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42화 (142/153)

#142.

탈리온 영지로 향하던 마차 행렬이 멈춰 섰다. 마차가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아시카는 마차의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서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공작부인,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애거나이트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무장한 한 무리의 기수들이 말을 멈추고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한때 윤이 나게 관리되던 갑옷은 색이 바랬고 망토에는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펄럭이는 망토와 어수선한 말의 움직임 탓에 바닥에서도 부옇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말 울음소리와 반가운 기사들의 목소리가 주변을 떠들썩하게 울렸다. 밖을 유심히 보던 아시카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커졌다.

“르쉬아!”

아시카는 덮고 있던 두툼한 담요를 팽개치고 마차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녀가 땅에 채 발을 딛기도 전에 다급히 달려온 말이 마차 앞에서 멈춰 섰다. 드루쉬아는 그대로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뭐가 급해서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거야? 쫓아다니기도 숨차 죽겠네.”

“르쉬아! 다친 데는 없어요? 괜찮은 거예요?”

동그랗게 커진 까만 눈동자가 드루쉬아를 살폈다.

언제나 깔끔하게 빗어 넘겼던 짧은 금발은 바람에 헝클어졌고 얼굴 곳곳이 먼지로 푸석했다. 부츠와 망토도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흙먼지투성이였다.

“내 몸은 그만 보고 나 좀 봐줘, 아시카.”

엉망인 몰골이었지만 얼굴만큼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결혼식 날 헤어져서 무려 한 달 만에 다시 보는 얼굴이었다. 애타게 그리다 보니 얼굴만 봐도 그저 웃음이 나온다.

아시카는 마차에서 내려 드루쉬아에게 달려갔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아시카는 단숨에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망토에서 풍기는 먼지 냄새와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 단단한 감촉 너머에 드루쉬아가 있었다.

“나 지금 엉망인데.”

장갑 낀 손조차 흙먼지로 엉망이 되어 어정쩡하게 허공에서 멈췄다. 그러나 아시카는 개의치 않고 드루쉬아의 허리를 더 바싹 당겨 안았다.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황실에서 보낸 병력이 협조를 요청해서 어쩔 수 없었어.”

마이헬러 후작이 황실 근위대에 연행된 뒤, 마이헬러 영지에 숨어있던 사병들을 정리하고 뒤처리를 황실에 넘기고 오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 소요되었다.

드루쉬아는 먼지 가득한 장갑을 벗고 아시카를 당겨 안았다.

“얼굴 조심해. 잘못하면 긁혀.”

그러면서 주의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워낙 급하게 달려온 터라 갑옷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짐을 버려두고 몸만 달려와서 갈아입을 옷도 없었다. 드루쉬아와 나머지 기사들의 몰골은 정말로 말이 아니었다.

아시카는 차가운 금속 갑옷에 얼굴을 기대고 한동안 숨을 몰아쉬다 고개를 들었다. 거칠한 손이 새카만 머리칼을 손에 감아 만지작거렸다. 지저분해진 손으로 감히 맨살을 만질 수 없어서였다.

드루쉬아의 입에서 표정만큼이나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웠어. 보고 싶었다고. 매일 밤 꿈에서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

“꿈에서 봤어요? 매일 봤으면 보고 싶지는 않았겠네요.”

“그거랑 이거랑 같아?”

불퉁한 투정에 아시카는 웃음을 터트렸다. 까만 눈동자가 유순하게 접히고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웃음을 흘리던 아시카가 전에 없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우리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멈췄다. 드루쉬아의 얼굴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그것도 재주야.”

드루쉬아의 한마디에 아시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아닌 척 말간 눈으로 나를 흔들어놓고 허를 찌르잖아. 내가 그래서 널 못 당해.”

느리게 깜박이던 까만 눈동자가 또다시 곱게 휘었다. 조금은 망설이는 듯, 그러나 탄성과도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시카의 목소리가 탁하게 가라앉았다. 습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난… 널 이기려고 한 적이 없는데?”

“그래도 언제나 넌 나를 이긴단 말이지.”

