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그리고 또? 왜 말을 하다 말아?”
“…만약의 상황이 벌어지면 공작부인의 뜻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던 듯 한숨처럼 고백이 이어졌다. 아시카는 검은 눈을 반짝이며 단호하게 말을 뱉었다.
“그래, 맞아. 이게 내 뜻이야. 불복은 허용하지 않아.”
“오가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건 일을 지시한 내 책임이야.”
“궁에 들어갔다가 황제에 의해 유폐될 수도 있습니다.”
“그걸 르쉬아가 두고 볼 것 같아?”
“공작부인께서 인질이 되어버리면 각하께서 손발이 묶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아무 대비도 없이 혼자서 들어갈까? 그건 아니지. 반역을 저지르는 한이 있어도 내가 르쉬아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어.”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아시카는 목숨을 걸고라도 황제를 만나 담판을 지을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드루쉬아가 벌인 일들을 뒷받침해 줄 것이고.
‘뭐 이런….’
이제는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평범한 귀부인이었다면 애거나이트의 위협적인 태도가 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시카는 애당초 그가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한치의 물러남 없는 태도에 애거나이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호위 인원은 제가 결정하겠습니다.”
“그건 알아서 해. 단, 속도가 뒤처지면 떼어놓고 갈 거야.”
애거나이트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모두 탈리온의 정예기사들입니다. 공작부인을 못 따라갈 일은 없습니다.”“인원이 많을수록 움직임이 둔해지고 시선을 끌게 돼. 그걸 고려하라는 말이야.”
위험을 무릅쓰는 만큼 전속력으로 수도로 달려가야 한다.
애거나이트는 아시카가 아닌 침대가에 있는 클레멘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게… 되겠습니까?”
“안되면 되게 만들어야지요.”
애거나이트의 의구심 가득한 어조에 클레멘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였다. 클레멘 역시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방문 너머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게 가까워진 상대는 예고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가씨, 왜….”
방안으로 뛰어들던 나일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가 잘 아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얼굴로. 어리둥절한 시선이 돌아오자 아시카가 입을 열었다.
“늦었네.”
“다들 뭐가 이렇게 심각해요? 어디 전쟁이라도…. 아 영지전이 났지.”
농담처럼 던지는 말에 애거나이트가 나일을 노려보았다.
“뭐예요?”
아시카는 두 사람 사이로 걸어가며 손을 저었다.
“싸울 시간 없어. 둘 다 가서 출발 준비해.”
“무슨 일인데요? 어디 가요?”
나일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시카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일을 돌아보았다.
“나일, 우리는 황제를 만나러 갈 거야.”
* * *
수도 트렐린은 제국에서 물이 가장 많은 땅이었다. 사계절 부족하지 않게 눈과 비가 내리고 수도 외곽에 있는 드넓은 초지는 비옥한 농토가 되어주었다. 몇 년째 가뭄이 이어지고 있는 대공령이나 그 주변과는 사뭇 대조되는 환경이었다.
건국신화를 아는 이들은 이곳이 한때 사막이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전설은 전설일 뿐이라고 여겼다. 아니면 황실에 숨겨진 신비로운 힘이 있었다거나.
아시카 일행은 수도에 도착해서야 올해 처음 눈이 쌓인 모습을 보았다. 그만큼 탈리온과 인접 지역도 메말랐다는 의미였다.
수도를 떠나 있었던 기간은 불과 한 달가량. 그런데도 키 작은 상록수가 펼쳐진 황궁의 입구를 바라보는 감회가 새삼스럽다.
“호위 기사는 함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안내인으로 나온 시종이 함께 갈 사람을 제한했다. 알현을 허락받은 것은 아시카 하나뿐. 따라서 알현실에 갈 수 있는 것도 아시카 혼자였다, 나머지 일행은 대기실이나 본궁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
“시녀는 동행하게 해주게.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아시카의 얼굴은 다소 창백했다. 한겨울인데도 이마에 진땀이 배어나는 것이 눈에 띄게 힘들어 보였다.
“혹시 의원이 필요한 건 아닙니까?”
“그 정도는 아니야. 폐하를 뵈러 와서 그런 실례를 저지를 수는 없지.”
