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하….”
황제의 입에서 기막힌 탄식이 새었다. 쐐기를 박듯 아시카는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마이헬러 후작가는 천인공노할 일을 벌여왔습니다. 대가를 치르게 해주십시오. 그리하면 이 모든 죄는 마이헬러 후작이 떠안고 갈 것입니다.”
“마이헬러를 쳐달라 그 말이로군.”
“마이헬러에게 죄를 묻고,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대공가의 누명은 이제 벗겨주세요, 폐하.”
아시카와 이그레인이 살기 위해서는 반역의 핏줄이라는 누명을 벗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크펠라의 억울한 과거사를 뒤집어야만 하고.
황태후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진짜 배후는 마이헬러 후작이었다. 질긴 악연의 끈을 지금 잘라내지 않으면 그녀가 겪었던 환각은 또다시 끔찍한 현실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이해가 안 가. 왜 대공령 문제에 이그레인과 탈리온이 발 벗고 나서는 건가? 가문의 명운까지 걸고서?”
정말로 궁금한 모양이었다. 황제의 질문에 아시카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동자에는 전에 없던 새파란 분노가 어려있었다. 반드시 마이헬러의 멸문을 보고야 말겠다는 한 서린 분노였다.
어쩌다 두 가문이 마이헬러와 이렇게까지 사이가 나빠졌는지 황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40년은 긴 세월이었습니다, 폐하. 더는 죄없이 고통받는 대공령의 백성들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부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단지 측은지심 때문이다?”
“이그레인 또한 대공령에서 손을 떼기를 원합니다.”
“허….”
황제의 손이 불안하게 손잡이를 두드렸다. 이 대화를 주도하는 것이 자신이 아닌 아시카라는 사실에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둘 다 배짱이 보통이 아니야. 끼리끼리 만났어.”
혼잣말 같은 푸념이었다.
황제는 늘 네오렌이 어려웠다. 말 한마디에 천금 같은 무게를 담은 사내는 누구보다 강인하고 기세등등했다.
그래서인지 드루쉬아 또한 편치 않았다. 제국의 황족보다 더 강인한 기세를 뿜어내는 그가 불편하고 어려웠다.
동시에 황족인 자신이 신하에게 기가 눌리는 것이 못마땅하고 화가 났다. 선황제가 왜 그토록 탈리온을 경계했는지, 왜 아크펠라 대공가를 끝끝내 멸문에 이르게 했는지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아크펠라 대공가를 복원한다 해도 계승할 자가 없지 않나? 방계의 혈족도 남지 않았을 텐데. 그게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어.”
개국공신 가문은 유독 자손이 귀했다. 만약 방계 쪽에 자리를 넘긴다 해도 직계의 피가 섞이지 않은 외가의 혈족일 가능성이 컸다.
“그것은… 살아남은 아크펠라의 가신들이 알아서 정리할 겁니다.”
아시카는 에둘러 대답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아크펠라 대공가의 누명을 벗기는 것이다. 직계 자손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릴 필요는 없었다.
대공녀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면 아크펠라의 힘을 두려워했던 선황제만큼이나 경계하려 들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모르는 편이 더 나았다. 어차피 이븐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증명하게 될 테니까.
“만약에 내가 거절한다면 어찌할 텐가? 이그레인과 탈리온에게 황족 모독죄를 묻겠다면?”
“폐하.”
아시카는 동요 없는 시선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미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위에서 정리하지 않으면 결국 아래에서 더 큰 사달이 벌어질 겁니다.”
이 사실이 공개되면 제일 먼저 대공령의 귀족들이 들고일어날 것이다.
한때 자치 공국으로 독립을 하느냐 마느냐 말이 나올 정도로 독자적인 세력이 강했던 대공령이었다. 그래서 선황제는 그토록 대공령을 제 아래 굴복시키기를 원했었다.
40년 동안의 금족령으로 힘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지원 세력이 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탈리온의 무장병력까지 가세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뻔한 노릇. 진짜 내전이 발발할 수도 있었다.
