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이게… 무슨….”
단검 손잡이에서 병사의 손이 미끄러졌다. 그가 찔러 넣은 단검 주변으로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붉은 피였다.
그러나 그를 내려다보며 히죽 웃고 있는 얼굴이 사람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 듯 후작은 제 심장에 박힌 단검을 잡아 천천히 당겼다. 얼어붙은 병사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후작의 손에 들린 검이 병사에게로 향했다.
“황제가 나를 재판정에 보내준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
“으허…헉.”
공포에 질린 다리가 힘이 쭉 빠져버렸다. 병사가 휘청이는 사이 후작의 눈동자에서는 광기와도 같은 안광이 뚝뚝 떨어졌다.
“도, 도와…, 컥.”
후작은 도망치려던 병사의 뒷덜미를 낚아채 그대로 단검을 박아넣었다. 도와달라는 외마디 비명은 채 완성되지도 못했다. 미리 손써둔 대로 대기실 주변에 있던 병사와 기사들 모두 자리를 비웠기에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조용히 후작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병사는 제가 가져온 단검에 목을 찔려 바닥에 쓰러졌다.
흥건한 피가 흘러나와 바닥에 피 웅덩이가 고였다. 피에 젖은 발을 들어 축 처진 병사의 몸뚱이를 툭 쳤다. 빠르게 숨이 끊어진 병사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더니.”
어찌 그리 선황제와 하는 짓이 똑같을까. 선황제는 하루아침에 아크펠라 대공가를 멸문으로 몰아넣었고 그 아들은 마이헬러 후작가를 멸문시켰다.
“겁쟁이 황제여. 끝내 이런 식으로 나를 농락하는구나.”
이송을 핑계로 새벽에 잠을 깨울 때부터 이상했다. 재판 일정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시간을 끌더니 결국 유야무야 이런 식으로 끝을 낼 심산이었던 모양이다. 후작의 눈동자에는 분노와 광기가 어렸다.
“덕분에 일이 쉬워졌어. 기회를 만들어줬으니 잘 써먹어야지.”
여기 감옥에 있는 이들이 비단 황제의 사람만은 아니었다. 후작은 쓰러진 시신을 넘어 문을 나섰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가슴팍을 물들인 피가 어느새 멈춰버렸다는 것을.
“이게 어떻게 저주일 수 있어?”
심장을 찔렸는데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피가 솟구치던 자리가 거짓말처럼 아물어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웃음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늙지도 않아, 죽지도 않아. 뭐든 할 수 있다고!”
후작은 미친 듯이 웃어대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제 제가 받은 것들을 되돌려줄 차례였다.
* * *
뜨거운 날씨에도 아시카의 눈꺼풀은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 펼쳐진 시원한 그늘 속. 바람이 불 때마다 숲에서 흘러나오는 청량한 향기에 몸이 노곤해진다. 특별히 제작된 휴식용 의자는 뒤로 반쯤 기울어 졸린 몸을 더욱 늘어지게 했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는 호위 기사들이 포진해 있고 옆에는 공작성에서부터 별장까지 쫓아온 집사가 의자에 앉아 뜨개질에 여념이 없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멀리서부터 조용히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문득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을 때 기이한 표정의 나일과 딱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거의 형태를 잡아가는 작은 옷이 무릎에서 미끄러졌다. 나일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것을 낚아챘다.
“쉿.”
나일은 졸고 있는 아시카를 가리키며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다. 연로한 집사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나일의 손에는 집사가 한창 열중해있던 뜨개질의 결과물이 들려있었다. 양손으로 잡고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사람의 옷이 맞는데 무척이나 작았다.
“이거 설마….”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다. 집사는 머쓱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있다 보니 몸 쓰는 바쁜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 탓에 아시카의 임신과 맞물려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됐다고나 할까. 아기 옷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집사의 뜻에 아시카는 흔쾌히 응했다.
“풉….”
나일의 입에서 기어이 웃음이 새었다. 뜨개질을 하는 초로의 집사와 나무 그늘에서 졸고 있는 임산부의 조합에 괜스레 웃음이 났다.
소리를 들었는지 잠들어 있던 아시카가 부스스 눈을 떴다.
“아.”
“일어나지 마요.”
아시카가 일어나려고 하자 나일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둔한 움직임이 어쩐지 힘들어 보인 탓이다.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벌써 일곱 달이 넘었다면서요?”
얇은 여름용 드레스는 허리선이 없는 풍성한 형태였다. 몸매가 가려져서인지 부풀어 오른 배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임산부를 보는 것이 신기한지 나일은 그녀보다 더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나일의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보고 아시카는 둥근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언제 왔어요? 깨우지 그랬어요.”
“뭐 급한 게 있다고 깨워요.”
“미안해요. 미리 준비했어야 했는데, 저녁 무렵에 도착한다고 들어서 잊고 있었어요.”
힘들지 않다고 말했지만 실은 이만저만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움직이는 것이 어려운 건 말할 것도 없고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찼다. 잠을 깊게 잘 수 없다 보니 종일 틈만 나면 졸았다.
그 와중에도 공작성에서는 수시로 가신들이 찾아와 접견을 요청했다. 탈리온 공작부인이자 곧 이그레인 공작이 될 그녀와 친분을 쌓고자 함이었다.
