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어두운 회색 구름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새었다. 조금씩 형태를 바꿔가던 구름이 제 자리에서 밀려나 어둠 속으로 흘러가고 어슴푸레한 빛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뿌연 안개 속에 잠긴 등롱처럼 희미한 달빛. 먹지에 그려놓은 획처럼 가느다란 빛은 꺼져가는 것도 같고 이제 막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도 같았다.
그믐달이었다.
“흐….”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은 사지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보드라운 담요의 감촉이나 저를 감싸고 있는 따뜻한 체온도 멀게만 느껴졌다.
“…시카….”
장막이 드리워진 것처럼 먼 곳에서 들리는 울림이었다.
“…아시카.”
다급한 손길이 그녀의 얼굴과 목 언저리를 쓸며 채근한다. 일어나라고. 어서 깨어나라고.
“아시카!”
“허억.”
밤하늘보다도 까만 눈동자가 소스라치게 놀라 주위를 살폈다.
“괜찮아. 아시카, 괜찮아.”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연신 다독였다.
괜찮다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네가 보는 모든 악몽은 꿈일 뿐이라고.
쿵, 쿵 거세게 울리던 심장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가쁘게 몰아쉬던 숨이 진정되고서야 눈앞에 있는 사람이 보였다.
“르쉬아….”
자다 깨어나 헝클어진 금발이 어둠 속에서도 홀로 빛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창밖에서 흘러드는 희미한 달빛 탓이었다.
“악몽이라도 꾸었어?”
“악몽?”
그것이 악몽이었을까.
아시카는 망연한 시선을 들어 창밖을 보았다. 꿈속에서와 꼭 같은 새카만 어둠 한가운데 희미한 달이 빛나고 있었다.
“아시카?”
“…아이들이 있었어.”
“아이들?”
드루쉬아는 미간을 좁히며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요만한 아이들.”
아시카는 양손을 벌려 제 품속에 쏙 들어올 것 같은 크기를 그렸다.
“너무 작고 아름다웠는데….”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었다. 숨이 턱 막힐 만큼 가슴이 아려서 숨을 뱉어낼 수도 없었다. 드루쉬아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꿈이야. 다 꿈일 뿐이라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시카는 흐느껴 울었다. 제가 본 것이 무엇인지 형용할 길이 없었다.
“힘들어서 그래. 그동안 너무 무리해서”.
아시카는 사고 현장에서 받은 충격을 속으로 삭였다. 반쯤 정신이 나간 웨이브를 두고 그녀까지 정신을 놓을 수는 없었기에.
그러나 아무리 눌러도 억눌러지지 않는 감정이 있었다.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삭아지지 않는 그런 감정이. 그것은 때때로 주체할 수 없는 상처가 되어 현재의 스스로를 할퀴어댔다.
“아시카, 왜 그래, 응? 내가 모르는 다른 일이 있는 거야?”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아시카의 눈물은 잦아들 줄을 몰랐다. 드루쉬아는 그녀를 품에 안고 불안하게 등을 쓰다듬었다.
“…비가 많이 왔는데… 잡았어야 했는데…….”
아시카는 어깨를 떨며 십수 년간 반복하고 또 반복했던 기억을 곱씹었다. 드루쉬아는 그 짧은 한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아버지에게 가지 말라고, 혼자 두지 말라고 보채기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마차를 떠나지 않았다면 아시카의 부친은 그리 허망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 그 순간에 멈춰버린 부친의 모습.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제 눈으로 확인했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기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핏기가 사라진 창백한 얼굴과 차게 얼어 뻣뻣하게 굳은 사지. 생명이 빠져나간 몸뚱이는 두렵고도 가슴 아픈 충격이었다.
멈추지 않는 눈물로 인해 숨소리가 가빠졌다. 아시카는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눈물과 습한 숨결에 드루쉬아의 가슴 언저리도 함께 젖어갔다.
“열이 올라. 이러다 또 기절하겠어.”
