 것뿐이야. 여기서 떨어져도 안 죽어.”

그녀만큼이나 놀라 있으면서도 드루쉬아는 침착하게 아시카를 달랬다.

“흐….”

“일단 내려가자. 내 목에 팔을 두르고 함께 내려가면 돼. 알았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아시카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더욱 위태로웠다.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매단 채 죽죽 미끄러지며 아래로 향했다. 애거나이트를 비롯해 앞서가던 이들 모두 드루쉬아의 목소리를 듣고 방향을 바꿔 아래로 내려왔다.

다시 원점이었다. 일행은 출발했던 그 자리에 다시 모였다.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랫배가 당기는 통증에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시카, 나 좀 봐. 괜찮아?”

“…조금만, 쉬었다가….”

끝끝내 아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드루쉬아의 옷자락을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에서도 그를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애거나이트, 상황 보고해.”

드루쉬아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길을 잘 아는 애거나이트가 어째서 아시카를 데리고 가장 험한 길을 택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공격을 받았습니다.”

“무슨….”

애거나이트의 대답에 드루쉬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예상했던 위험이 목전에 닥쳤다는 사실과 지금 상황이 사고가 아니라는 깨달음.

애거나이트는 차분하게 보고를 이어갔다.

“적의 숫자는 대략 열 명이 못 되었습니다만, 저희를 발견하자마자 신호 화살을 날리는 걸 봤습니다. 그보다 훨씬 많은 수가 이 일대에 포진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급박한 상황이라 아시카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애거나이트와 기사들은 금방 알아차렸다.

“목표는 공작부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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