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아시카는 거울에서 손을 거두고 간신히 걸음을 떼었다. 위태로운 걸음에 드루쉬아가 웃음을 멈추고 아시카에게로 향했다.
“아가씨, 안 돼요. 끝날 때까지는 그대로 계셔야 해요.”
“잠시만 쉬면 안 될까?”
답지 않게 아시카의 입에서 우는 소리가 나왔다. 황궁 연회에 참석하려고 아침 한나절 내내 준비에 몰두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릴린은 아시카의 옷자락을 잡고 놓지 않았다.
“거의 끝나가요. 조금만.”
“저기….”
열려 있는 문 너머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장백의를 걸친 상대는 예식을 돕기 위해 대신관을 따라온 사제였다. 하녀 하나가 황급히 문을 가로막고 섰다.
“사제님? 무슨 일이신가요?”
“서약의 제단 위에 올릴 증표를 가지러 왔습니다.”
서약의 제단. 결혼 예식에서 신부와 신랑이 준비된 증표를 나누며 평생을 약속하는 자리였다. 아시카는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반지는 아까 보냈는데?”
“하나가 더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가 더 있…. 아!”그제야 생각이 났다. 귀족들의 예식에서 결혼을 주도하는 귀부인들이 미리 준비해놓는 형식상의 증표. 그러나 아시카에게는 형식상의 증표가 아닌 진짜가 있었다.
“손수건.”
드루쉬아가 청혼선물로 건넨 손수건. 두 사람의 풀네임을 자수로 새겨 놓은 소중한 물건이었다.
‘내가 그걸 어쨌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요 며칠 정신이 없어서 어디 두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히 수도에서 따로 챙겨 왔는데.’
혹시 잃어버릴까 봐 개인 소지품으로 직접 챙겼더랬다. 하필 드루쉬아가 있는 자리에서 청혼선물을 잃어버리다니. 아시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릴린. 수도에서 올 때, 보석함을 너에게 맡겼었지?”
“네. 아가씨 드레스룸의 금고에 모두 넣었는데요.”
“거기에 혹시 손수건이 있었어?”
“그건 아가씨께서 따로 챙기셨는데요.”
마릴린은 드루쉬아와 아시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맞다. 다른 사람 손이 타는 것이 싫어서 내내 제 손에 있었던 물건이었다.
“드레스 좀 잡아봐. 찾아야겠어. 내 침실에 있을 거야. 분명히….”
“아앗, 아가씨. 안 돼요! 드레스를 그렇게 막 다루시면….”
아시카는 풍성한 드레스를 한껏 들어 올리며 당장 자리를 떠날 기세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드루쉬아가 아시카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시카, 진정해. 신부가 아무 데나 돌아다니면 안 되잖아.”
“아무 데나가 아니라 내 침실이에요.”
“그 드레스를 입고는 혼자서 아무 데도 못 가.”
“찾아야죠. 분명히 거기 있어요.”
예상보다 격한 반응에 드루쉬아는 기묘한 얼굴이 되었다.
아시카는 본래 쉽게 동요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천성이 그러했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아아, 잠깐 놀려주려고 했던 건데.”
드루쉬아는 제복 안쪽 주머니에서 하얀 천에 쌓여있는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르쉬아!”
“미안, 미안해.”
“세상에, 이걸 언제 가져간 거예요?”
아시카는 손수건을 건네받고 서명을 확인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왔다.
“음, 어제 침실에 갔다가 보이길래.”
드루쉬아의 대답에 아시카는 황급히 입을 닫고 마릴린은 못 들은 척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아시카는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땀이 차는 얼굴을 식혔다.
“아, 이건… 하여간 장난이 심했어요.”
“뭘 그렇게 놀라? 손수건 한 장 없다고 결혼식이 어떻게 되지는 않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입매가 한껏 올라갔다. 드루쉬아는 푸슬푸슬 웃으며 아시카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드레스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슬며시 허리를 매만진다.
