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이건, 내 탓이 아니야. 네가 그렇게 만든 거야. 이비스!”
그러나 불현듯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멈췄다.
“아니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는, 나는 그러려고 한 게 아니었어. 제발, 이비스…, 살려줘. 내가 잘못했어.”
일레르나는 아이처럼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다. 찢어발긴 수풀을 저만치 밀어놓고 낙엽더미에 몸을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며 울어댔다.
그러더니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죽여버릴 거야! 이비스! 네가 내 인생을 망쳤어! 아아악!”
분노로 날뛰던 일레르나는,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숲에서 말을 타고 은신하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일레르나는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아들을 데려와! 이 무엄한 것들!”
일레르나의 악다구니가 처절했다. 누군가 그녀를 모질게 핍박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일레르나를 핍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앞서 그녀를 찾아낸 추적꾼들조차 차마 손대지 못하고 주위를 에워싸고 있을 뿐.
바로 지척에서 바라보는 이들 누구도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 모습이 기괴해서 차마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이 천박한 잡것들. 내가 싫다고 하지 않았느냐! 왜 이리 어두워! 커튼을, 커튼을 걷어라!”
어찌나 험하게 다녔는지 가시덤불과 나뭇가지에 걸려 드레스가 반은 찢어졌고 이리저리 긁히고 뜯긴 머리칼은 산발이 되었다. 화장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버린 얼굴은 기괴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도 황태후는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맨손으로 후려쳤다.
“네 거죽을 벗겨 줄 테야. 이 요망한 것. 네가 내 남편을 홀리려고 했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
숲에 굴러다니는 마른 잎사귀를 벅벅 찢어대면서 일레르나는 알 수 없는 말들을 지껄여댔다.
“하….”
추적꾼들은 말을 잃었다. 반쯤 실성한 여자의 행동에 놀랐고, 그것이 황태후여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이븐은 일레르나의 광기 어린 몸짓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어떤 분노나 해묵은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망상까지 품고 있었구나.”
일레르나의 남편이자 선황제는 한때 이비스의 약혼자였다. 그러니 아름다운 이비스가 다시 돌아오면 선황제의 마음도 바뀌지 않을까. 저를 내치고 제 언니를 택하지 않을까.
자격지심과 질투에서 비롯된 어이없는 망상이었다.
이븐은 모친과 자신이 연금술사의 약에 오래도록 농락당해왔다는 걸 알았다. 대공령을 되찾고 싶어도, 복수를 하고 싶어도 마음 놓고 거리를 활보할 수조차 없는 처지.
그녀는 제국 내에 머물 수 없었다. 그래서 웨이브가 일을 의뢰했던 연금술사를 찾아냈고 꽤 오랜 시간 해외에 머물면서 지식을 습득했다. 제국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긴긴 시간을 인내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제국으로 돌아와 멸문한 대공가의 가신들과 그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대공령의 비극을 기억하는 아이들은 치 떨리도록 황실을 저주했고 그렇게 이븐의 수족이 되었다.
이그레인과 탈리온, 황실까지 모두가 얽혀 있는 문제였다. 어느 것 하나 섣부르게 건드릴 수 없어서 더딜 수밖에 없었다.
황태후에게는 신경쇠약에 걸리도록 오랜 시간에 걸쳐 약을 썼다. 결코 회복될 수 없도록. 야금야금 현실과 악몽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가장 아픈 기억을 사정없이 헤집어대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건 그 긴긴 시간 공들여온 결과물이었다.
“그래, 결국은 이렇게 될 거였지.”
복수한다 해도 기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다. 조금쯤은 슬프지 않을까, 막연한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순리에 따라 도달하게 된 종착점인 양. 그것은 조금쯤은 허망한 결말이었다.
“저….”
이븐의 곁을 지키던 호위 하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찌할까요? 명령만 내리시면 여기서 조용히 마무리 짓겠습니다.”
대공령 안팎을 오가며 이븐의 곁을 지키던 이들이었다. 제국도 황실도 더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이븐의 말 한마디면 황제의 모후라 해도 이 자리에서 목을 베고 그 수급을 잘라 흔적 없이 파묻어 버릴 수 있는 이들이었다.
대답 대신 이븐은 발작하는 일레르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 숲이 흔들렸다. 지독히 평화로운 숲과 홀로 제 지옥 속에 빠져 버린 한 여자.
마침내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열리고 거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자.”
“네?”
이븐의 곁을 지키던 이들이 일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대로 보내주실 겁니까? 병사들이 깔려있어서 곧 발견될 겁니다.”
“내가 왜….”
조금쯤은 망연한 목소리였다.
“저치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이븐의 대답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황태후 일레르나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지옥 속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죽음이라는 자비로 고통을 덜어주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 지옥 속에서 제가 흘린 피의 대가를 치르면서 살아야 한다. 평생 공들여 쌓아 올린 제 명예를 깔아뭉개고 황가의 수치가 되도록 오래도록 살아야 할 것이다.
이제 트리델리아 황가와 귀족들은 미쳐버린 황태후를 잊지 못할 것이고, 현재의 황제 또한 그 핏줄임을 뼛속 깊이 새길 것이다. 그렇게 콘틸리아의 핏줄은 천천히 몰락의 길을 걸어갈 터다.
이븐은 천천히 말을 출발시켰다. 어둠이 내려앉는 숲 한가운데 악에 받친 여자가 울부짖는 소리를 뒤로하고. 이제는 지나온 길이 아닌 앞으로의 길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였다.
* * *
밤새 불던 겨울바람이 잦아들고 푸른 여명의 빛이 도시 외곽에 조금씩 퍼져나갈 때. 쉼 없이 달리던 마차가 수도 외곽에 잠시 멈춰섰다. 그때까지 곁에서 따라가던 애거나이트는 마차로 다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레이디 마이헬러.”