얼굴은 창백해도 아시카의 대답은 단호했다. 시종의 시선이 곁에 있는 클레멘에게 향했다. 조금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고위 귀족이 곁에 두는 시녀는 보통 친인척의 소녀나 미혼의 레이디였다. 젊은 공작부인의 시녀라고 하기에는 클레멘의 나이가 많아 보였다.
“제가 부축해 드릴까요?”
클레멘이 나서자 아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함께 들어가겠다는 의미였다. 클레멘이 아시카의 팔을 슬며시 잡으며 말을 이었다.
“무리하긴 했지요. 결혼식만으로도 몸살이 날 지경이었을 텐데 또 수도까지 달려왔으니.”
“그냥 좀 어지러워서 그래요. 이 정도로 앓아눕지는 않아요.”
가녀린 체구지만 보기보다 건강한 몸을 타고났다. 영지 순회를 위해 매년 한두 달씩 말을 타고 강행군을 해도 몸져눕는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알현실 입구까지만입니다. 허가받은 본인 외에는 알현실에 출입할 수 없습니다.”
“네, 알아요.”
클레멘은 굳어진 얼굴에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표정을 관리하는 것이 어려운지 말을 뱉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혹시 시종이 이상하게 여길까 염려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애거나이트를 비롯한 호위 기사들과 나일은 밖에서 대기하고 아시카와 클레멘이 황제가 머무는 본궁에 가게 되었다.
클레멘은 걷는 내내 오로지 앞만 바라보았다. 20년 만에 돌아왔는데도 본궁을 거니는 발걸음이 익숙하다.
알현실 밖에 클레멘을 두고 들어서는 아시카의 표정은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지켜보는 눈이 많아 두 사람은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시종의 안내는 여기까지였다. 알현실에는 아시카 홀로 들어가야 했다.
쿵, 쿵, 아시카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지난번에는 드루쉬아와 함께였지만 이번에는 혼자였다. 장난스럽게 잡아주던 크고 따뜻했던 손이 절실하게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거야.’
드루쉬아처럼 기사를 끌고 전장에 나갈 수도 없고 나이를 먹지 않는 이븐처럼 신비한 힘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매 순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달려왔을 뿐이다.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러니 지금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황제의 입실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에 아시카는 긴장된 손을 움켜쥐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신년의 축복을….”
“이그레인과 탈리온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황제는 알현실에 들어오자마자 아시카의 인사를 뚝 잘라먹었다. 마이헬러 영지에서 벌어진 소식을 이미 들었기 때문이다.
잔뜩 긴장해 있던 아시카는 황제의 노한 음성에 맥이 탁 풀렸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상대라니, 두려워했던 마음이 무색해졌다.
“시작은 사소한 분쟁이었습니다만, 저쪽에서 도를 넘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마이헬러의 병사들이 일으킨 화제로 마을 하나가 불탄 것을 아십니까?”
“그렇다고 영지전을 일으켜? 영지전이라니! 백성들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게 될지 생각도 하지 않는 건가?”
아시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녀가 살인 누명을 썼을 때는 조건에 맞지도 않는 영지전을 허락했던 황제였다. 사실상 월권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영지전은 영지를 보유한 귀족이 지닌 권리입니다. 제국의 법이 보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만 영지전을 치렀을 때 양쪽의 피해가 막심하기 때문에 실제 전투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병력을 움직이는 것도 위협용일 뿐, 대부분은 극적인 합의를 통해 상황을 마무리했다.
“아무리 그래도 탈리온은 제국 제일의 검이자 방패일세. 탈리온이 작정하고 나서면 무릎 꿇지 않을 귀족이 누가 있겠나!”
“그런 탈리온이 한 번이라도 사적인 이익을 위해 병사를 움직였던 적이 있습니까? 폐하, 노하실 것이 아니라 사실을 그대로 보셔야 합니다.”
“가문 간의 싸움을 이리 크게 키우는 법이 어딨나. 탈리온은 잘못 생각하는 걸세.”
황제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이제는 황제의 외가가 되어버린 마이헬러 후작가. 그동안에도 권력의 중심부에 나서지 않으면서 물심양면으로 황태후를 도와줬던 걸 기억한다.
