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짝, 하는 매서운 파열음이 어두운 공간을 울렸다. 뺨을 얻어맞은 황태후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도망? 도망이라고?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그걸 팽개치고 도망갈 생각을 해!”
사나운 목소리가 퍼부어질 때마다 황태후 일레르나는 움찔움찔 어깨를 떨었다.
“자, 잠시만 궁을 떠나 있으려고 했어요.”
“지금 상황을 몰라서 그래? 당장 황제에게 달려가 쥐고 흔들지는 못할망정 도망갈 궁리부터 하느냔 말이다!”
“난, 나는….”
후작이 쏟아내는 분노에 일레르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미쳐버릴 것 같아서… 궁에 있다가는 진짜로 돌아버릴 것 같다고!”
궁지에 몰린 일레르나가 바락 소리를 내질렀다. 잔뜩 쉬어버려 쇠를 긁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너를 찾으려고 얼마나 시간을 허비했는지 알아? 지금 탈리온의 군대가 영지전을 선포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긴 하느냔 말이다!”
이 중요한 때에 유일하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황태후 일레르나가 모주의 궁전을 나갔다. 그녀의 부재를 듣고 기다리기를 며칠, 불현듯 일레르나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후작은 그녀를 찾아 헤맸다. 평생 궁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살아온 여자가 궁 밖으로 나가 제대로 생활이 가능할 리 없었다.
수도와 근교를 이 잡듯이 뒤진 끝에 오래전부터 사용하지 않았던 별장에 일레르나가 숨어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간신히 쫓아왔더니 그녀는 어떻게든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모르잖아요. 내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40년을 시달렸어요. 40년이나!”
아버지, 그 부름에 허공으로 올라간 후작의 손이 멈칫했다.
저보다 주름 가득한 얼굴에 노쇠한 여인이 그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후작은 새삼 잊고 있던 자신의 나이를 기억해냈다. 중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아흔에 가까운 제 나이를.
“그 여자가 돌아왔어요. 언니가, 이비스가…. 나를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
일레르나는 두려웠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이비스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이븐이라는 이름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던 이비스. 아크펠라 대공가의 유일한 적녀. 이제는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이 모든 음모의 배후에 일레르나와 마이헬러 후작이 있었다는 걸.
평생 악몽에 시달려왔다. 한 맺힌 저주를 퍼부어대는 이비스의 환영은 지치지도 않고 그녀를 괴롭혀왔다. 그런데 이제 악몽이라고 생각했던 기억마저 의심스러워졌다. 주기적으로 나타나 숨통을 조이던 여인의 모습이 과연 꿈이었을까.
오래전 아크펠라 대공이 들려줬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대공가의 아이는 결코 대공성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신의 힘을 이어받은 아이는 상상할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될 거라고. 그래서 황제가 대공성을 노리고 있노라고.
기이하게 늙지 않는 마이헬러 후작처럼 이비스도 시간이 멈춰버렸다.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이 나던 모습 그대로. 그리고 그때와 꼭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숨통을 조였다.
일레르나는 원망과 독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제 아비를 노려보았다.
“후회스러워, 당신을 만난 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심으로 후회되었다. 자신이 살아온 수십 년의 시간이. 이런 삶을 살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후작의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대공성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일레르나는 일찍부터 자신이 가족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다.
누구와도 닮지 않은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 그것을 아는 이가 모친 외에는 없었다. 그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모친을 보면서 문제가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열 살 무렵 처음으로 마이헬러 후작을 만났다.
그때 알았다. 자신은 아크펠라 대공의 아이가 아니라 후작의 친자임을. 일레르나는 대공가의 적녀인 이비스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다.
그녀의 모친은 마이헬러 후작의 정부였다. 후작의 아이를 임신한 채 아크펠라 대공에게 접근해 정부 자리를 꿰찼다.
당시 대공비는 이미 후작이 보낸 독에 중독되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처지였었다. 결국 대공비는 죽었고 일레르나의 모친이 그 자리를 빼앗았다.
일레르나는 겁에 질렸다. 사실이 알려지면 대공성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고 평생 사생아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게 될 거라는 생각에.
