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미아가 원래 대공령 출신이었다죠?”
“아, 맞아요.”
탈리온의 기사들 중에 대공령 출신이 섞여 있다는 걸 알고 아시카도 무척 놀랐더랬다. 개중에는 자신의 가문을 기억하는 이도 있었고 미아처럼 부모가 대공령에서 도망쳐 나와 아예 모르고 자란 경우도 있었다.
그 과정에 이븐이 개입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최근이었다. 비록 전면에 나서지는 못했어도 이븐은 대공령의 명맥을 이어오기 위해 노력해왔다. 덕분에 대공령 출신 기사 가문의 명맥이 끊기지 않게 되었다.
그들 모두는 탈리온 기사단에서 사망자로 처리되었고 대공령으로 돌아가 가문을 돌려받고 새로운 대공으로부터 기사 서임을 받았다.
“대공령은 회복될 거예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긴 세월 동안 이븐이 포기하지 않았던 덕이다.
“그럼 미아는 대공령으로 가게 되는 건가요?”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요. 나야 미아가 남았으면 좋겠지만 내 욕심이죠.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작위를 잇고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는 책임이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말끝이 늘어지는 것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나일은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사이 자리를 떠났던 집사가 다가왔다.
“저, 마님. 잠시 말씀 좀 여쭤도 되겠습니까?”
“왜? 무슨 일이지?”
“마을에서 배달오던 짐 마차가 사고가 난 모양입니다.”
아시카는 그제야 별장 주위가 어수선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키 작은 정원수 너머 호위 기사들이 별장의 입구로 모여들었다.
“저기 지금 들어오는 사람 말인가?”
정문 밖에는 피에 흠뻑 젖은 사람이 동료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서 있었다. 허락 없이는 들어올 수 없기에 기사들이 막아선 탓이다.
정문에서 뭔가 얘기를 나누던 하인이 아시카에게 달려왔다.
“어떻게 된 일이야? 다친 사람은 뭐고?”
“마님. 이를 어쩝니까. 짐 마차가 산비탈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짐꾼이 다쳤답니다. 혹시 주치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도 부상이 작지 않아 보였다. 애거나이트도 난감한지 선뜻 나서지 못하고 아시카의 결정을 기다렸다.
아시카는 기사들에게 손짓해 지시를 내렸다.
“환자를 별채로 옮기고, 주치의를 불러오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애거나이트였다.
“거기, 들것을 가져와.”
정문이 열리고 하인들을 재촉해 환자를 안으로 들였다. 별채에는 따로 경비 인원을 배치하고 주치의와 환자를 돕기 위해 나선 하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부상자가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뒤 함께 온 동료가 기사들과 얘기하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아시카와 얘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애거나이트가 앞을 가로막자 울상이 되었다.
“집사. 델피노 남작에게 저 사람을 데려오라고 해.”
짐꾼의 동료는 아시카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허락이 떨어지자 사내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마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기 그런데….”
“또 필요한 게 있는가?”
“마차에 아직 짐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마차도 빼야 할 텐데 힘이 부족해서….”
“사람을 보내 달라는 말인가?‘
“송구스럽지만 부탁드립니다, 마님. 조금 있으면 해가 떨어져서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
“저택에 하인이 몇이나 있지?”
아시카는 집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상주 인원은 여덟 명입니다만, 도울 수 있는 건 두 명 정도입니다.”
하녀를 보낼 수는 없고 하인들 중에도 당장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던 아시카가 애거나이트를 돌아보았다.
“기사 중에서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래도 하인들보다는 기사들이 나을 터였다. 아시카는 함께 온 호위 인원을 가늠해보았다. 애거나이트는 난감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나일이 입을 열었다.
“아시카.”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어쩐지 서늘하다. 나일은 가늘게 뜬 눈으로 사내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하인들을 보내는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짐을 싣고 있는 마차라서 두어 명으로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혹시 요청을 거절당할까 봐 사내가 다급히 덧붙였다.
“나일, 왜….”
사람 보내는 것이 뭐가 대수냐고 말을 더하려다 아시카는 입을 닫았다. 나일의 날 선 기세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피곤으로 둔하게 굴러가던 머릿속에 찬물을 끼얹는 기분이었다.
아시카는 마을에서 온 짐꾼을 돌아보았다.
‘뭐지?’
나일은 감이 좋았다. 넉살 좋은 얼굴로 웃고 다니지만 본능적으로 위험을 알아차렸다.
왠지 모를 불안이 밀려들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되어 잊고 있었다. 그녀와 드루쉬아가 얼마나 큰 위험을 헤쳐왔는지.
아시카가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나일이 가까이 있는 하인을 불렀다.
“별장에 여분의 마차가 있나?”
“네. 마을에 오갈 때 사용하는 짐마차가 하나 있습니다.”
“그럼 마차와 하인 한 명을 보내서 사람들을 마을로 데려다주도록 해. 마차는 내일 날이 밝으면 수습하고.”
나일의 지시에 짐꾼은 난감한 얼굴로 아시카를 보았다. 호수 인근에 지어진 별장에서 마을까지는 마차로 한나절이 걸리는 거리였다.
“마님, 그럼 싣고 온 짐은….”
“전하의 말대로 하게.”
아시카의 지시에 짐꾼은 더 토를 달지 못하고 물러났다. 사람들이 각자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아시카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뭔가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어.’
종일 쉬고 있는데도 피로에 찌든 것처럼 머리가 맑지 못했다. 예민하게 곤두섰던 신경이 한층 둔해져서 뭘 놓치고 있는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아시카의 표정이 굳어진 걸 보고 오해한 나일이 미안한 얼굴이 되었다.
