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황제는 섣부르게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할 거다. 네가 그렇게 만들었지. 고맙구나.”
단순히 복수만을 원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진작에 끝을 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븐이 바란 것은 복수보다 대공령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긴긴 세월 준비해 왔지만, 명분과 그것을 뒷받침해 줄 힘이 부족했다.
그 마지막 결정타를 날린 것이 아시카와 드루쉬아였다.
“온전한 결과를 내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40년 동안 척박해진 땅이야. 권한을 모두 되찾았다 한들 귀족들이 힘을 잃어서 관리하기도 어려웠을 거다.”
그것이 황제와의 담판에서 아시카가 얻어낼 수 있는 최선이었다. 만약 이븐이 직접 나섰다면 오히려 사태가 악화될 수도 있었다.
이븐이 염려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말인데, 그 뒤로 다른 환각은 없었니?”
“대공성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어요.”
“그래, 그렇구나.”
이븐의 표정이 차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끝날 리가 없는데.’
어째서 조용한 걸까. 때를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그렇다고 아시카에게 불안을 더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참, 목걸이 돌려드릴게요. 제 것도 아니었고.”
습관적으로 계속 지니고 다녔다. 아시카가 목깃을 풀어헤치자 이븐이 손을 저었다.
“아니. 그건 네가 가지고 있으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평생토록 이븐을 괴롭혀왔던 힘의 그늘이 이렇게 쉽게 벗겨질 리 없었다.
확실한 건, 신방 안의 존재는 원하는 것이 있었고 이제 그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시카. 대공성이 정리되면 한번 와주지 않겠니? 그때 제대로 이야기를 들려주마. 아크펠라의 혈족으로서 네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왜 이야기를 미루는 걸까. 아시카의 등줄기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네, 조모님.”
이븐은 다정다감하지만 묘하게 어려운 상대였다.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가 그러했고 설명할 수 없는 현재의 모습이 그러했다. 떠오르는 의문은 많아도 입에 올리기는 쉽지 않았기에 아시카는 선선히 수긍했다.
“저, 그리고 당분간 이그레인은 대공령에서….”
대공령 관리 문제를 꺼내려던 아시카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문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가만히 계세요.”
아시카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녀가 채 문에 닿기도 전에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 안된다는 소리 닥치게! 더는 못 기다리네!”
문을 막으려던 집사는 건장한 체구의 사내에게 떠밀려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 무슨 무례인가!”
아시카의 호통에 순간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집사는 부딪힌 자신의 어깨를 매만졌고 우격다짐으로 들어온 사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시카를 노려보았다. 초로에 가까운 나이에도 건장한 체구를 지닌 것이 여느 청년 못지않은 사내였다.
사나운 기세에도 아시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의외다 싶었는지 상대는 말없이 아시카를 살폈다. 곱상한 얼굴이지만 차고 단단한 태도에는 바늘 하나 들어갈 구석도 보이지 않았다.
‘만만치 않겠구나.’
결혼식 날 드루쉬아와 함께 있는 걸 봤을 때는 가녀린 귀족 레이디처럼 보였다. 태생 덕에 소공작의 자리를 꿰찬 운 좋은 여자인 줄 알았는데 그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사내는 간신히 제 감정을 추스르고 예의를 갖췄다.
“시리오스의 알렉이 공작부인께 인사드립니다.”
“시리오스 자작?”
아시카는 상대의 이름을 알아들었다. 기사의 가문으로 대대로 탈리온에게 충성하는 가신 중 하나였다. 예의를 갖추고 있지만 시리오스 자작의 기세는 여전히 사나웠다.
“공작부인을 뵙고자 수차례 찾아왔는데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가신들과의 면담을 모조리 거절하시는 건 무슨 연유입니까?”
“이게 다 무슨 말인가, 집사?”
“저, 그것이….”
집사는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아시카는 들은 바가 전혀 없었기에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상황이었다.
드루쉬아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가신들과 인사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다. 봄 연회에 맞춰 준비 중이었는데 그 사이 그녀를 만나겠다는 가신들이 있었다. 댐 붕괴사고 때 가족을 잃고 시신조차 찾지 못했던 이들이었다.
그들이 이그레인에게 품은 감정은 애거나이트와 비슷했다. 십수 년이 지나도록 가족을 찾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과 분노.
호의적인 요청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드루쉬아가 알리지 않고 계속 거절해온 것이다.
시리오스 자작은 오늘 아시카에게 손님이 있다는 걸 미리 들었다. 공작부인의 집무실은 아직 준비 중이니 손님을 맞이할 곳은 응접실밖에 없을 터. 드루쉬아를 만나겠다고 접견 요청을 넣고 본성에 들어오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집사는 송구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이유를 설명했다.
“공작님께서 가신들과의 접견 업무는 봄 연회 이후부터라고 공문을 내려보냈습니다.”
“공작부인께서 오신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습니다. 어찌 몸담을 영지의 가신들조차 피한단 말입니까. 이것이 이그레인이 탈리온을 대하는 예의란 말입니까?”
“그럼, 그대가 취하는 행동은 가신이 탈리온을 대하는 예의인가? 공작께서 내린 지시를 묵살하는 것이 여기 사람들이 말하는 예의인가? 여기는 원래가 이렇게 다들 무례해?”
“그건!”
“기껏해야 한 달이야. 그 한 달을 참지 못해 하극상을 벌이나?”
시리오스 자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보다 한참 어린 공작 부인에게 혼나는 상황이라니. 아시카가 설마 이렇게까지 대차게 나올 줄은 몰랐다.
차게 쏘아보던 아시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이렇게 다들 단순해.’
