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초대 가주의 초상화가 그려진 액자는 빛이 바랜 미색이었다. 나무도 아니고 금속도 아닌 것이 상아를 조각해 이어붙인 것처럼 투박하고 독특했다.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아시카는 액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만지작거렸다. 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청보랏빛 보석을 매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액자를 바라보면서도 아시카의 얼굴은 내내 굳어진 채였다.
준비할 새도 없이 급작스럽게 이뤄진 황제와의 만남. 거기서 탈리온은 황당하리만치 쉽게 황제에게 병력을 빼앗겼다. 제 생살을 뜯긴 것처럼 속이 쓰렸다. 드루쉬아가 동요하지 않으니 자신이 나서서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좀 더 대비했어야 했는데.’
귀족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제대로 정보를 듣지 못했다. 결혼 준비를 하느라 소홀했다는 생각에 자책이 들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바다처럼 깊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매번 깨닫는 거지만.”
드루쉬아는 닿을 듯 말 듯 얼굴을 가까이 한 채 말을 이었다.
“무슨 생각이 이렇게 많은 거야?”
오늘도 생각에 빠진 연인에게 뒷전으로 밀려난 남자의 핀잔이었다.
“황제는 이러려고 귀족들이 동요하는 걸 내버려 뒀을 거예요. 적당한 빌미 거리를 기다렸겠죠. 이렇게 눈뜨고 코 베인 적은 처음이라 당황스럽네요.”
“가문의 신물을 돌려받았잖아.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그 가문의 신물에 대해 드루쉬아는 관심이 없었다. 딱히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 여태껏 내버려 둔 것이 아닌가. 황태후가 샤프리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돌려준다고 했을 때도 거절했던 드루쉬아였다.
“그건 그렇지만, 너무 쉽게 포기한 게 아닌가 해서요.”
“마음에 안 드는 거래였나 보군. 사업하는 집안이라서 그런가.”
“그게 무슨 거래예요? 원래 탈리온의 것을 돌려주면서 선심 쓰는 것처럼 대놓고 물어뜯어 간 거잖아요.”
“푸흡.”
드루쉬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시카의 불만이 노골적이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물어 뜯어가?”
“아닌가요? 생살이 뜯긴 기분인데?”
드루쉬아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시카가 이렇게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매년 협의 테이블에서 그에게 휘둘릴 때도 이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걸 그렇게 싫어하면서, 그동안 나한테는 왜 져줬어?”
“그거야….”
드루쉬아가 작정하고 이그레인을 닦달했던 이유 뒤에는 가신들의 불만이 있었다. 드루쉬아는 그걸 협의 테이블에서 최대한 이득을 취하는 것으로 대신했고. 아시카 역시 그 사실을 알았기에 굳이 싸우려 들지 않았다.
“이건 전혀 다른 문제예요. 이그레인은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거래는 하지 않아요.”
“거래가 아니라 전략이라고 생각하면 달라지지.”
“무슨 말이에요?”
“나도 아직 답을 기다리는 중이라서. 확실해지면 얘기해줄게.”
아시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드루쉬아가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설령 그 대상이 황실이라 해도.
‘당한 만큼, 아니 곱절로 갚아줄 사람이지.’
잠시 동안의 침묵.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이 좁은 마차 안을 울렸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마도 마차를 타고 온 내내 그랬던 모양이다.
아시카는 열 오르는 얼굴을 슬쩍 돌리며 화제를 돌렸다.
“신석은 귀한 물건이 아니었나요? 왜 이걸 굳이 액자에 끼워 넣었을까요?”
신에게서 건네받았다는 네 개의 신석, 그걸 박아서 만든 네 개의 신물. 지니기 편한 더 좋은 형태가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액자였을까. 사소한 의문이 들었다.
“당시에는 나름 큰 의미가 있었으니까 초대 가주의 모습 속에 박제한 것이 아닐까.”
오랜 세월 탈리온은 신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신석의 힘. 그리고 탈리온의 신석은 비극을 건너 아시카에게 넘어왔다.
지나치게 생생해서 이제는 기억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환각이었다.