내버려 두었다가 더 큰 탈이 날까 봐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안은 채 급하게 설렁줄을 당겼다.
이른 새벽 울리는 종소리에 잠들어 있던 성채가 깨어났다. 집사가 제일 먼저 달려왔다가 이내 주치의를 부르기 위해 다시 나갔다. 이어 하녀장이 와서 침실에 불을 밝히고 야간 근무를 서던 펄번까지 쫓아왔다.
집사의 닦달에 주치의는 잠옷 위에 가운만 걸친 채 침실로 끌려왔다. 혹시 안주인에게 탈이 난 것은 아닐까, 자다 깬 사용인들까지 나와 문밖을 지켰다.
“다들 조용히 해주세요.”
주치의는 곁에 있는 집사와 하녀장에게 한껏 목소리를 낮춰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침대가에 앉아 아시카를 품에 안고 있는 드루쉬아를 돌아보았다.
“저, 공작님. 마님을 좀 놔주시는 게….”
“이대로는 볼 수 없나?”
“그건 아닙니다만.”
주치의는 체념한 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럼, 손은 놓아주시고 몸을 돌려서 제가 얼굴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드루쉬아는 주치의가 말하는 대로 아시카를 눕히듯이 돌려 안았다. 그러면서도 제 품에서 놓지는 않았다. 불안해서 놓을 수가 없었다.
떨리는 숨결이 이대로 사그라들면 어쩌나, 따뜻한 체온이 차게 식어버리면 어쩌나. 한순간도 잊어본 적 없던 그녀의 죽음이, 두 사람의 죽음이 불현듯 떠올라 심장이 사납게 뛰었다.
드루쉬아는 주치의가 아시카를 살피는 동안에도 땀과 눈물에 젖은 얼굴을 쓸고 힘이 빠져버린 그녀의 팔을 주물렀다.
그렇게 한동안 살피던 주치의가 몇 번 고개를 갸웃하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왜? 문제가 있어? 많이 안 좋은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시카를 안고 있는 드루쉬아의 팔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불안 가득한 드루쉬아와 달리 주치의의 입 끝이 귓가에 닿을 듯이 벌어졌다.
“축하드립니다, 공작님.”
드루쉬아는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축하를 해? 아시카가 이렇게 아픈데? 이놈이 미쳤나.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생각에 욱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마님께서 아기를 가지셨습니다.”
“…뭐?”
기쁜 나머지 주치의는 드루쉬아의 얼굴이 갑자기 사나워지다 말았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님께서는 지금 심신이 지쳐있는 데다 복중 아기로 인해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
“…아기? 아시카가? 아기라고?”
“네, 공작님. 임신입니다. 수십 년 만에 공작성에 찾아온 아기입니다.”
드루쉬아의 얼굴은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제 몸의 반 토막밖에 되지 않을 여린 몸에 아기라니. 기뻐하기보다 덜컥 두려움이 먼저 들었다.
“이렇게 작은데, 아기라고….”
드루쉬아는 바보처럼 주치의의 말을 되뇌었다.
“작지 않습니다. 공작님께서 크신 거지, 마님은 정상적인 체형의 성인 여성입니다. 불안해하지 마세요.”
드루쉬아의 불안을 알아차리고 주치의가 상냥한 어조로 덧붙였다.
“날이 밝으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만, 임신하신 지 꽤 된 것 같습니다. 이미 초기는 지나간 모양입니다.”
“어떻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시카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도, 벌써 꽤 되었다는 주치의의 말도.
“어떻게 그동안 모를 수가 있었지?”
“드물긴 합니다만, 첫 임신이라면 간혹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마도 입덧을 겪지 않는 특이한 체질인 모양입니다. 대신 평소보다 감정 기복이 심하다거나 하는 변화가 있었을 겁니다.”
멀쩡한 사람도 그냥 버티기 힘든 시기였다.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드루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변화가 있었다 한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터다.
“내가…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마님께선 조심스럽고 좀처럼 속내를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싫다 하셔도 주기적으로 검진을 받게 해주셔야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합니다.”