애거나이트도 그렇고 다짜고짜 화부터 쏟아내는 사람들을 어찌해야 할까. 이리저리 눈치 보면서 아시카를 살살 굴려보려던 이그레인의 가신들과는 또 달랐다.
“그래서 나를 만나고자 한 이유는?”
“그걸 지금 몰라서 묻는 겁니까?”
“달려온 사람이 말을 해야지. 내가 그대들 속을 어찌 알아?”
시리오스 자작은 화를 삭이며 아시카를 노려보았다. 어설픈 말주변으로 섣불리 말을 꺼냈다간 또 호되게 돌려받을 것 같아서였다.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공작부인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재차 채근하자 시리오스 자작이 입을 열었다.
“14년, 아니 15년이나 되었습니다. 한 번만 더 영지를 열어달라 말씀드렸지만, 그때 이후 단 한 번도 답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수색에 대해서는 그때 조부님과 탈리온의 노공작께서 합의를 보고 끝냈네.”
“고작 일주일 가지고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로샤강 하류에 있는 이그레인 영지를 수색하는 일. 그 광범위한 지역을 수색하려면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탈리온의 대규모 병력이 이그레인의 영지에 발을 들여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십수 년 동안 계속된 항의를 웨이브가 외면할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다.
“타 영지의 군대를 그렇게 오래 자신의 영지에 허락할 수 있는 영주는 없네. 그렇게 해서 가능한 일이었다면….”
아시카는 하려던 말을 멈췄다. 그건 가망 없는 일이라고. 로샤강 일대 전체를 찾을 수도 없고 이미 떠내려간 시신이 어디까지 갔을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그러나 절박하게 바라보는 상대의 희망을 절망적인 현실로 난도질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알고 있을 텐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테지.
이 문제에 관한 한 아시카는 할 말이 없었다. 당시에 아시카는 너무 어렸고 현재도 모든 권한은 웨이브에게 있었다.
“고려해 보도록 하지.”
“고려라니요! 15년 만에 한다는 대답이 고작!”
“내 아버지도 돌아오지 못했어!”
아시카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바락 내지르는 고함에 자작이 움찔 말을 멈추고 순간적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떻게든 말려보려던 집사나 멀리서 상황을 보고 달려오던 기사도 걸음을 멈췄다.
아시카는 차게 굳어진 얼굴로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족을 찾지 못한 건 그대들만이 아니야. 15년 동안 고통받아온 것이 탈리온뿐이라고 생각하지 마. 나도 내 아버지를 잃었고, 내 조부님께서도 아들을 찾지 못했어.”
이그레인측의 실종자는 아시카의 부친인 란체 하나였다. 가장 중요한 후계자를 잃었는데도 나서지 않는 웨이브 때문에 모두 잊고 있었다. 당시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시리오스 자작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화를 낼 상대가 잘못되었다는 걸 그도 안 탓이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공작님!”
복도 너머에서 드루쉬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시카를 가로막고 섰던 시리오스 자작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에게 접견 요청을 했던 사람이 왜 접견실이 아닌 부인의 응접실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느냔 말이다!”
쩌렁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시리오스 자작은 그대로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집사는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고 아시카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자작이 날 이렇게 실망시킬 줄은 몰랐어. 내 지시를 무시하고 나를 불러 농락하고 이제는 탈리온의 안주인에게까지 무례를 범하나?”
이들은 귀족이기 전에 기사였다.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평생 헌신하며 함께 동고동락하는 기사.
드루쉬아의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내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흉흉한 기세에 아시카마저 놀라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시리오스 자작은 얼굴이 땅에 닿을 만큼 바짝 엎드렸다. 그 간곡한 몸짓에 아시카도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제 아들을 찾아주십시오, 공작님.”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잃어버린 가족을 제품에 돌려받아 제대로 장례를 치러 주는 것.
소식을 들었는지 복도 끝자락에서 애거나이트와 다른 기사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허, 자작께서 왜 여기에…. 죄송합니다, 각하.”
애거나이트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응접실 문 주변을 훑었다. 대략만 봐도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시리오스 자작을 데려가. 문책은 나중으로 미루지.”
드루쉬아의 표정은 씁쓸했다. 그의 손짓에 애거나이트가 자작을 일으켜 세웠다. 기사들에게 끌려나가면서 자작은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필사적인 시선으로 아시카를 곁눈질할 뿐.
기사들이 자리를 떠난 뒤 드루쉬아는 거칠게 제 얼굴을 쓸었다.
“미안하게 됐어.”
자신의 울타리 안이라고 마음을 놓았다. 가까이에서 살필 수 있다는 생각에 틈을 보이고 말았다. 드루쉬아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아시카의 손을 잡았다.
“예상했어야 했는데.”
“가신들과의 만남을 서두를 걸 그랬어.”
드루쉬아가 연회를 핑계로 만남을 미룬 것은 아시카가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적응할 시간을 주고 천천히 사람들과의 거리를 좁히기를 바랐다.
“얼굴이 창백해. 의원을 부르는 게….”
“아니, 아니야. 좀 긴장했을 뿐이야.”
드루쉬아의 한마디에 당장 집사가 의원을 부르러 갈 기세였다. 아시카는 기겁하며 물러났다.
“그보다, 죄송해요. 조모님. 아직 내부 정리가 안 돼서 불편하게 해드렸네요.”
소란이 있는 내내 이븐은 응접실 소파에서 자리를 지켰다.
미안한 마음에 한발 다가서는데,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이븐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이 보였다.
“조모님? 어디 안 좋으세요?”
원래도 창백했던 이븐의 얼굴에서 핏기가 모조리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이븐이 아시카를 돌아보았다.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해.”
“왜…, 무슨 일이신데요?”
이븐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아시카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
이븐의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졌다. 아시카와 드루쉬아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내 아들이, 란체가… 어디 있는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