이런저런 일로 도통 쉴 수가 없었던 아시카는 피접을 핑계 삼아 여름 별장으로 피신을 왔다.
“임신하면 얼굴이 안 좋아진다고 들었는데, 왜 아시카는 반대로 보이죠?”
“잘 먹고 잘 쉬어서 그렇죠.”
후후, 웃음을 흘리는 아시카는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워 보였다. 원래도 하얗던 피부가 더 생기있게 윤기가 흐르고 그늘이 사라진 얼굴에서는 빛이 나는 듯도 했다. 입덧조차 하지 않았으니 퍽 특이체질인 건 분명했다.
그 사이 하녀가 여분의 의자를 가져왔고 집사의 지시로 차가 준비되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차를 따라준 뒤 집사는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물러났다.
“그나저나 왜 여긴 혼자 와있는 거예요? 탈리온 공작은 공작성에 있나요?”
“아뇨. 노공작께서 지난번의 상처가 도지는 바람에 대신 지원을 나갔어요.”
아시카의 어조에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밤이면 다정하게 다독여주던 손길과 따뜻한 체온이 그리웠다.
“아아, 어쩐지.”
나일이 혀를 찼다. 드루쉬아는 좀처럼 아시카를 홀로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제 새끼를 지키는 맹수처럼 아시카의 곁에 꼭 붙어서 이빨을 드러내곤 했다.
그러나 탈리온에게는 국경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고 머지않아 그 일은 드루쉬아의 몫이 될 터였다.
“그래서 애거나이트가 거머리처럼 붙어 있군요.”
나일은 멀리서 지켜보는 애거나이트를 흘깃 보고는 다시 아시카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그를 노려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괜히 심술부리지 말아요.”
두 사람의 신경전을 알아차리고 아시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뭘요?”
“델피노 남작과 사이가 안 좋다면서요?”
“워낙 융통성이 없어야 말이죠.”
“탈리온에서 가장 충직한 기사 가문 중 하나예요. 지위를 핑계 삼아 괴롭히거나 하지 말아요.”
“와, 정말 이러기예요?”
나일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일부러 더 신경을 긁고 심술을 부린 것은 사실이지만 아시카를 보호하려다 벌어진 일이 아니던가.
“나 속상해서 눈물 나려고 해요. 사람이 이렇게 태도가 변할 수 있어요?”
“너무 융통성이 없어서 자꾸 휘둘리잖아요.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그게 재밌어서 더 작정하고 도발했던 적도 있었다. 나일은 머쓱하게 시선을 돌리며 하녀에게 손짓했다.
하녀가 빈 찻잔을 채우는 동안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멀리 있던 애거나이트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떠나는 것이 보였다. 나일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들었어요? 대공위 승계식에 황제의 사자가 찾아갔다가 기절했다면서요?”
“아, 그게요.”
잠시 망설이던 아시카는 이 모든 상황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 나일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에게는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황실에서 과거 대공령을 오가던 귀족을 일부러 수배해서 사자로 보냈다더군요. 확인하고 싶었겠죠.”
대공가의 직계가 살아있다는 소식은 한동안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날조라는 소문과 혈족임을 입증할 방법을 내놓으라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찾아간 사자는 40여 년 전에도 대공령을 방문한 적이 있는 귀족이었다.
“기절할만하네요.”
“어디 가서 떠들진 못할 거예요.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살아남은 대공녀의 딸이라는 설명이 가장 그럴싸했고 실제 외부에는 그렇게 알려졌다. 진실을 아는 것은 대공녀의 얼굴을 기억하는 대공령의 귀족들뿐.
이번 일을 계기로 대공령이 반으로 쪼개졌다. 대공성을 중심으로 한 남쪽 땅이 아크펠라의 영지로 남았고 거기서 북쪽으로 수도 트렐린과 가까운 지역이 공작령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이 공작위를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일이었다. 황제는 아크펠라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대공령과 수도 사이에 또 하나의 완충지를 만들어 둔 셈이다.
새로운 공작령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나일이 황제에게 품은 반감이 깊다는 걸 알기에 당장은 염려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스러웠다.
“계승권을 포기했다고 들었어요.”
“대신 작위를 받았잖아요.”
아시카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일을 보았다.
“쉽지 않을 거예요.”
반으로 갈라놓았다 해도 대공령의 사람들은 잊지 않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황태후가 저질러온 만행을. 나일의 처지가 어떠했든 황족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반감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벌써 혼맥을 주장하는 귀족들이 있더군요.”
“아아. 그래요. 대공령 귀족들의 반발을 가장 빠르게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긴 하죠. 그래서 말인데 혹시….”
아시카는 이븐에게 부탁해 적당한 혼처를 알아볼까 하다가 바로 생각을 접었다. 황족에게 적대적인 건 대공령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이븐 또한 마찬가지였다. 적대적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뿌리 깊은 원한이 아닐까.
아시카에게 호의적인 것과 별개로 이븐은 나일과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들 것이 뻔했다.
‘나일의 위치가 애매해졌네.’
그런 식으로 나일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처음부터 묘하게 친근했던 느낌 탓일까. 아시카에게 나일은 여전히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일이었다.
“미아가 원래 대공령 출신이었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