“화났어요? 내 마음대로 해서 미안해요.”
“나일.”
아시카의 불안한 목소리에 나일이 넉살 좋게 웃었다.
“손님방은 어딘가요? 기왕이면 가까운 방이면 좋을 것 같은데.”
뭔가 있는데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나일은 괜한 의심으로 아시카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시카는 나일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게 그냥 기분 탓일까?’
모두가 제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였다. 안정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더는 그녀를 위협할만한 사람도 무엇도 없지 않은가.
아시카는 불안하게 들뜨는 마음을 다독였다.
“집사, 전하께 2층의 방을 내드리도록 해.”
집사는 눈을 크게 떴다가 바로 표정을 다듬었다. 그도 그럴 것이 2층은 가족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두 사람의 친분이 생각보다 두텁다는 걸 깨닫고 집사는 드루쉬아를 떠올렸다. 새로이 나타난 황자가 거론될 때마다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던 제 주인을.
‘역시 모를 일이야.’
어련히 알아서들 하시겠지. 그리 생각하며 손님용 침실을 준비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 * *
타닥, 탁. 부러진 잔가지와 작은 자갈들이 날아들어 연신 창문을 두드렸다. 거센 바람이 건물의 빈 구석구석을 휘도는 소리가 요란하다. 누군가의 통곡과도 닮아있는 소름 끼치는 울림이었다.
거센 돌풍으로 인해 유난히 시끄러운 밤이었다. 아시카는 얕게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타닥, 퉁.
거칠게 부딪히던 소음에 이어 와장창 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날아든 뭔가에 기어이 건물 어딘가가 부서진 모양이었다.
“하….”
도저히 더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시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새카만 그림자가 사납게 흔들리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뭐지?”
달도 뜨지 않은 깊은 밤이었다. 어두워야 할 창밖에서 환한 빛이 새어들었다. 아시카는 가운을 둘러 입고 창문을 열었다.
“악!”
창문이 열림과 동시에 문고리를 잡은 손이 획 딸려간다. 거센 돌풍에 창문이 급작스럽게 열린 것이다.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머리칼과 옷이 휘날렸다.
“세상에, 저게 뭐야?”
아시카가 머무는 방은 숲 쪽으로 창이 나 있었다. 울타리 너머 숲에서 환한 빛이 올라와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물을 더 떠 와!”
“사람들 더 불러오고! 기사분들도 도와주세요!”
바람 소리가 심해 별장 밖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멀리 밤하늘을 밝히고 있는 빛은 불이었다. 숲을 태우고 있는 불길. 여름이어도 몇 년째 계속된 가뭄으로 숲이 건조했다. 불이 빠르게 번지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강풍을 타고 빠른 속도로 날아든 불티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거리가 제법 떨어졌는데도 별장 근처까지 불티가 날아들었다. 사람들은 불이 옮겨붙을 만한 나무나 짚더미를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시카는 옷을 챙겨입고 방을 나섰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잔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깨셨습니까?”
“진작 깨우지 그랬어. 밖이 온통 시끄럽던데.”
“그 정도입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바람이 반대편으로 불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요.”
“불똥이 날아드는 모양이야.”
사용인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서 별장 안은 조용했다.
“나일은? 자고 있어?”
바로 건너편에 있는 방이 나일의 침실이었다.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아래에서 들려 왔다.
“아시카!”
“나일?”
별장의 현관문이 벌컥 열리고 나일은 단숨에 2층으로 뛰어올랐다. 애당초 잠들었던 적이 없는지 낮에 입고 있던 옷 그대로였다.
“준비하고 나와요. 별장을 나가야겠어요.”
“왜요? 불이 난 곳은 꽤 멀어 보이던데.”
“바람이 별장 쪽으로 불어요. 강풍을 타면 여기까지 불길이 번지는 건 순식간이에요.”
아시카는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아 멍한 얼굴이었다. 나일은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산불이에요. 바람을 타면 태풍만큼이나 빠르게 덮쳐온다고요!”
그렇게 위협적인 산불을 아시카는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일은 다급했다.
“아시카! 당장 나가야 한다니까!”
버럭 내지르는 고함에 아시카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잔느 들었지? 델피노 남작을 불러오고, 집사와 사용인들에게 전달해줘.”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현관문이 열렸다. 뛰어들어온 사람은 펄번과 미아였다.
“미아, 펄번, 밖은 어때?”
“불길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서 사람들도 당황한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대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펄번이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미아와 잔느는 나와 함께 가. 준비하고 나올게.”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크고 작은 화제는 멀리서 본 적 있어도 위협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다만 다급한 나일과 당황한 사람들을 보며 저도 덜컥 겁이 났다.
‘동요하면 안 돼.’
아시카는 방으로 들어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짐을 챙겼다. 미아에게 가방을 건네는 순간 누군가 요란하게 방문을 두드렸다.
“공작부인, 급합니다. 빨리 나오세요.”
애거나이트의 목소리였다. 아시카가 방 밖으로 나오자 나일과 애거나이트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델피노 남작, 옷이 왜….”
짧은 머리칼은 강풍에 휩쓸렸는지 산발이 되었고 한쪽 팔과 목 언저리에도 새카맣게 검댕이 묻었다. 이렇게까지 엉망이 된 애거나이트는 처음 보았다.
“…마차로는 갈 수 없게 됐습니다.”
“뭐?”
“일부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갔는데, 별장에서 아래쪽으로 불길이 번져서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