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49화 (149/153)

#149.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애거나이트는 도저히 손쓸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깨닫고 펄번에게 사람들 인솔을 맡기고 돌아왔다.

망토 자락을 움켜쥔 아시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러 어려움을 겪어봤지만 이런 위협은 처음이었다.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럼 어디로 가려고? 이곳 지리를 알아?”

“강풍이 불어서 불이 번지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지금 바람의 반대 방향으로 간다 해도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순식간에 불길에 갇힐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어디든 피할 곳은 있습니까?”

잔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산불이 났구나 하고 멀리서 구경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화마는 순식간에 코앞까지 닥쳐왔다.

애거나이트 역시 고민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사들 같으면 빠르게 산을 타 넘어 달아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시카는 기사가 아니었고 그냥 걷는 것조차 힘겨운 임산부였다. 급박한 상황이 왔을 때 불이 번지는 속도를 피해 달아날 수가 없었다.

“산 위쪽으로 호수가 있습니다. 가뭄으로 물이 많이 말랐지만 불길이 지나가는 동안 몸을 피할 정도는 됩니다.”

애거나이트의 제안은 희망적인 동시에 암담한 현재 상황을 말해주었다. 아시카를 데리고는 어느 쪽으로 가도 불길을 피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긴장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시카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가지. 내 걸음으로는 한시가 급할 테니까.”

“들것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내 발로 걸을 수 있어.”

“하지만….”

“산을 타야 하잖아. 들것에 싣고 가는 것보다는 여럿이 잡아주는 게 낫지 않겠어?”

몸이 둔해지기는 했지만 아시카는 충분히 제 발로 걸을 힘이 있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 애거나이트도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나일과 나머지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밖으로 나서는 순간 아시카는 경악했다.

별장이 있는 숲 아래쪽으로 시뻘건 불길이 넘실거렸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불길이 메마른 먹잇감을 찾아 빠르게 사방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세상에….”

초조하게 기다리던 기사들이 아시카의 주위를 에워쌌다.

“불길이 산허리를 잘랐습니다. 앞쪽으로는 갈 수 없고 뒷길로 가야 합니다.”

“호수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길을 압니다.”

탈리온 영지 출신의 기사 중 하나였다.

놀라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아시카는 손수건으로 입을 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찔러 속이 울렁거리고 휘몰아치는 강풍에서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호수까지만 가면 됩니다. 규모가 상당해서 거기까지는 영향받지 않을 겁니다.”

애거나이트가 비틀거리는 아시카를 잡아주며 말을 건넸다.

“그래…, 하아. 내 몸이 조금만 더 가벼웠어도.”

짧은 몇 마디 말을 뱉는 것조차 힘겨웠다. 제 몸의 부피감에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걷다가 힘드시면 업어드리겠습니다.”

애거나이트의 진중한 어조에 아시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배가 짓눌리는 상상만 해도 아득하다. 아시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일단은…, 가지.”

닥치면 그때 가서 고민해도 된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서 당장은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주위를 에워싼 기사들과 함께 아시카는 빠르게 별장을 벗어났다.

시뻘건 불길을 투영한 붉은 연무가 피어올랐다. 터져 나온 불티도 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새카만 어둠 속에 흘러든 불티가 반딧불의 무리처럼 하늘로 날아오른다. 무섭게 몰아치는 불길만 아니라면 아름답게 느꼈을지도 모를 만큼 빛을 내면서.

매캐한 연기와 뜨거운 열기가 바람을 타고 사위를 잠식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멀리서 구경하던 불길이 등 뒤로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붉은 해일처럼 몰아치는 불길에 아시카는 난생처음 오금이 저릴 만큼 두려움을 느꼈다.

앞서가던 나일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계속 걸을 수 있겠어요?”

“난 괜찮아. 멈추지 말고 계속 가.”

숨돌릴 겨를도 없었다. 너무 무서워서 힘들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근데 맞게 가는 건가? 별장 근처의 호수면 이 길이 아니잖아.”

아시카가 무심코 던진 얘기에 애거나이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여기 호수를 가본 적이 있습니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별장이라 호수에도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시카가 길을 안다는 것이 이상했다.

“아. 아니. 비슷한 지형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

아시카는 제 말실수를 깨달았다. 가본 적은 있지만 이곳에서의 기억은 아니었다. 상황이 급박한 터라 애거나이트는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차로 가는 큰길은 한참 돌아야 해서 지름길로 가는 중입니다.”

숲을 잠식한 열기 탓에 얼굴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아시카는 흥건하게 젖은 얼굴을 쓸며 숨을 몰아쉬었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을까?”

“이곳 지리를 잘 아는 사람들이라 알아서 피했을 거예요. 아까 콜테른 경이 말을 풀어놓고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걸 봤어요.”

미아의 얼굴도 땀으로 엉망이 되었다. 불길이 산허리를 덮치기 직전이었으니까 아마도 무사할 거라고, 그리 믿었다.

