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그가 아는 레이디 마제스는 한 명뿐이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반려가 되었으나 황태후에 의해 쫓겨난 여자, 평생 다시 만날 일 없다고 생각한 폐황후 클레멘 마제스.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아시카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분이 맞습니다. 이 모든 진실을 알려온 것 또한 그분입니다.”
놀라움에 이어 황제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드러났다.
“클레…, 아니, 레이디 마제스가 궁에 와 있다고?”
“혹여 입구에서 저지당할까 봐 부득이 이름을 감추었습니다. 용서하세요.”
황궁에 근무하는 사람치고 레이디 마제스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20년 전 쫓겨난 비운의 폐황후. 한때는 가장 고귀한 자리에 있었지만 이제는 어디 있는지 존재조차 잊혀진 여인.
“허….”
“폐하를 뵙고자 하는 이가 둘입니다. 신분은 이그레인의 이름으로 보증합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하나가 아닌 둘이다?”
“예, 폐하.”
매끄럽고도 차분한 목소리. 아시카의 대답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클레멘의 존재는 황제의 평생에 가장 큰 오점이었다. 황태후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증거이며 무능력의 상징과도 같은.
황제가 침묵하는 동안 아시카는 기다렸다. 숨을 죽이고 저를 가늠하는 시선을 받아들이며, 홀로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 헛되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마침내 황제가 시종을 불러 지시를 내릴 때, 아시카는 티 나지 않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명령을 받은 시종이 돌아올 때까지 알현실에는 긴장된 침묵이 내려앉았다. 황제는 떠오르는 의문을 밀어내며 유독 길게 느껴지는 침묵을 감내했다.
이윽고 시종이 다시 돌아왔을 때, 내내 굳어있던 황제의 시선이 뻣뻣하게 문으로 향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마제스 백작가의 클레멘이 인사드립니다.”
“그대는….”
들어오는 순간부터 클레멘을 예의 주시하던 황제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바로 뒤이어 따라온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 찰나, 사실을 알고 있었던 아시카조차 놀라 입이 벌어졌다. 황제의 얼굴이 낯익다고 여겼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일은 발걸음 소리조차 내지 않고 알현실에 들어왔다. 아주 잠시 나일은 예의를 차리는 것조차 잊고 멈춰 섰다. 두 사람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꼭 같은 청회색 눈동자에 선이 가는 얼굴형과 작은 체구까지.
“…저쪽은? 저쪽은 누구인가?”
충격과 의문이 회오리처럼 노쇠한 얼굴을 휩쓸었다.
그러나 나일의 표정은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담담하다고 하기에는 차가웠고 아프다고 여기기에는 동요가 없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네드로프 자작가의 브레나일이 인사드립니다.”
“네드로프? 네드로프 자작가….”
혼란에 빠진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기억 어딘가를 더듬으며 제가 놓쳐버린 것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서.
그러나 기억나지 않았다. 한때 폐황후의 시녀였던 여자가 네드로프의 장남과 결혼했다는 사소한 정보는 그의 기억 속에 없었다.
“알현실을… 비워라.”
황제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손짓했다. 그러나 시종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처음 예정했던 독대는 아시카뿐이었다. 그것도 신분이 확실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클레멘과 나일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폐하.”
“나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벼락같은 호통이 내려졌다. 잠시 망설이던 시종은 나일을 흘긋 곁눈질하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알현실에는 이제 황제와 아시카 일행만이 남았다. 황제는 무너지듯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20년 만이로군.”
클레멘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그 한마디 속에 담긴 무게가 무거워서 아시카는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대답하는 클레멘의 어조는 담담했다.
“네. 짧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폐하.”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가?”
클레멘은 그의 시선이 여전히 나일에게 머물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니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맞을 터다.
클레멘과 같은 색의 머리칼에 황제와 같은 색의 눈동자, 그와 꼭 닮은 얼굴을 보고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 말씀하시면 답이 어렵습니다. 궁금하신 것을 직접 하문하십시오.”
클레멘은 질문을 유연하게 넘겼다. 자신보다는 황제가 먼저 그 이야기를 입에 담도록.
의자 손잡이를 쥔 황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폐해졌다고는 하나 클레멘은 한때 제국의 황후였었다. 마냥 감상에 젖어 있을 상대는 아니었다.
“나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둘이라 했다. 목적하는 바가 있는 게 아니냐.”
“그리하면, 이제는 제 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클레멘의 반문에 황제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어졌다. 20년 전 당시 그녀를 힘들게 했던 상대는 황태후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클레멘이 황후가 되었을 때, 진작에 정치에서 물러났어야 할 황태후가 여전히 아들을 억누르며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클레멘은 어떻게든 황태후를 막으려 했고 그것이 불화의 시작이었다.
황태후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그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패악질과 음해를 반복했다. 정치 기반이 없었던 클레멘은 황태후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결국 물러난 것은 클레멘이었다.
그 뒤에도 황제에게 어울리지 않는 반려라며 괴롭힘은 계속되었고 클레멘은 몇 번이나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황제는 모후와 아내의 갈등에 개입하길 원치 않았다. 모후에게는 병증이 있으니 싸워 이길 수 없노라며 언제나 한발 물러나 있었다. 마침내 클레멘이 말하기를 포기할 때까지 황제는 외면했고, 끝끝내 궁에서 쫓겨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클레멘의 물음은 허락을 구하는 동시에 지난날에 대한 질책이기도 했다.
황제의 시선이 클레멘과 나일을 오갔다. 나일은 처음 인사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조차 없는 양, 가만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만 묻지.”
