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35화 (135/153)

#135.

낙엽이 쌓여있는 사이사이 살얼음이 얼었다. 푹신했던 숲길도 얼어붙어 아차하는 사이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사냥꾼 둘은 서리가 내려앉아 하얗게 말라붙은 잔가지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쉿, 조용히 있어 봐.”

앞서가던 사냥꾼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숙였다.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 숲속이었다. 냉기가 가시고 어디선가 온풍이 불어왔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저기, 약초꾼의 오두막이 아닌가?”

“불, 불이 났어!”

“쉿!”

온풍과 함께 매캐한 탄내가 코끝에 파고들었다. 사냥꾼 둘은 황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저, 저놈들. 저거 저쪽 영지에서 온 게 아닌가?”

매캐한 연기를 뿜어대던 오두막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그 주위로 익숙한 제복을 입은 이들이 무장을 갖춰 입고 배회하는 중이었다.

삐익, 하고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신호음을 듣고 주위를 살피던 이들이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들킬까 봐 몸을 낮추고 있던 사냥꾼 둘은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저, 저놈들이. 드디어 사달을 냈네. 사달을 냈어.”

영지의 주민은 다른 영지에서 허가 없이 자원을 채취하거나 사냥을 할 수 없다. 때문에 두 개의 영지가 인접한 곳에 사는 이들은 종종 분쟁에 휘말리곤 했다. 아무리 법으로 금지해도 감시가 소홀한 곳을 노려 타영지를 침범하는 이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양쪽 영지에서 연이어 신고가 들어간 참이다. 그로 인해 병사들의 순찰도 부쩍 늘어난 상황. 지금 두 사냥꾼이 머물고 있는 땅은 탈리온 영지의 북쪽 끝자락이었다.

사냥꾼들은 황급히 산을 내려가 마을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무장한 마이헬러 영지의 순찰대원들이 영지민을 해쳤노라고.

같은 사건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영지 경계의 주민들은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영주성에도 진작에 신고가 들어가서 이쪽에서도 순찰하는 병사가 늘어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터졌다. 메마른 찬 바람이 불던 새벽, 영지 경계에 있던 마을 하나가 화마에 휩싸인 것이다. 도망치던 마이헬러의 병사를 생포한 뒤부터 사태가 급작스럽게 악화되었다.

임시 막사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기습이다!”

경계 근무를 서던 병사들이 막사 곳곳을 누비며 소리쳤다. 한쪽에서는 물을 날라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고 한쪽에서는 날아드는 화살을 피해 병사들이 몸을 숨겼다.

중심에 있는 가장 큰 막사에서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뛰쳐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봐, 어떻게 된 거야! 보고부터 해!”

“어두워서 적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저쪽에는 그럴 만한 병력이 없어! 기껏해야 감시초소의 보초병 몇이 다잖아!”

“그, 그게…. 저기를 보십시오!”

막사를 에워싼 숲 언저리에서 횃불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게 뭐야?”

사내의 눈은 경악으로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주둔지의 규모는 작지 않았다. 그런데 그 공간을 충분히 에워쌀 만큼 넓은 범위에서 수백 개의 횃불이 다가오고 있었다.

날아오던 화살이 멈추고 마침내 숲의 경계에서 말을 탄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그 뒤를 이어 횃불을 든 병사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쓸데없는 저항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검을 뽑으려던 사내에게 경고했다.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검은 망토에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는 밝은 금색의 머리칼. 짙은 회색의 갑옷을 걸친 각 잡힌 체구가 유난히 크다. 말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주눅 들게 하는 남자였다.

“타, 탈리온 공작님?”

“나를 아는가?”

드루쉬아는 본 적 없는 상대가 그를 알아보았다. 아니, 어쩌면 한두 번쯤은 마주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탈리온이 남의 영지를 침범하다니요!”

“말은 바로 하게. 먼저 시작한 것은 그쪽이야.”

“무슨 말씀입니까?”

“얼마 전 영지 경계에 있는 마을에 불을 질렀지?

상대는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껌벅였다. 얼마 전 탈리온 영지의 경계에서 큰불이 났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이 지금 상황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드루쉬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주둔지 막사를 둘러보았다. 불은 금세 진압되었고 놀란 병사들이 몰려와 탈리온의 병사들과 대치하는 중이었다.

“자네가 이 부대의 책임자인가?”

검은 머리칼의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이다.

“자네의 주인에게 전하게. 탈리온은 불법 침입을 감행한 마이헬러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어.”

“무, 무슨 그런…, 억지요! 우린 그런 적이 없어! 싸우려고 온 것도 아니라고. 우린 단지….”

“단지? 뭘 하려고 여기까지 왔지?”

사내는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드루쉬아는 눈을 번뜩이며 재차 추궁했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이대로 영지전을 선포할 걸세. 탈리온의 군대와 맞서 싸울 텐가?”

드루쉬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할 테면 해보라는 비웃음이 섞인 조소였다. 사내는 아득해지는 시야를 다잡았다.

‘이건 덫이다!’

* * *

“이게 무슨 소리야? 영지전이라니? 전투라니? 그럴 만한 병력이 어디 있어!”

마이헬러는 영지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탈리온에게 맞서 영지전을 치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소식을 전하러 온 에르윈도 황망한 얼굴이었다.

“전투 중이라고 급보가 왔습니다. 분명 저희 병사들과 탈리온이 영지 경계에서 싸우고 있다고….”

“왜 그걸 이제야 알려!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전서구를 보냈어야지!”