대답과 함께 드루쉬아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그에게서 시린 겨울 향기가 난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다시 찾아온 계절의 향기가.

* * *

응접실 전면을 차지한 커다란 창문에서 환한 빛이 들어온다. 가문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가구에서는 고풍스러운 윤기가 흘렀다. 벽면의 랑브리는 밝은 색상에 유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응접실의 분위기를 한층 편하게 만들었다.

‘생각보다 밝은 느낌이네.’

드루쉬아의 햇살을 닮은 머리칼처럼. 아시카의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집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공작님께서는 취향이라고 할만한 게 없어서 제가 꾸몄습니다.”

‘아, 집사의 취향이었구나.’

십여 년 동안 공작가에는 안주인이 없었기에 성채의 내정을 담당해 온 것은 집사였다. 마지막 공작부인이었던 네오렌의 아내는 자식들을 잃고 시름시름 앓다가 반년을 못 넘기고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시카가 탈리온 영지에 온 뒤부터 집사는 틈만 나면 그녀를 찾아왔다. 지금도 하녀가 해야 할 일을 집사가 대신하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텃세를 부리려고 감시하는 게 아닌가 했다.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드디어 안주인이 생겼다는 사실에 연로한 집사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중간이 없네.’

성채 사람들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애거나이트처럼 대놓고 꺼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집사나 미아처럼 호기심과 반가움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호감을 보이는 쪽은 대게 네오렌과 밀접하게 지내던 사람들이었다.

“노공작께서는 언제쯤 돌아오시지?”

“봄이 되기 전에는 돌아오실 겁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 살필 게 많다고 하시더군요.”

“원래는 르쉬아가 가야 하지 않아?”

국경지대를 감시하는 것이 탈리온의 소임이었다. 본래는 공작위를 물려받은 드루쉬아의 일이었으나 아직 까지는 네오렌이 그 일을 대신하고 있었다.

“지금 영지로 돌아오시면 할 일이 없습니다. 그분께는 그것이 더 고역스러우실 겁니다.”

“그도 그렇긴 하네.”

집사의 말에 아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싫어도 성채에 틀어박혀야 한다. 네오렌은 그 시기를 최대한 미루고 싶은 모양이었다.

집사의 시선은 아시카의 바로 뒤에 서 있는 잔느에게로 향했다.

“베르트 경의 가족은 언제쯤 오십니까?”

“아, 저는….”

잔느에게 아이들과 남편이 있다는 걸 알기에 나온 질문이었다. 최측근 기사들의 거처는 신경 써서 준비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지시가 없던 탓이다.

잔느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대답을 대신한 것은 아시카였다.

“미리 말을 안 했네. 잔느는 이곳에 정착하지 않아.”

“그렇게 되는 겁니까?”

집사는 다소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아시카의 최측근으로 수년간 함께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잔느에게 미안하게 됐어. 수도에서 인수인계를 마쳤어야 했는데.”

원래 잔느는 아시카가 수도에 머무는 동안만 호위 임무를 맡은 기사였다. 두 아이를 주로 돌보는 남편이 수도를 떠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제가 없어도 아이들은 남편이 잘 돌볼 겁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알고 잔느를 택한 거니까. 당분간만 참아 줘. 미아가 기사 서임을 받으면 잔느는 수도로 복귀하도록 하고.”

“그건 안 됩니다. 갓 서임 받은 기사에게 아가씨의 호위를 전적으로 맡길 수는 없습니다.”

“펄번이 있잖아. 여기 상황이 정리되면 펄번이 이그레인에서 사람을 더 데려올 거야.”

다른 귀족 레이디와 달리 아시카는 저택이나 성채를 벗어나 돌아다니는 일이 많았다. 최측근 호위 기사와는 밤낮으로 함께 있다 보니 가능하면 호위가 여자이기를 바랐다.

뛰어난 여자 기사는 귀했고 그러다 보니 후임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닫혀있는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잔느와 집사는 나가보고.”

“저기, 차를 드려야 하는데….”