“다른 이상은? 몸에 다른 문제가 있을 수도 있잖나?”
“지금으로선 특이점이 보이지 않습니다만, 낮에 더 자세히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약을 지어드릴 테니 드시고 우선은 안정을 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주치의는 집사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침실에서 물러났다.
사용인들이 모두 나가고 난 뒤에도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품에 안은 채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조심스레 움직이던 가녀린 손이 그의 손을 잡을 때까지.
“…르쉬아.”
“아….”
“나 좀 눕게 해줘.”
그때까지도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가슴에 어정쩡하게 기대고 있었다.
“미안, 불편했지?”
드루쉬아는 그녀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었다. 진이 빠진 터라 아시카는 그가 잡아주는 대로 푹신한 베개에 기대어 누웠다.
아시카를 눕히고도 드루쉬아는 거리를 좁혀 앉아 상체를 기울였다. 혹시 놓친 것이 있을까 봐 아시카의 얼굴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열이 올랐는지 창백했던 뺨에 홍조가 오르고 검은 눈동자는 아직까지 습하게 젖어있었다.
드루쉬아가 망설이고만 있자 아시카는 제 뺨에 닿아있는 그의 손을 매만지며 먼저 말을 꺼냈다.
“다 들었어. 나 둔하다고 흉봤잖아.”
“아.”
반쯤은 정신이 나간 것도 같았다. 하염없이 아시카를 바라보던 드루쉬아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의 손에 닿아있는 체온과 주저하는 몸짓. 가슴 밑바닥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조금씩 형태를 갖추며 일어났다. 그것은 가슴을 꽉 채우고도 넘쳐흘러 터져버릴 것만 같은 벅찬 감정이었다.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드루쉬아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이야. 우리 아이.”
“으응…. 들었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드루쉬아는 몇 차례나 숨을 가다듬었다. 단지 기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난생처음으로 느껴보는 벅찬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고마워. 그동안 잘 버텨줘서.”
“내가 너무 둔했지?”
“힘들었잖아.”
아시카도 당황스러웠다. 몸이 힘들 때면 달거리를 건너뛰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의심하지 못했다. 감정 기복이 심해진 것도 상황 탓이라고 여겼다.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몸이 유독 피로하다고만 생각했다.
처음 의도치 않게 실수를 저질렀던 이후 내내 이븐의 약으로 도움을 받았다. 신분이 노출될까 봐 일반 치료사를 찾을 수는 없었고, 공작가 주치의에게 부탁했다가는 웨이브의 귀에 들어갈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트샵이 불탄 뒤로 더 이상 약을 받지 못했다. 아시카 역시 정신이 없어서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러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새 생명이 그녀의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 그토록 바랐지만 품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아이가 이제야 온 것이다.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일까. 기쁨만큼이나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지나간 시간이 차례차례 머릿속을 스쳐 가며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가 두려워졌다.
“아시카.”
드루쉬아는 혼란스러운 아시카의 감정을 읽었다.
“진작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시카는 가만히 시선을 들어 그가 하려는 말을 기다렸다.
“우리가 기억하는 시간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건, 네가 그 상처를 다시 곱씹게 될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야.”
가문의 몰락과 두 사람의 죽음. 믿기지 않을 만큼 비참했던 기억이었다.
처음에는 제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었고, 다음에는 살아있는 아시카가 제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모든 고통을 덮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동안 아시카가 보여왔던 기이한 행동도 그제야 모두 이해되었다. 아시카 역시 스스로의 기억을 환각 또는 꿈이라고 생각한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악몽이 진짜 현실이 되지 않도록 숨어있던 진실을 필사적으로 찾고 비극을 막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사실도.
그것은 오로지 둘만이 기억하는 상처였다. 그런데 그걸 드루쉬아가 인정해버리면 그것은 실재했던 비참한 과거가 되고 만다.
과연 어느 쪽이 아시카에게 더 큰 상처가 될까. 드루쉬아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