후작은 일레르나의 두려움을 이용했다. 동시에 달콤한 약속으로 그녀를 꾀어냈다. 비밀을 지킨다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으로 만들어주겠노라고. 두려웠던 마음은 달콤한 유혹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어릴 때부터 신비로운 미모와 남다른 재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이비스. 일레르나는 이비스의 무엇하나 따라갈 수 없었다.
아름답고 뛰어난 언니가 미웠고 제게는 없는 것들을 질투했다. 후작은 그런 이비스가 아무것도 되지 못할 거라는 약속을 해줬다.
그래서 이비스에게 독을 먹였다. 아이를 갖지 못하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대공의 후계자도 황태자의 반려도, 미래의 황후 자리도. 그렇게 모든 것을 빼앗아 여기까지 왔지만 그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후작은 일레르나의 후회를 비웃었다.
“그 비밀이 평생 갈 줄 알았느냐? 넌 어차피 대공가에 속하지 못했다. 나는 네게 최고의 기회를 준 거야.”
일레르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떨궜다.
“난, 나는… 행복하지 않았어….”
아크펠라 대공가가 멸문하던 그 날부터 악몽에 시달렸다. 황제의 군대에게 문을 열어주고 수도로 도망치던 그날 밤. 그녀가 보지 못했던 죽음은 꿈속에서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저로 인해 죽어간 사람들, 저로 인해 폐허가 되어버린 대공성.
그리고 이비스. 대공성과 대공령의 백성들을 제 목숨처럼 아끼던 이비스.
그녀가 살아있다는 걸 알았을 때 느낀 것은 공포였다. 언제든 돌아와 제 숨통을 조이고 나락으로 떨어뜨릴 거라는 몸서리쳐지는 공포. 그래서 제 손으로 끝을 내려 했고 성공한 줄로만 알았다.
긴 시간 악몽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그것이 실체 없는 두려움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비스가 다시 나타났다.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괴물 같은 모습으로.
“황궁으로 돌아가. 네가 할 일은 황제를 설득해서 탈리온을 고립시키는 거다. 이그레인 소공작이 아크펠라의 혈족이야. 반역의 핏줄이라고. 그러니 둘을 엮어 처리하란 말이다.”
마이헬러 후작은 여유를 잃었다. 사라진 일레르나를 찾느라 한눈팔고 있던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후작이 드러내는 흉흉한 살기에 일레르나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제 아비이지만 평생을 두려워했던 괴물 같은 남자.
“시, 싫어. 싫어요. 나는, 난….”
현실조차 악몽이 되어버린 지금. 공포에 질린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가 기이한 빛을 내며 희번덕였다.
“후작님!”
별장의 문이 벌컥 열리고 밖을 지키던 호위가 뛰어들었다.
“피하십시오. 주변에 병사들이 깔렸습니다.”
“병사?”
후작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여기는 수도 근교였다. 귀족의 사병이 발을 들일 수 없는 지역.
“그럴 리가 없어. 잘못 봤겠지.”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 어슴푸레한 빛으로는 사위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기사들도 있었습니다.”
“허….”
수도 근처에서 병사를 이끌고 움직이는 기사들이라. 아무래도 불길하다. 후작의 얼굴에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황궁으로 돌아가. 황제를 설득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탁한 청록색의 눈동자가 살기를 드러내며 일레르나를 독촉했다.
“어서!”
꿈쩍도 하지 않는 일레르나의 팔을 후작이 낚아채 강제로 일으켰다.
“싫어. 이젠 싫다니까!”
일레르나는 후작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문을 향해 달렸다.
어디라도 좋았다. 소름 끼치는 청보랏빛 눈동자를 볼 수 없는 곳이라면. 이비스가 쫓아오지 않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라도 좋았다.
“일레르나!”
쾅, 하고 문이 열리는 순간 살벌한 겨울바람이 안으로 쏟아졌다. 일레르나는 앞도 보지 않고 그대로 달려 나갔다.
후작은 불편한 다리를 끌고 걸음을 서둘렀다.
“기다려!”
문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어둠보다 소리가 먼저 다가왔다. 철걱 거리며 갑주가 부딪치는 소리가.