‘만약 그 죽음이 진짜였다면?’
손끝의 피가 차게 식고 온몸에 오한이 든다. 그러나 본능 밑바닥부터 넘실대던 공포는 더 강한 의문을 불러왔다.
왜 살아난 것이 저였을까. 탈리온의 물건이라면 살아 돌아와 이 모든 진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드루쉬아였어야 하지 않을까.
“왜 그래? 할 말이 있어?”
“아니, 아니에요.”
오르락내리락 감정이 널을 뛰었다.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여전히 저를 바라보는 드루쉬아를 마주하고 한기가 잦아들었다. 그의 얼굴에 의문이 어리는 것을 보며 아시카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황실에는 신물이 없는 걸까요?”
“진작에 잃어버렸다는 소문이 있었어. 그러니까 수백 년째 본 사람이 아무도 없지.”
“신물에 있는 신석이 이것과 같은 형태라고 했죠?”
황제가 했던 말이었다. 온전한 보석이 아니라 깨어진 것처럼 손상되어 보이는 형태.
“그 말이 사실이면 황실의 신석도 힘을 잃었다는 거잖아요. 신석을 언젠가 사용했었다는 의미겠죠?”
“그러고 보니 그렇군.”
드루쉬아는 아시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했다.
“건국신화에 기록된 게 다가 아닐 수도 있어. 황실의 신석을 사용했다는 기록이나 그걸 훼손했다는 기록 같은 건 없으니까.”
“두 번째 기적이 행해졌을 때, 건국 당시보다 곱절이 넘는 황무지가 초지로 변했다고 했어요. 이후 황실에서는 황금안의 명맥이 뚝 끊겼고 변방에 있던 마이헬러는 갑자기 후작으로 승작되었죠.”
“신화 속에서 말해지는 두 번째 기적을 위해 두 개의 신석이 사용되었다고 보는 건가? 마이헬러는 황제에게 신석을 바친 대가로 작위를 얻어냈고?”
“건국 때보다 더 큰 힘이 작용한 거예요. 그 덕에 왕국이 제국으로 급부상했죠. 마이헬러는 작위뿐 아니라 대규모 영지까지 받고 가문의 위상이 달라졌고요. 칭제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공신 가문으로 역사에 기록이 남을 만큼 말이죠.”
열심히 답을 유추하는 아시카를 보며 드루쉬아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나는 별로 관심 없던 가문의 역사인데. 참 끈질기단 말이야.”
“당장 눈에 보이는 건 빙산의 일각일지도 몰라요.”
언제부터인가 더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결혼이 결정되었을 무렵부터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 채 비극으로 치달았던 기억은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악몽을 꾸지 않는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서를 찾고 연결 짓는 것뿐이에요. 그러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거고요.”
아시카의 어조는 진중했다. 차마 더는 농담을 건넬 수 없을 만큼.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손에서 액자를 잡아 옆으로 치우며 가까이 앉았다.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 있게 되었지.”
그러니 자신의 결정은 옳았다고, 드루쉬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손을 끌어 입을 맞춘다.
의미 모를 속삭임과 애잔한 미소. 어쩐지 평소와 다른 느낌이 들어 아시카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췄다.
“뭐죠?”
“아직 도착하려면 더 가야 할 텐데.”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손을 내려놓으며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잔느가 말을 몰아 마차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공작님,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잠시 밖을 좀 봐주시겠습니까?”
“무슨 일이야?”
열린 창문 밖으로 누군가 말을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호위들이 막지 않는 걸 보면 아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적어도 한 사람은 아는 이였다.
“나일?”
아시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나일은 두꺼운 겨울용 후드 망토를 걷으며 얼굴을 드러냈다. 조금은 거칠해진 얼굴이었다.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거야? 왜 그동안 소식이 없었어? 무슨 일 있었어?”
“잠시만요, 아가씨. 얘기는 안에서 하면 안 될까요?”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질문에 나일은 잠시 당황했다. 평소 차분하던 아시카의 모습이 아니었다. 미처 말을 하지 못하고 떠났는데 이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시카의 시선은 나일의 뒤쪽으로 향했다. 말을 타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은 분명 여자였다.
