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아시카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나이가 든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얼굴과 하나로 묶어 올린 회색 머리칼이 햇볕을 받아 오묘하게 보였다.
‘이렇게 보니 나일과 모자지간이 맞긴 하구나.’
클레멘은 아시카에게 깊게 허리를 숙여 예의를 갖췄다.
“제가 먼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직접 걸음 하시게 했네요.”
“일부러 찾지 않았어요. 르쉬아가 올 때까지는 편히 쉬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무려 20년이었다. 아무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클레멘이 전전긍긍하며 살아온 세월이. 그 마음이 어떠했을지 아시카는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함부로 말을 걸 수도 섣부른 위로를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잠시라도 방해받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아시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레이디 마제스. 마이헬러 쪽에 있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잔잔하게 미소 짓던 클레멘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일인가요?”
“황태후가 모주의 궁전에서 출타를 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요. 마이헬러 후작 또한 마찬가지고요.”
“그 둘은….”
클레멘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이 빠져버린 손에서 책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안 돼요. 그 작자가, 마이헬러 후작이 황태후를 내세우려는 거라면….”
온순한 갈색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평생 제 어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황제였다. 클레멘이 황태후에게 시달리다 쫓겨날 때까지도 큰 소리 한번 내지 못했다.
우습게도 그런 황제를 어미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이 새로 맞이한 황후였다. 황태후가 새 황후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밀려난 뒤에야 황제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평생 관성으로 이어져 온 관계는 쉬이 변하지 않는다. 황태후의 출생의 비밀이 드러났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제 모후를 내치지 못할 것이다.
아시카가 급해진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마이헬러 후작이 황태후를 이용해 황제 폐하를 압박할지도 모르겠어요.”
“절대 안 돼요! 그 사람은 황태후를 못 이겨요!”
“그래서 말인데요. 입궁을 서둘러야 할 것 같아요.”
클레멘의 입매가 단단히 굳어졌다. 아시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것이다.
“르쉬아를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해요. 도와주실 수 있겠어요?”
아시카의 마음은 더욱 다급했다.
원래는 마이헬러의 비밀 사병을 억류하고 영지전을 선포한 뒤, 여차하면 마이헬러 영지까지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황제가 개입하기 전에 가문간의 문제로 속전속결 처리하면 당장 황제도 손을 쓰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황태후가 개입하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황제가 탈리온을 위협할 수는 없어도 마이헬러 후작을 치는데 방해가 될 수는 있었다. 황제가 후작의 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당장 드루쉬아가 곤란해진다.
긴박한 상황이었다. 클레멘에게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아시카와 드루쉬아를 만나러 왔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었다. 클레멘은 긴장된 숨을 토해내며 대답했다.
“나일에게 준비하라고 이를게요.”
아시카는 티 나지 않게 안도했다. 다급한 상황이라 그만큼 위험도 더욱 커졌다. 그렇다고 미룰 수도 없게 되어버린 상황. 서신을 받는 순간부터 아시카의 입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르쉬아 없이 입궁하는 거예요. 위험부담이 크다는 건 알고 있죠?”
“저보다 소공작님께서 위험한 게 아닌가요?”
“저는….”
아시카의 표정은 긴장으로 내내 굳어있었다. 두려움이 목까지 차올라 숨통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클레멘의 말이 옳았다. 한때 황제의 반려였던 클레멘보다 아시카가 짊어져야 할 위험이 더욱 크다. 그러나 아시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도행을 결정했다.
두렵다고 머뭇거리는 순간 또 한 번 그녀의 세상이 뒤집힐 수도 있었다. 모르고 당했던 그때보다 더욱 비참하고 끔찍하게. 그렇기에 아시카는 이 일의 주도권을 누구에게도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르쉬아가 올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레이디 마제스.”
자신에게 거는 주문과도 같았다. 아니 주문이 아니라 드루쉬아는 반드시 올 것이다. 어떤 문제가 생긴다 해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말이다.