“탈리온과 이그레인은 내전을 일으킬 셈인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폐하입니다.”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기가 막혔다. 진심으로 아시카는 내전까지 갈 수도 있다는 언질을 한 것이다.
“이 무슨…. 이그레인 공작과 탈리온 공작도 그대가 이렇게 무모하게 구는 것을 아는가?”
“제 의견이 곧 탈리온과 이그레인의 뜻입니다.”
황제는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제 목숨뿐 아니라 두 가문의 명운을 걸고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는 아시카를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
황제의 시선이 목석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일에게로 옮겨갔다.
“…너는 어째서 이 일에 끼어들었느냐? 차라리 내게 왔더라면….”
어쩌면 황자로서 지위를 인정했을지도 모르는데. 황제가 채 끝맺지 못한 말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나일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혈육을 바라보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서늘한 눈빛으로.
“어머니의 불명예를 씻어주십시오.”
어머니. 그 한마디에 클레멘의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졌다.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한마디를 이제야 듣게 되었다.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는 반갑다는 인사조차 서로 마음 놓고 할 수 없었는데.
“원하는 것이 있으니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냐. 황자로서의 지위나 작위 같은.”
“제가 원하는 건 하나뿐입니다. 제 어머니의 불명예를 씻고 어머니의 아들로서 살고 싶습니다.”
나일은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재차 못을 박았다. 제국의 황제인 아비가 아닌, 쫓겨난 폐황후의 아들로서 살겠다고.
“저는 제 가족을 되찾고 싶을 뿐입니다.”
풍요로운 환경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부모의 자리에 있는 자작 부부는 마냥 멀기만 했다. 그들에게 나일은 한 번도 가족이었던 적이 없었다.
황제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저를 꼭 닮은 청년이 저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네 어머니를 되찾고 싶다면, 네 이름부터 찾아야 한다. 레이디 마제스의 불명예를 씻는 것 또한 너로 인해 가능해.”
무엇을 강제하겠다는 말일까. 나일의 표정에 처음으로 동요가 일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대공가의 누명을 벗기고 금족령을 풀어달라는 아시카, 증거를 들고 와서 제 모후의 죄를 묻는 폐황후와 존재조차 몰랐던 아들과의 만남.
알현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였다.
“대공령은 위험한 짐이야. 탈리온 공작부인, 그대는 그걸 알고 있어.”
나약하나마 그는 황제였고 평생 궁에서 살아왔다. 대공령이 지닌 의미와 위험성을 모르지 않았다.
“대공령을 분할 하자는 의견은 예전부터 있어 왔지. 섣부르게 손댈 수 없어 여태껏 미뤄왔지만.”
굶주린 승냥이 떼처럼 시시각각 대공령을 노리는 귀족들에게 나눠주기에는 근거가 약했다. 그때는 아직 황태후의 존재가 뒤를 받치고 있었고.
“대공령의 봉쇄를 풀고 40년이나 갇혀 있던 귀족들의 판단에 모든 걸 맡길 수는 없네. 과거부터 그곳은 지나치게 독립성을 주장해왔어.”
“폐하, 그 말씀은….”
아시카는 황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대공령을 반으로 쪼개고 그 나머지는 내 직권으로 처리하지.”
“폐하, 제국에는 그만큼 대규모 영지를 관리할만한 귀족이 없습니다.”
고위 귀족들은 이미 광대한 영지를 보유한 상태였고 절반으로 쪼갠다 해도 대공령은 아무나 내세워 관리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새로이 임명하면 되지.”
황제의 어조는 건조했다. 누군가에게 물어 답을 찾을 수 없는 사안.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대공령의 봉쇄가 풀린 뒤에도 최소 10년간은 이그레인이 보증인이 되어야 해. 문제가 생길 시 책임을 묻겠다는 말이네.”
앞으로도 한동안은 대공령이라는 족쇄를 차고 있으라는 말이었다.
“폐하, 그러나 대공령의 귀족들은….”