황제의 모후가 사생아라는 오점이 남게 되었지만, 권력욕이 없고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을 뒷배로 둔다는 건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그런데 채 관계를 정리하기도 전에 탈리온이 나서서 초를 친 것이다.
“폐하, 아직 과거사가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법. 아크펠라 대공가의 문제는 분명 폐하의 발목을 잡는 치명적인 문제가 될 겁니다.”
“여기서 대공령 문제가 왜 나와? 그대의 남편이, 탈리온 공작이 벌집 쑤셔놓듯 뒤집어 놓은 건 마이헬러 후작가일세!”
아시카는 내내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우물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황제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감히 무례라고 지적하기 어려울 만큼 올곧은 시선이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 과정에서 크나큰 비밀이 드러났습니다.”
황제의 손이 움찔 반응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아시카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마이헬러 후작가에서 허가받지 않은 사병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황제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마이헬러 후작이 권력욕이 있었다면 진작부터 속내를 드러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작가는 대대로 은둔자의 가문이었다. 수도에 모습을 드러낸 지도 불과 십수 년. 음흉한 속내가 따로 있다고 믿기는 어려웠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대공령을 반역으로 몰아간 배후에 마이헬러 후작가가 있었다는 증거가 나왔습니다.”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 듣고 싶지 않은 듯 문을 향해 소리쳤다.
“문을 열어라! 여기 탈리온 공작부인을….”
“황태후 폐하께서 깊게 연관이 되어 계십니다.”
아시카가 내뱉은 말에 황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알현실 문이 열리고 근위 기사가 안으로 들어서는 동안에도 입을 열지 못했다.
“폐하, 공작부인을 모셔갈까요?”
근위 기사는 조심스럽게 황제의 얼굴을 살폈다. 아시카는 여전히 꼿꼿하게 마주 선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다.”
황제는 손을 내저어 기사들을 알현실 밖으로 내보냈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당혹감이 교차했다.
평생 자신을 꼭두각시처럼 흔들어대며 놓지 않았던 모후였다. 때때로 황태후의 눈에서 번뜩이는 광기를 볼 때면 제 어미인데도 두려운 마음이 들고는 했다. 남편과 아들에 대한 집착, 권력에 대한 집착, 끊임없는 탐욕과 광기.
아주 어릴 때 황태후와 다투던 선황제가 푸념처럼 뱉은 말을 기억한다.
「당신은 아비를 너무 닮았어.」
그때는 이해되지 않았다. 온후하기로 소문난 아크펠라 대공과 황태후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야 선황제가 말했던 ‘아비’가 아크펠라 대공이 아닌 마이헬러였음을 깨달았다.
선황제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황태후가 마이헬러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그것은 아크펠라 대공가의 멸문에 황태후뿐 아니라 선황제도 깊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
“…내 모후이시다. 감히 황제의 모후를 모욕할 셈인가?”
“외면한다고 해서 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네가 말하는 진실이라는 게….”
화를 삭이느라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말뿐인 진실은 의미가 없다. 내 자리가 그러하고 권력이 그러하다. 말뿐인 진실에 목숨을 거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짓이야.”
어설픈 위협은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이제 황제는 대놓고 거부감을 드러냈다.
아시카는 한결 차분해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시작한 이상 이제는 엎질러진 물이었다.
“말뿐이 아니라면 어쩌시렵니까.”
황제의 분노에도 날 선 추궁에도 아시카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그것이 더욱 불쾌해서 황제의 시선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당돌하구나. 이그레인은 신중하고 주제를 아는 이들이라 여겼는데, 내가 잘못 알았어. 네가 어찌 감당하려고 이리 가벼이 혀를 놀리느냐?”
“제가 아닙니다, 폐하.”
“말장난을 하자는 거냐?”
아시카의 시선이 찰나 알현실 문으로 향했다. 아주 잠시, 거절당하면 어쩌나 불안이 스쳐 갔다. 그녀가 내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자 증인이 문밖에 있었다.
“레이디 마제스가 황제 폐하를 뵙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레이디 마제스?”
예기치 못한 충격으로 주름진 얼굴에 파문이 크게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