긴장 가득했던 얼굴에서 불안이 녹아내렸다. 괜찮다고 말하는 아시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잔느입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서 잔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오라고 했어요. 괜찮을까요?”
“네, 이그레인 소공작님.”
아시카는 클레멘의 동의를 구한 뒤 문을 열었다. 잔느와 함께 미아가 꼬리처럼 찰싹 붙어 따라 들어왔다.
잔느는 이제 막 옷을 갈아입고 펄번과 함께 성내를 돌아볼 예정이었다. 호위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기본 절차였다.
“소공작님, 무슨 일입니까?”
“잔느, 레이디 마제스와 함께 수도로 갈 거야.”
“네? 공작님도 안 계신 지금 말입니까?”
잔느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거기에는 일말의 불안도 섞여 있었다. 아시카가 또 뭔가 일을 저지르려 한다는 불안이.
“기다릴 시간이 없어. 오늘 중으로 출발할 테니까 준비해줘.”
“그럼…. 네, 알겠습니다.”
잔느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하다. 그러나 묻는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소공작님의 짐은 마릴린에게 준비하도록 이르겠습니다.”
“아니. 말을 탈 수 있는 사람만 함께 갈 거야. 여유 부릴 시간이 없어.”
한시가 급한 상황에 마차는 사치였다.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최단 시간 안에 수도에 도착해야 했다. 잔느는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어 시간 정도는 걸릴 겁니다. 아무리 급해도 겨울이라 준비를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중간에 여관 같은 숙소를 못 찾을지도 몰라.”
“네, 알겠습니다.”
재차 당부를 듣고 잔느는 걸음을 서둘렀다. 잔느가 방문을 여는 순간 반대편에서 문을 두드리려던 애거나이트가 멈칫했다. 그 뒤에는 드루쉬아의 보좌관인 미하일도 있었다.
애거나이트는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서며 입을 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수도로 가신다니요?”
“내가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을 했는가?”
대답 대신 아시카는 그의 무례를 지적했다. 조용하고도 차디찬 어조에 애거나이트는 흠칫 미간을 찡그렸다.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용인들과 인사조차 하지 못한 새로운 공작부인과 한때 탈리온 공작성의 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충신이자 기사단장인 애거나이트.
마주 보는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애거나이트는 아직도 이그레인에 대한 불만을 버리지 못했고, 아시카는 계속되는 가신의 무례를 눈감아 줄 생각이 없었다.
‘델피노 남작이 매운맛을 덜 봤구나.’
잔느는 속으로 혀를 차며 애거나이트가 하루빨리 포기하기를 바랐다.
다른 이들이 눈치만 보는 가운데 앞으로 나선 것은 미하일이었다. 애거나이트를 뒤로 툭, 툭 밀며 아시카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공작부인, 무례를 용서하세요.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미아와 아시카를 보고 사용인들이 동요했다. 드루쉬아가 큰일을 벌이고 있다는 걸 알기에 다들 불안해하던 참이었다.
애거나이트는 무슨 일인지 묻기 위해 왔다가 더 어이없는 대화를 듣게 된 것이다. 이 위험한 시국에 홀로 남은 공작부인이 공작성을 벗어난다니!
미하일은 애거나이트를 흘겨보고는 다시 아시카에게 고개를 숙였다.
“공작부인께 문제가 생겼다면 저희도 알아야 합니다. 무슨 급한 일이 생긴 겁니까?”
“들은 대로야. 준비되는 대로 바로 수도로 출발하려고 해.”
“말도 안 됩니다. 이 시국에 수도행이라니요. 각하께선 가문의 명운을 걸고 큰일을 벌이시는데 어찌 공작부인께서 이리 무모하게 나오십니까!”
애거나이트는 화를 참지 않았다. 드루쉬아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공작부인의 안전을 책임지라는 명령 때문에 성에 남은 터였다.
아시카는 싸늘한 웃음을 흘리며 애거나이트를 보았다.