손님이 왔는데 나가라는 소리에 집사가 머뭇거렸다.

“부르기 전에는 아무도 오지 않도록 해줘.”

망설이는 집사에게 아시카는 재차 지시를 내렸다. 응접실 문이 열리고 상대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집사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어, 어….”

예의 바른 집사가 할 말을 찾지 못해 더듬거렸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은 분명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느낌이었다. 붉은 머리칼에 갈색의 눈동자가 낯설지만 과거의 기억 언저리에서 누군가가 떠오르는 그런 굴이었다.

그사이 상대는 느릿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아시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활짝 웃었다.

“어서 오세요.”

“아시카. 오랜만이구나.”

그늘 없는 미소에 이븐도 마주 웃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남았는데도 아시카의 미소는 화사했다. 불안한 가운데에도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만큼.

이븐은 얼어있는 집사의 태도를 무심히 지나쳤다.

“안녕하십니까, 시클레어 부인. 그럼, 두 분은 이야기 나누십시오.”

잔느는 가볍게 인사한 뒤 집사에게 고갯짓했다. 놀란 집사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팔을 툭 쳤다. 그제야 집사는 정신을 차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노안이 심해서,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인 데다 머리색과 눈 색도 그가 기억하는 것과 달랐다. 혼란스러운 기억을 다잡으며 집사는 잔느와 함께 응접실을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난 뒤에야 이븐이 문 쪽을 돌아보았다.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기억을 곱씹는 표정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아시카는 조금 놀랐다. 혹시나 집사가 알아본 것이 아닌가 해서.

“혹시 탈리온의 집사를 아세요?”

“기억은 안 난다만, 볼 기회는 있었을 거야.”

아크펠라 대공령과 탈리온, 이그레인의 영지는 서로 인접해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마주쳤을 가능성은 있었다. 이븐이 소파에 앉으며 아시카의 표정을 살폈다.

“불안한 모양이구나.”

“네.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솔직한 속내였다. 이븐은 존재만으로도 제국을 발칵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 때문에 왔단다. 곧 대공성으로 들어갈 거란다.”

“아.”

벌써 그렇게 되었다. 황제의 공표가 있고 한동안 수도가 발칵 뒤집혔었다. 의외로 동요하지 않은 것은 대공령이었다.

“대공령의 귀족들이 움직였나요?”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왔으니까.”

기사의 가문을 모조리 척살했다고 해서 그 명맥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40년을 갇혀 살면서 대공령의 귀족들은 황실에 대한 적의와 자구책을 함께 키워왔다. 이대로 봉쇄가 계속되었다면 언젠가는 크게 터질 문제였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와 함께 문제의 전면에 나서는 대신에 이븐에게 대공령의 상황을 통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급작스러운 변화가 재앙이 되지 않도록 최대한 평화롭게 해결하기를 바랐다. 거기에는 대공령의 혈족 다수를 보호하고 있던 네오렌도 적극 협조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였다. 모든 상황을 수습하고 중심을 잡아주려면 대공녀가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다행히 대공령에는 40년 전 비운의 대공녀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조모님께서 대공성에 입성하시게 되면 대공령도 소란스러워지겠어요.”

“탈리온과 이그레인에는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마.”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왔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아시카에게 만큼은 미리 언질을 해 두고 싶어서였다.

“조부님과는 이야기하셨나요?”

“이 문제에서 너는 제외하기로 웨이브와 얘기를 끝냈단다.”

아시카의 출생에 대해서는 당분간 비밀을 유지하기로 했다. 이그레인과 탈리온의 결합을 경계하는 이들이 많은 상황이었다. 제국의 기둥이나 다름없는 두 공작가가 대공가와 혈족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제국의 세력은 크게 양분될 수도 있었다.

불안정한 시기에 적대 세력을 늘릴 필요는 없었다. 언젠가 비밀이 새어나갈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지금쯤은 황제도 알지 않을까요?”

황제가 마이헬러 후작과 대화를 시도했다면 말이다.

이븐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한가지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복잡한 심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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