아시카가 정신을 수습했을 때는 파란 눈동자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녀가 물러나려고 하자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몸을 뺄 수 없게 되자 아시카는 고개를 한껏 뒤로 뺐다. 드루쉬아의 상체도 그녀를 따라 함께 기울었다.
“르쉬아, 나 화장….”
“어차피 다시 손 봐야 할 것 같은데?”
느른하게 다가오는 입술에서 뜨거운 숨결이 새어 나왔다. 조금 전보다 더욱 짙어진 푸른 눈동자가 아시카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 보며 넘실거린다.
“너무 예뻐서 그래.”
너무 예뻐서. 주문 같은 속삭임이 아시카의 귓가에 감겼다. 미약한 저항은 달콤한 주문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촉, 촉. 가볍게 닿던 입술이 아쉬움을 이기지 못하고 진하게 달라붙는다.
“…으응….”
서로의 타액이 엉키며 질척한 소리가 들리고 한숨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화장이 망가진다는 생각은 아시카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드루쉬아의 팔은 더 힘주어 그녀를 당겨 몸을 겹쳐 안았다.
당황한 하녀들이 시선을 돌리고 존재감 없는 사제도 민망한 광경을 피해 등을 돌렸다. 밖에서 지키고 있던 기사 둘은 갑작스러운 침묵에 문 안쪽을 들여다보았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태양처럼 빛이 나는 신부와 그 태양을 집어삼킬 듯이 품어 안은 신랑이었다.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둘은 하나였다.
소란스럽게 울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어느새 고요해진 연회홀을 걸어가면서 아시카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나란히 마주 앉아 저를 바라보는 수백 명 귀족들의 얼굴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그리고 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아시카는 이 길을 처음 걷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저도 모르게 시선이 흐트러졌다. 고통스러운 기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기억 속에도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추억이 숨어있었다.
이 자리에는 없는, 그러나 한때는 있었다고 믿어지는 부친의 모습을 찾아 저도 모르게 주위로 시선을 옮겼다.
‘아버지가 계셨었어.’
평안하게 나이가 들어가던 부친의 모습 대신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조부 웨이브였다.
제 것처럼 느껴지는 기억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현실. 제단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아시카의 얼굴은 핏기를 잃었다.
‘아시카.’
소리 없이 움직이는 입술이 그녀를 부른다. 아시카는 용케도 그 부름을 알아듣고 고개를 들었다. 바로 맞은 편에서 그녀와 함께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은 드루쉬아였다. 평소보다 깊어진 푸른 눈동자가 다정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르쉬아.’
아시카의 입술도 작게 움직였다.
‘괜찮아.’
드루쉬아는 재차 조그맣게 속삭였다. 조용조용 다독이는 다정한 얼굴이 곱게 웃는다. 연회홀의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드루쉬아의 얼굴에만 머무는 느낌이었다. 정말로 모든 것이 좋아질 거라는 약속처럼.
소리 없는 위로가 더욱 크게 들려서, 결혼을 주관하는 대신관의 서약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아시카는 대답 대신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식의 순서에 따라 반지를 나눠 끼고 서약의 제단 위에 올려진 두 사람의 오른손이 맞닿았다. 서약의 증표인 손수건으로 겹쳐진 손을 감싸고 서로의 왼손을 얹어 맹세의 서약을 읊는다.
“당신은 나의 하늘이며, 나의 태양이며, 나의 생명이라. 당신을 나의 반려로 맞이하여 내 시간이 다하는 그 날까지 우리는 함께임을 약속합니다.”
드루쉬아의 깊은 저음의 목소리가 진중한 어조로 서약문을 읊는다. 아시카의 입술에서도 같은 서약문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나의 하늘이며, 나의 태양이며, 나의 생명이라. 당신을 나의 반려로 맞이하여 내 시간이 다하는 그 날까지 우리는….”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덜컹, 연회홀의 정 중앙에 있는 문이 열렸다. 아시카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홀의 문 쪽으로 향했다.