“40년 전 당시 대공령의 귀족 절반이 멸문했네. 복원한다 해도 그 혈족을 찾아내는 게 보통 일은 아니야. 아무리 이그레인이 자원을 쏟아부어도 귀족이 부족한 대공령을 아크펠라의 방계 혈족이 돌볼 수 있을 거라고 보는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외부에서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의미였다. 황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심산이었다. 대공가의 힘을 아예 반으로 쪼개버릴 기회를.
“아니면 진짜 내전이라도 벌여보던가.”
최후통첩이었다. 받아들이던지 진짜로 황실을 상대로 싸우던지, 선택하라는 최후통첩.
이 순간만큼은 아시카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함께 왔어야 할 드루쉬아를 두고 혼자 달려온 지금, 대공령의 역사를 가르게 될 중요한 결정마저 그녀의 몫이 되었다.
“폐하, 그렇다면….”
황실과의 싸움은 누구도 원치 않았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아시카는 이 거래가 최대한 모두에게 이득이 되기를 바랐다.
“대공령에는 외부의 군대가 더는 필요치 않습니다. 황령으로 귀속된 탈리온의 병사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강제로 빼앗아간 병사들을 돌려달라는 말이었다. 황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하. 이건 정말이지.”
황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시카를 보았다. 경악할만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빼앗아 간 군대를 돌려달라 요구하다니.
“그래, 그대도 이그레인이었지.”
탁월한 수완으로 각종 사업을 일으켜 제국의 돈줄을 쥐고 흔드는 이그레인. 지난번에 병사를 요구할 때 질색하더니 기어이 도로 가져가고야 만다.
“탈리온 공작부인, 아니 이그레인 소공작. 오늘 그대가 했던 말에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걸세. 조금의 거짓이나 어긋남이 있을 시에는 두 가문 모두에게 책임을 묻겠네.”
휘둘렸다는 사실에 화가 나면서도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한 기분도 들었다. 장장 40년을 끌어온 대공령 문제를 황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털어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밖에 시종을 불러라.”
황제의 목소리에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탈리온 공작부인과… 네드로프 공자를 모시고 나가라. 레이디 마제스는 잠시 나와 이야기하지.”
나일이 미간을 찡그리며 클레멘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괜찮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20년 만의 만남이었다.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이야기가 있을 터였다.
“나일.”
굳어있는 나일을 아시카가 작게 불렀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 걸 보고 아시카는 그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레이디 마제스에게도 시간이 필요해.”
내내 표정을 감추고 있었지만 아시카의 눈에는 보였다. 허망하게까지 느껴지는 실망감. 맥 빠진 시선이 간신히 아시카에게 향했다.
나일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알현실을 나섰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다시 한번 알현실 문을 돌아보았다.
“괜찮아?”
아시카는 나일이 걱정되었다.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마음이 쓰였더랬다. 피붙이도 아닌데 어리광 부리는 동생이 생긴 것처럼.
“놀랍게도 아무 느낌이 없네요.”
한때는 그런 상상을 했었다. 핏줄은 당긴다던데 제 아비를 만나면 어떤 느낌이 들까.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만나면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나일이 마주한 사람은 낯선 사내일 뿐이었다. 화려한 의복과 근엄한 황좌가 무색할 만큼, 나이 먹어 힘이 빠져가는 초라한 사내.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톡, 톡. 가녀린 손마디가 나일의 팔을 두드렸다. 그제야 나일은 맥 빠진 웃음을 지었다.
“아가씨는 참 이상한 데서 상냥해.”
“이제 아가씨라고 부르면 르쉬아에게 혼나.”
“그럼 이름을 부르게 해주던가요.”
“으음….”
그러고 보니 관계가 묘해졌다. 이제는 전처럼 마냥 편하게 대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나중에 생각하죠. 쓸데없는 고민으로 힘 빼지 말고.”
아시카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나일이 툭 뱉었다. 두 사람은 시종의 안내를 받아 대기실로 나왔다.
아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독사를 잡기 위해 그물을 던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