이제는 사라져버릴 이름이지만, 마땅한 호칭이 없어서 그리 불렀다.
마차의 창문이 열리고 그 너머에서 샤프리가 다음에 이어질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항구에 도착하면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배편과 신분증, 필요한 모든 것들은 거기서 받으실 수 있습니다.”
“드루답네.”
애거나이트의 배웅은 여기까지였지만, 샤프리가 떠나는 마지막 모습은 확인하겠다는 말이었다.
“갈 길이 멉니다. 정말로 호위가 필요 없습니까?”
“우리 좀 솔직해지죠.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내가 모르겠어요? 드루를 알아온 세월이 얼만데,”
당장 눈앞에 있는 기사들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도 탈리온의 사람들이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걸 알았다. 보호라는 명목이지만 실은 감시라는 사실도.
어쩌면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닐지도 모를 시선이었다. 절대 허튼짓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드루쉬아의 경고이기도 했다.
애거나이트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압박까지는 피하고 싶네요.”
제국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떠나는 여행길. 그 사실을 매 순간 곱씹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샤프리를 바라보던 애거나이트가 말을 뱉었다.
“은신처를 알려주신 것, 마지막까지 애써줘서 고맙다는 공작님의 전언입니다.”
최측근 외에는 알지 못했던 장소. 마이헬러 후작과 황태후가 만난 장소를 밀고한 것이 샤프리였다.
“난 내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갚을 것도 있었고. 차게 중얼거리면서도 작게 한숨이 나왔다. 그것은 안도의 한숨이었다. 꼬여버린 인연이라 해도 마지막 인사는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최소한 악연으로만 기억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이만.”
에거나이트는 짤막한 인사를 마치고 마차에서 멀어져갔다.
샤프리는 창문을 닫고 빛이 새들어오는 창을 커튼으로 가렸다. 덜컹, 하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앞 좌석을 바라보던 샤프리가 손을 내밀었다. 담요 밖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던 긴 다리를 양손으로 밀어 넣고 흘러내린 담요를 덮어 꼼꼼히 빈틈을 여몄다.
“마차가 작아서 불편하지? 미안해.”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마차라서 사람이 온전히 눕기는 어려운 공간이었다. 비좁은 의자 위 담요 속에 웅크린 상대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얼굴만 반쯤 내놓은 채.
“이틀만 참으면 돼. 마차에서 내리면 조금 더 편해질 거야.”
하얀 손끝이 잠들어 있는 상대의 얼굴을 매만졌다. 하얀 피부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귀족적인 얼굴이었다. 신비로운 오드아이의 눈동자가 보고 싶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우리는 배를 탈 거야. 배를 타고 강을 따라가다 보면 바다가 나온대. 그 바다를 건너가면 이제껏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게 될 거래.”
죽은 듯이 잠들어 있지만 에르윈의 뺨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것이 마음 놓여서 손을 떼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살리려고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샤프리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마이헬러를 무너뜨렸다. 드루쉬아의 반대를 무릅쓰고 에르윈을 살리기 위해서.
「멸문이 뭘 의미하는 줄 알아? 가문의 후계자는 살아남을 수 없어.」
「제국을 떠날 거야. 그러니까 에르윈은 건들지 마. 그게 내 조건이야.」
드루쉬아는 샤프리를 협박하기도 했고 달래보기도 했다. 에르윈을 포기하라고. 그러나 에르윈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필사적으로 드루쉬아를 돕지도 않았다.
그러나 에르윈은 자신의 가문을 멸문시키고 아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여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오라버니가 싫어해도 이젠 어쩔 수 없어.”
마이헬러는 사라지고 샤프리는 살아남았다. 끝끝내 에르윈의 곁에 머물면서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에르윈에게 그것은 불행한 일일까.
샤프리는 자신의 품속에 손을 넣어 까만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숫자로 표시가 되어있는 세 개의 약병이었다.
“그 약을 만든 건 노아야. 알고 있지?”
마이헬러의 주치의이자 연금술사였던 노아. 지금쯤 황실 근위대에게 잡혀 연행되고 있을 모든 비밀의 공모자.
마이헬러 저택에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샤프리는 주치의의 실험실에서 연금술사의 약을 빼돌렸다. 그리고 아시카에게 부탁해 해독제를 받아냈다.
“당신을 속이는 건 너무 쉬워. 재미는 없지만 그래서 오라버니가 좋아.”
에르윈은 샤프리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와 한 점 의심 없이 그녀가 내주는 차를 마셨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남자. 독사 같은 제 아비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남자였다.
“첫 번째 약은 의식을 깨우고, 두 번째 약은 마비를 풀어준대. 세 번째 약은….”
온전한 해독제. 완전한 자유를 주는 마지막 약. 샤프리는 마지막 약병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오라버니는 아마도 나를 미워하겠지? 아무리 무서워했어도 그 사람이 아버지였으니까. 그래… 화를 내는 건 좋아. 미워해도 좋아.”
하지만 떠나려고 하면 어쩌나.
마지막 약병이 그녀의 손바닥에서 도르륵 도르륵 구른다. 덜컹, 마차의 진동에 손이 흔들리자 얼른 약병을 쥐었다.
“오라버니, 미안해.”
혼잣말처럼 조용조용한 속삭임이 의식 없는 에르윈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샤프리는 달리는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마차가 덜컹거리는 소리와 찬바람이 휘도는 소리에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작은 약병은 그녀의 손을 떠나 허공을 가르고 순식간에 길바닥에 팽개쳐졌다. 병이 부서지는 소리는 마차 바퀴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샤프리는 미련 없이 창문을 닫아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