열린 문틈으로 숨을 헐떡이며 뛰어든 사람이 있었다. 탈리온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으로 무장한 전령이었다.
최대한 조심하려고 한 모양이지만 엄숙한 예식장의 시선은 온통 기사에게 쏠렸다. 만약을 대비해 예식장에 출입을 허락받은 이였다. 내성의 호위들조차 막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급박하다는 의미였다.
아시카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것 때문이었구나.’
예식이 시작되기 전 드루쉬아가 찾아와서 해준 이야기가 있었다. 만약의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크흠, 신부께서는 서약을 계속해주십시오.”
아시카는 그제야 다시 시선을 드루쉬아에게로 옮겼다.
“…내 시간이 다하는 그 날까지 우리는 함께임을 약속합니다.”
약속을 읊조리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서약이 다시 심장으로 흘러들어온다.
아시카와 드루쉬아는 이 서약을 지켰다. 끝끝내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때까지도, 피할 수 없었던 죽음에서조차 둘은 함께였다.
그리고 또다시 맹세를 읊는다. 그 모든 기억을 안고 되새기는 서약은 그녀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것이었다.
바르르 떨리는 아시카의 손을 드루쉬아가 힘주어 잡았다. 그는 여전히 같은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사랑해.’
마법 같은 한마디가 그녀의 불안을 잠재웠다. 아시카는 긴 숨을 내쉬며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결혼식을 진행 중인 두 사람과 뜬금없이 찾아든 기사를 오갔다. 뭔가 벌어졌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불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로써 두 사람은 신의 권위와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의 권위로 인정받은 부부임을 선포합니다.”
대신관의 선언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연회홀의 문이 또 열렸다. 탈리온의 기사 둘이 더 안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먼저 들어와 있던 기사만큼이나 그들의 표정도 다급해 보였다.
아시카는 예식을 돕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사제에게 손짓했다.
“이것 풀어주고. 전령으로 온 기사들에게 오라고 해주세요.”
“아시카.”
“미안한 얼굴 하지 마요. 예상했던 일이잖아요.”
웅성거리는 하객들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신호를 받은 전령은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과 함께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드루쉬아는 다가오는 전령에게 말을 건넸다.
“상황 보고해.”
“네. 영지 접경지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생각보다 저쪽 병력의 규모가 큽니다.”
“마을 사람들은?”
“진작에 철수했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병력은 움직이고 있나?”
“네. 이틀 안에 적과 조우하게 될 것 같습니다.”
언제 왔는지 애거나이트가 검을 건네고 있었다. 드루쉬아는 결혼 예복 위에 그대로 검을 차고 아시카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불안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난 괜찮아요. 다녀와요.”
얼른 가라고 채근하는 아시카의 손을 커다란 손이 허공에서 그러쥐었다. 드루쉬아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쥐고 조금은 급하게, 그러나 조심스럽게 아시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촉, 하고 말캉하고 따뜻한 감각이 이마에 남는다. 드루쉬아는 그녀의 입술에도 가볍게 입을 맞추고 한발 물러났다.
“빨리 돌아올게. 또 혼자 둬서 미안해.”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남기며 드루쉬아가 돌아섰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기사들에게로 다가가는 발걸음이 다급하다.
아시카는 떠나가는 드루쉬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또?”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강렬한 충격이 이어졌다. 충격 뒤에는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도 함께였다.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찬란한 햇살 속으로 사라지는 드루쉬아의 모습도 함께 흐려진다.
“그래, 또….”
아름다운 신부는 울면서 웃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저 혼자만의 싸움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처음부터 드루쉬아는 함께였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내 그러할 터였다.
그래서 웃었다. 기억 속의 상실이 고통스러워서, 흐르는 눈물을 통렬한 웃음으로 삼켜버렸다. 마음속에서 내내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있던 불안감이 희망으로 바뀌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