마이헬러 후작은 에르윈의 손에서 거칠게 서신을 낚아챘다. 작은 종이를 펼쳐보던 후작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이게 무슨….”

“왜 그러십니까?”

“왜 이 작자가 서신을 보낸 거냐? 설마 지금 영지전을 치르고 있다는 게 이놈들이야?”

그제야 에르윈은 상황을 깨닫고 경악했다.

“왜 국경 마을에 은신해 있어야 할 놈들이 가문의 이름을 걸고 탈리온과 싸우고 있느냔 말이다!”

쩌렁한 목소리가 서재 안을 울렸다.

마이헬러 후작은 어떻게든 탈리온을 밀어내고 대공령에 입성할 계획이었다. 허가받은 병력의 수가 적은 만큼 이그레인처럼 용병을 장기 고용하거나, 병력의 수가 많은 타 가문의 병사를 빌려와야 한다.

둘 다 원치 않았던 후작은 수족으로 부릴 사병을 길러왔다. 오래도록 공을 들인 만큼 기회가 닿으면 가문의 정식 기사들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이제 병력을 잃는 것은 둘째치고 비밀리에 사병을 키워왔다는 사실이 발각될 터였다.

“설마 이동 명령을 내린 거냐? 네가 그랬어?”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아버지.”

에르윈의 얼굴은 창백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비의 뜻을 거슬러 살아본 적이 없던 그였다. 더구나 에르윈에게는 그럴 만한 지휘권조차 없었다.

“그럼 왜 허락도 없이 이놈들이 제멋대로 병력을 움직여….”

불현듯 머리를 후려치는 깨달음이 있었다. 자신의 명령 외에는 받지 않는 병사들의 갑작스러운 이동과 전투 소식. 기시감이 든다. 지나치게 교묘하고 익숙해서 기가 막혔다.

“탈리온…, 그 망할 놈의 탈리온 공작….”

후작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어디서 빈틈이 생긴 걸까. 누가 이런 대범한 짓을 저질러 저를 농락한 것일까. 머릿속으로 그간 곁을 지켜온 시종과 하녀들, 최측근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한 사람이 떠올랐다. 미천하고 미천해서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사람이. 언제든 제 뜻대로 부리고 내쳐버릴 수도 있었던 하찮은 존재가.

으득, 어금니를 사려 물고 잇새로 말이 새어 나왔다.

“샤프리,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느냐.”

“지난번에 아버지께서 별장으로 보내셨지 않습니까.”

“계속 거기 있었다고?”

후작의 추궁에 에르윈은 바짝 긴장했다. 샤프리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숨죽여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이 불과 얼마 전 일이었다. 부친의 화가 또다시 샤프리에게 향할까 봐 초조하게 답을 이어갔다.

“얼마 전에 필요한 짐을 챙긴다고 잠시 들렀다가 다시 갔습니다. 지난번에 하녀들이 짐 챙기는 것을 잊어서….”

“당장….”

마이헬러 후작의 눈에서 광기와도 같은 빛이 번뜩였다.

“찾아와. 샤프리, 그 발칙한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손으로 선택해 그의 손에서 길들여왔다. 그런데 제 쓸모를 다해버린 사냥개가 주인을 물었다.

“당장 찾아오란 말이다!”

쩌렁한 고함 소리에 에르윈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로 서신을 쥔 후작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 *

탈리온의 공작성에 소식이 날아든 것은 그로부터 불과 이틀 뒤였다. 기다리던 드루쉬아의 소식 대신 날아든 전서구는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아시카는 아직 다 풀지도 못한 짐을 뒤로하고 침실을 나섰다. 겨울 가운조차 걸치지 않아서 문밖에 있던 미아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마님, 날씨가 추워요. 감기 걸리면 어쩌시려고….”

“잔느는 어디 갔어?”

미아의 염려 가득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시카는 초조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탈리온의 영지까지 함께 온 제 사람들을 찾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 연무장에 계셨는데, 숙소에 들렀다 온다고 잠깐 자리를 비우셨어요.”

“나일과 펄번은?”

“사람을 불러 찾아오라고 할까요?”

“당장 내 응접실로, 아니 레이디 마제스가 머무는 방으로 오라고 전해.”

‘레이디 마제스? 누구였더라?’

기억을 곱씹느라 미아의 연갈색 눈동자가 세모꼴이 되었다.

“아, 그분요. 네. 그리 전할게요.”

아시카가 탈리온 공작성에 입성한 직후 나일과 함께 온 정체불명의 중년 여인. 도착하던 날 이후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아서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던 손님이었다.

미아가 황급히 뛰어가는 것을 보며 아시카는 손님방의 위치를 떠올렸다. 탈리온의 본성은 지어진 지 수백 년이 된데다 전쟁을 대비해 만들어진 곳이라서 구조가 복잡했다.

“어, 어….”

“마님, 안녕하십니까.”

복도를 지나던 하인 몇 명이 아시카를 발견하고 급히 허리를 숙였다. 드루쉬아 없이 아시카 혼자 공작성에 입성하는 바람에 정식 인사도 하지 못했다.

때문에 본성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아시카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다만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을 지닌 흔치 않은 외모의 소유자라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3층에서 1층으로, 1층에서 다시 2층으로 헤맨 끝에 아시카는 손님방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손님은 안에 계시는가?”

“네, 고해드릴까요?”

클레멘의 방문 앞에도 호위가 있었다. 감시가 아닌 보호 차원에서 배치한 것이다. 아시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가 문을 두드려 주인의 방문을 알렸다.

“아, 이그레인 소공작님.”

테이블 의자에 앉아 책을 보던 클레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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