“호수까지 멀지 않습니다. 이대로 샛길을 따라 삼십여 분 정도만 더 가면….”

“쉿.”

앞쪽에 있던 나일이 손을 들어 신호했다. 순간 애거나이트와 잔느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왜….”

아시카가 고개를 드는 순간 미아가 앞을 막아섰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쇳소리가 날아들었다.

“기습이다!”

“뒤로 빠져. 나무 뒤로!”

나일의 외침에 잔느는 아시카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예의를 차릴 겨를도 없었다.

타다닥, 화살이 발밑에 날아와 박혔다. 뒤로 물러나려 하자 등 뒤에서도 연신 화살이 날아들었다. 진로를 막는 동시에 검은 인영이 숲에서 튀어나왔다.

“찾았습니다!”

새카만 옷을 입은 자객들이 주위를 에워싼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아시카는 잔느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전투가 벌어진 현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 본 적 있는 모습이 똑같이 재현되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자객들과 그에 맞서 싸우는 기사들의 모습이.

“…다시 또….”

끝난 줄로만 알았던 악몽이 끝이 아니었다. 잔느의 손에 끌려가다시피 하면서도 아시카는 망연히 넋을 놓고 말았다.

“소공작님, 정신 차려요!”

잔느의 외침과 검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파열음. 나일은 머뭇거리는 아시카를 발견하고 애거나이트에게 소리쳤다.

“아시카를 데려가! 어서!”

자객의 수는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나일과 기사들이 막고 있는 동안 피할 시간은 충분했다. 애거나이트는 검을 거두고 아시카가 있는 뒤쪽으로 달려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아시카의 허리를 한 팔로 감아 들다시피 부축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시카는 뒤늦게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나일은? 나일은 어쩌려고!”

“제 몸 하나 지킬 능력은 되는 분입니다. 공작부인이 계시면 오히려 방해만 돼요. 시간을 벌어줄 때 빠지는 게 돕는 겁니다.”

“차라리 같이 싸우고 같이 움직여. 그래도 되잖아!”

“뒤쪽에 있는 놈들이 신호 화살을 쏴 올리는 걸 봤습니다. 곧 지원병력이 더 올 겁니다. 그러면 도망치기도 어렵습니다.”

아시카의 외침을 애거나이트는 단칼에 잘랐다. 그가 옳았다. 자객들의 수가 저게 다일 리 없었다.

애거나이트는 거의 끌다시피 아시카를 부축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시카는 아찔해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불이 저절로 난 게 아니야.’

기회를 노린 것이다. 너구리 굴에 연기를 피우듯 강풍이 부는 날 불을 질러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었다.

‘내가 안일했어.’

뼈저린 후회가 들었다. 이제 더 이상 위험한 일은 없을 거라고, 너무 빨리 마음을 놓아버렸다. 후작이 아직 살아있다는 걸 알면서도 지난 몇 달 동안 평화에 익숙해져 버렸다.

‘분명 감옥에 갇힌 것까지 확인했는데. 후작이 혼자가 아니었을까.’

마이헬러 후작가는 멸문했다. 그러니 제국 내에서 그를 도울 귀족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잘못된 판단이었을까.

닥쳐오는 위협이 지나치게 거대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시카는 기절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나일을 돕던 기사 중 몇 명이 애거나이트의 뒤를 따라왔다. 열 명 남짓 되던 기사들이 다시 반으로 쪼개진 셈이다. 한참을 걷던 애거나이트가 걸음을 멈추고 사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길로 가야 합니다.”

원래 가려던 길은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다. 설령 호수까지 간다 해도 안전을 보장하기는 어려운 상황. 산 아래에서부터는 불길이 치솟고 앞쪽에서는 언제 어디서 자객들이 공격해올지 모른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사냥꾼들의 오두막 같은 건 없습니까?”

잔느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지금 상황이 암담하다는 걸 모두가 알아차리고 있었다.

“있긴 하지만 불길이 덮치면 끝장이야.”

산불이 어디까지 번질지 언제 진정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은신처에 숨었다가 화마가 덮쳐오면 몰살당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시카는 애거나이트의 팔을 밀어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랫배가 돌덩이처럼 뭉쳐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렇다고 힘들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사달이 일어난 것이 저 때문이라는 걸 알기에.

“마님께서 계속 걷는 건 무리예요. 안 든지 업든지 달리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미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시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마님, 힘들면 힘들다고 말씀해주세요. 저희가 방법을 찾아볼게요.”

“하….”

웃을 때가 아닌데 웃음이 났다. 한참 어리게만 보였던 미아가 저를 지키고자 애쓰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아직 내 힘으로 걸을 수 있어. 조금만, 하…. 조금만 숨 좀 돌리고.”

아시카는 뻐근한 아랫배를 감싸 안으며 긴 숨을 토했다. 이 악몽 같은 밤이 빨리 지나가기를, 더는 두려움에 쫓기지 않아도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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