“델피노 남작.”
고저 없는 목소리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상대를 긴장하게 만드는 서늘한 목소리였다. 기세에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애거나이트조차 그 고요한 냉기에 움찔했다.
“…말씀하십시오.”
“그대의 눈에는 내가 뭐로 보이는가?”
아시카가 나붓한 걸음으로 애거나이트에게 다가갔다. 애거나이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려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불과 세 걸음 앞, 아시카는 서로의 눈동자가 보일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멈춰 섰다. 덩치 큰 기사 앞에 선 모습이, 커다란 고목 앞에서 홀로 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갈대처럼 보였다.
뭘 하자는 걸까. 차마 불만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애거나이트의 미간이 좁아졌다.
“공작부인의 권위를 내세우고 싶으신 겁니까?”
“왜? 그리 주장하면 존중해줄 의사는 있고?”
돌려 말하는 법도 없었다. 아시카는 까만 눈동자를 차게 빛내며 애거나이트의 무례를 정면으로 받아쳤다. 잔느는 멀찌감치 떨어져 숨을 죽였다. 누구도 감히 나설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애거나이트의 얼굴에 울그락불그락 열이 오르내리고 몇 차례 볼이 실룩였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각하께서 공작부인을 모셔온 가장 큰 이유가 안전 때문입니다. 성내에 경비를 두 배로 늘렸고 공작부인의 동선에 배치된 인원만 해도 몇 명인 줄 아십니까?”
말하면서도 열이 받는지 애거나이트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철통 경비를 지시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각하께선 수시로 서신을 보내 안부를 묻고 계십니다. 그런 상황인데 공작부인께서 성 밖으로 나가시면 어찌 되겠습니까? 아무리 철두철미하게 호위해도 사고는 순간에 발생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합니까?”
차디찼던 아시카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날 걱정하는 건가? 아니면 나 때문에 곤란해질 탈리온의 주인을 걱정하는 건가?”
애거나이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의 감정은 여러모로 복잡했다. 가족을 잃은 뒤부터 오래도록 이그레인을 원망해왔다. 그가 감당해야 할 슬픔과 고통에는 언제나 이그레인이라는 실체가 있었고 그것은 꽤 편리한 수단이었다.
그렇게 원망해왔던 이그레인이, 아시카가 결정적인 순간에 드루쉬아와 네오렌 모두를 구했다. 공교롭게도 애거나이트는 그때마다 현장에 있었고.
그런 아시카가 공작부인의 자리를 꿰찬 것이 불만스럽고 동시에 묘한 안도감도 들었다. 그러니 제 감정이 원망인지 미움인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 저도 몰랐다. 애거나이트는 지금 그런 상태였다.
“제가 공작부인의 호위 책임자입니다. 조금의 위협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위험을 벗어날 방법은 없어, 델피노 남작.”
애거나이트는 아시카의 진중한 어조에서 불안한 기운을 읽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마이헬러 후작이 황태후를 이용해서 선수를 칠지도 몰라.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입궁해서 황제를 만나야만 해.”
“각하도 없이 혼자 입궁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자네 말대로 르쉬아는 위험 한복판에 있어. 그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들 셈이야?”
이건 모든 걸 내걸고 싸워야 하는 일이었다. 거기에는 아시카 자신의 안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회를 놓치면 더 큰 후폭풍이 돌아올 거야. 그때는 우리만 위험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테고.”
“각하께 지급으로 전서구를 날리겠습니다. 이틀만 기다려주십시오.”
애거나이트는 쉽게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무리 상황이 심각해도 그에게는 우선순위가 있었다.
답답할 정도로 융통성 없는 모습에 아시카도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르쉬아가 뭐라고 지시를 내리고 갔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애거나이트가 머뭇거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공작부인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고.”
“그리고?”
한 걸음 더 거리가 좁아졌다. 저보다 한참 작은 여자가 어찌나 대쪽같이 꼿꼿한지, 애거나이트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