후작은 걸음을 멈췄다. 별장 울타리 안쪽으로 시커먼 사람의 그림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무장한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허겁지겁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여인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막 밖으로 뛰쳐나온 후작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을 뿐.
말을 탄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정복을 갖춰 입은 황실의 근위대장이었다.
“마이헬러 후작은 황명에 따라 이 시간부터 후작위가 박탈되고 죄인의 신분으로 강등된다.”
“미, 미친. 어디서 감히….”
“제국의 황실에 대해 반역을 도모한 죄. 일벌백계(一罰百戒)하라는 황제 폐하의 엄명이시다.”
머리를 후려치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후작은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반역이라니! 누명이다. 누군가 나를 음해한 것이야!”
“밝혀야 할 진실이 있다면 황제 폐하 앞에서 하십시오.”
근위대장의 대답은 단호했다. 혹시 모를 조심스러운 태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재판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아크펠라 대공성도 하루아침에 쑥대밭을 만들고 이후 반역죄를 공표했다. 황제가 근위대를 보냈다는 건 사실상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는 의미였다. 마이헬러를 내치고 탈리온과 이그레인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는 그런 의미.
‘이미 늦었다.’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후작이 뒷걸음질 쳤다.
“죄인을 데리고 가라.”
지시를 받은 병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후작이 달아나려고 하자 병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황태후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거다. 황태후는 마이헬러의 핏줄이야. 황제 또한 마이헬러의 혈족이란 말이다!”
버둥거리는 후작의 팔을 건장한 병사가 단숨에 잡아챘다. 그러나 후작은 포기하지 않았다.
“내 딸이 황제의 모후야. 황제도 나를 어쩌지 못해!”
발악과도 같은 외침이었다. 탁한 청록색의 눈동자에서는 광기가 뚝뚝 떨어졌다. 기사와 병사들은 마이헬러 후작이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다.
“일레르나가 가만히 있지 않아. 너희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죄인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야. 사지는 온전히 보존해야 한다.”
몸부림이 심해지자 누군가 밧줄을 가지고 달려들었다. 후작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찢어지는 고함 소리에 병사 하나가 급하게 손수건을 꺼내 입을 틀어막았다.
시간이 멈춰버린 젊은 육체를 가졌으나 떼로 달려드는 병사를 막을 힘은 없었다. 거센 몸부림에도 결국 후작은 온몸을 밧줄로 묶인 채 병사들에게 끌려갔다.
허겁지겁 달려가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다리가 꺾였다.
“허억, 허억….”
그러나 일레르나는 달렸다. 노쇠해 힘을 잃어버린 다리를 끈질기게 끌고 수풀을 헤치며 달렸다. 방향도 모르고 무작정 달리던 끝에 이리저리 뜯기고 긁히던 드레스 자락이 부욱 찢어지고 말았다.
“으허억!”
달려가던 힘만큼 중심을 잃은 몸이 바닥에 팽개쳐졌다.
“흐으, 윽.”
여기가 어디일까. 어쩌다 자신이 이런 곳에 있게 된 걸까. 기억 어딘가가 잘려 나간 것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황궁의 연회에서 정체가 탄로 난 뒤, 이십 년을 넘게 데리고 있던 하녀장이 사라졌다. 황궁에서부터 수족처럼 함께 있으면서 매일 그녀에게 약을 챙겨주던 이였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매일 밤 머릿속을 헤집어놓던 악몽과 바늘 끝처럼 곤두선 신경을 갈아버릴 것만 같은 환각들.
아니 그건 환각이 아니었다.
악몽이라고 자위했던 무수히 많은 밤들이 현실이 되었다. 지긋지긋하게 달라붙던 여자의 형상이 끝끝내 그녀를 지옥의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고야 말았다.
넘어져 손이 닿은 바닥에도, 나무 아래 드리운 그림자 속에도, 바람결에 출렁이는 수풀 속에서도 소름 끼치는 여자의 형상이 보였다.
“이비스, 이비스, 아아아악!”
일레르나는 제 발길 아래 깔려 있는 수풀 더미를 쥐고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그렇게 하면 여자의 형상을 찢어버릴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