“함께 있는 사람은 누구?”
“밖에서 할 얘기가 아니에요. 신분은 제가 보증할게요.”
동행을 발견하고 드루쉬아의 눈이 커졌다. 놀라움과 안도가 찰나에 스쳐 간다.
“안으로 들지. 먼 길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르쉬아, 아는 사람이에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아리송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드루쉬아의 얼굴이 밝아지는 걸 보면서 아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일과 동행은 말을 호위 기사들에게 넘기고 마차로 다가왔다. 후드 망토를 깊게 눌러쓴 여자는 나일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라탔다.
옷차림은 수수했지만 에스코트를 받는 몸짓이 자연스럽고 우아하다.
‘귀족?’
여자는 마차의 문 근처에 조심스럽게 앉아 드레스 자락을 정리했다. 드레스 끝단에 묻은 먼지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자세를 정돈하고서야 후드 망토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회색 머리칼을 틀어 올린 여자는 수수한 옷차림에도 기품이 숨겨지지 않는 중년 여인이었다.
아시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 든 탓이다.
막상 마차에 올라타자 나일은 망설였고 여자는 긴장한 얼굴이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시카였다.
“혹시 나일의 어머니? 네드로프 자작 부인이신가요?”
나일은 놀라 혀를 깨물뻔했다. 여자 역시 놀란 얼굴이었다.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아시카는 황급히 덧붙였다.
“아니라면 죄송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당황한 나머지 나일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아시카는 의아한 표정으로 드루쉬아를 돌아보았다. 제 생각에 동의를 구하는 듯.
“머리 색도 같고, 그냥 느낌이 그런데. 안 그래요, 르쉬아?”
드루쉬아는 가만히 턱을 쓸며 나일과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머리색 말고 두 사람은 닮은 구석이 없어 보였다.
‘아시카가 눈썰미가 좋은 건지, 내가 둔한 건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나일이 곤란해하는 사이 여자가 아시카와 드루쉬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탈리온 공작님과 이그레인 소공작님께 인사 올립니다. 마제스 백작가의 클레멘입니다.”
잠시 아시카의 시선이 여자에게 머물렀다. 왜 갑자기 마제스 백작가의 이름이 나오는지 이해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순간 놀라 입이 벌어졌다.
“아….”
“공작님, 미리 얘기가 된 게 아닌가요?”
나일은 아시카가 아무 얘기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황이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 소식을 기다리기는 했지만.”
드루쉬아는 클레멘에게 시선을 옮겼다.
주름진 작고 하얀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 보는데도 묘하게 낯익은 느낌. 아시카의 말대로 나일을 먼저 겪어봤기 때문일까.
“직접 오실 줄은 몰랐는데. 얘기 나누고 싶었습니다, 전 황후 폐하.”
“탈리온 공작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다시 마제스의 이름으로 돌아온 지 꽤 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죠, 르쉬아?”
“미리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정말로 전 황후 폐하이신 레이디 마제스인가요? 어떻게 여기까지…. 아니 그보다 왜 나일이?”
아시카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재차 물었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곧 얘기해 줄게. 우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전에 부탁이 있어, 아시카.”
직접 움직였다가는 마제스 백작가도 위험해질 수 있어서 나일을 설득했다. 그런데 폐황후가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이렇게 급작스럽게.
“시클레어 부인을 만날 수 있을까? 중요한 일이야.”
“이븐을요?”
아시카가 직접 표적이 된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한 이븐은 몹시 미안해했다. 그래서 당분간 아시카의 곁을 떠나 있겠다고 한 뒤 몸을 숨겼다.
그런 이븐의 상황을 드루쉬아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일까. 예상치 못한 만남과 드루쉬아가 계획하고 있는 일들.
아시카의 시선이 드루쉬아에게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일과 긴장한 클레멘의 얼굴을 차례로 스쳐 갔다.
“설마….”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사실 하나가 뒤늦게 떠올랐다. 아시카의 뒷덜미가 쭈뼛 곤두선다.
드루쉬아는 창백해지는 아시카의 얼굴을 보며 그녀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