긴 침묵 끝에 황제가 입을 열었다.
“하문하십시오.”
“그대는 알고 있었나? 모후께서 숨기고 있었던 비밀을.”
클레멘의 표정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20년 전에는 그토록 전전긍긍했던 사실을 이제야 말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제국 내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된 지금에서야.
“네, 폐하. 다른 비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
탄식과도 같은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황태후와의 갈등에서 클레멘이 마냥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황태후는 드러내놓고 핍박했고 클레멘은 뒤에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수년간 황태후에게만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비밀이었다.
황태후가 마이헬러의 혈족이라는 사실과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숨겨둔 서류가 있다는 것을. 그때 이미 클레멘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무사하기는 어렵다는 걸 깨닫고 서류를 빼돌렸다.
“아크펠라 대공가가 저지른 반역의 증거는 황태후 폐하께서 직접 만든 위조문서입니다, 폐하.”
“하, 하하.”
더는 놀랄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황제의 입에서는 기막힌 웃음만 흘러나왔다.
클레멘은 드레스 안쪽 주머니에서 작게 접은 문서 한 장을 꺼냈다.
“건네드려도 되겠습니까?”
“그건 뭔가?”
황제의 허락에 클레멘은 조심스럽게 문서를 펼쳐 건넸다. 서류를 살피던 황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당시 황태후 폐하께서 아크펠라 대공의 비밀 금고에서 빼 왔다면서 반역의 증거로 제출한 서류입니다.”
클레멘은 조용조용 설명을 이어갔다.
“황실의 기록실에는 대대로 대공가와 주고받은 공문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만 찾아서 비교해봐도 이것이 위조임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증거자료로 제출되었고 황실의 직인을 찍어 확인이 끝난 문서였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황태후가 증거를 위조하고 선황제가 거짓 증거를 묵인했다는 증거. 문제를 제기할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아서 은폐되었던 진실이었다.
그래서 황태후는 이 문서들을 따로 보관했다. 기록실에 그대로 두었다가 누군가 알아채면 사달이 날 것이고, 그렇다고 폐기해 버리기에는 아까운 증거였기 때문이다. 황제와 마이헬러 양쪽 모두에게 약점이 되는 증거 말이다.
“증거는 이것뿐인가?”
약삭빠르게도 황제는 이것을 처리할 방법을 먼저 떠올렸다. 그러나 클레멘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머지는 탈리온 영지의 본성에 맡겨두었습니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저도 모르게 벌어진 일들에 화가 나고 그것이 이제야 부메랑처럼 돌아와 저를 후려치는 것에 화가 났다.
“이걸 가져가서 뭘 하려고 했나? 모후를 고발이라도 하려고? 그런 거였나?”
“제게는 그것이 목숨줄이었습니다, 폐하.”
황태후의 약점은 역으로 클레멘을 살리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그녀는 서류를 훔쳐서 숨겼고 그걸 빌미로 황태후와 거래를 시도했다.
“황태후 폐하께서는 제가 황가의 혈족을 품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였습니다. 폐하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떠났습니다.”
클레멘과 마제스 가문의 안전. 그것만을 약속받고 스스로 궁을 떠났다.
어차피 위협용은 될 수 있어도 실제로 사용할 수는 없는 증거였다. 누가 감히 제국의 모후를 고발할 수 있을까. 그걸 알기에 클레멘은 침묵했다. 하루하루 커가는 나일을 보며 지금의 평화라도 유지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정작 나일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방황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처음으로 아들의 출생과 권리를 빼앗은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서 내 앞에 있는 저….”
황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저를 보고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 상대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니.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너무나 닮아 있는 모습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냥 평생 묻어두지 그랬나. 왜 이제 와서 과거를 들추려 드는가.”
무려 선황제와 황태후가 만들어 낸 음모였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목을 쳐서라도 지켜야 할 비밀.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사죄가 아닌 원망이었다.
그것이 새삼스럽지 않아서 클레멘은 우울하게 눈을 감았다.
“폐하, 이 증거들은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클레멘 대신 앞으로 나선 것은 아시카였다.
“하. 탈리온이 알고 이그레인이 알아. 증거와 증인까지 달고 와서 공개할 의사가 없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의 배후에 마이헬러 후작가가 있습니다.”
화를 내려던 황제가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고개 숙인 아시카를 보며 이 자리가 만들어진 이유를 가늠했다.
‘영악한 것.’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크고 촘촘한 그물을 던져놓고 모두를 놓아주겠다고 한다. 단 하나만을 제외하고.
“모든 사달의 원흉은 마이헬러입니다. 여기 증거를 내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아시카가 준비해 온 문서를 내밀었다.
“이건 또 뭔가?‘
“마이헬러가 수년간 사병을 키우면서 오간 명령서들입니다. 증거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폐하.”
황제의 미간이 얄팍하게 구겨졌다.
한쪽에는 40년 전 황태후가 만든 위조문서가 있고 또 한쪽에는 마이헬러가 저질렀다는 반역의 증거가 있었다.
‘저것이 진짜일까.’
황제의 얼굴에는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40년 전에도 만들었던 위조문서를 지금이라고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시카의 표정은 차고 고요했다. 믿어달라는 호소나 혹시 모를 빈틈 따위는 내보이지 않았다.
‘증거가 중요한 게 아니로군.’
이것은 요구였다. 증거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하는 요구.
황태후가 만들어 낸 거짓 증거는 일종의 족쇄였다. 그녀의 비밀과 죄상을 증명하는 족쇄. 그걸 덮고자 한다면 거짓일지 모를 또 다른 증거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그런 요구가 담긴 거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