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젊은 혈기란 참 좋아.”
먼저 입을 연 것은 황제였다.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곧 영지로 내려간다지?”
“황공하옵게도, 네. 그러합니다.”
아시카는 시선을 내리깔며 차분히 대꾸했다.
“제국의 넷뿐인 공작가 일세. 비밀 혼인 서약서라니. 탈리온 공작은 배짱도 좋아.”
“마음이 급해서 우선순위를 잊었습니다.”
드루쉬아의 대답에 황제의 입에서 허허, 실소가 흘렀다.
고위 귀족은 대게 결혼 전에 황제에게 사실을 알리고 축복을 받는다. 이는 제국의 권력이 황제로부터 비롯된다는 걸 상기시키고 이후에도 충성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절차였다.
물론 중앙 권력에서 먼 귀족들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이그레인과 탈리온은 여러모로 애매한 위치였다.
“부르지 않았으면 얼굴도 못 볼 뻔했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떠나기 전에 인사 올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럴 마음은 먼지 한 톨 만큼도 없었으면서 드루쉬아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 남자였다. 아시카는 속으로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부르신 연유가 결혼식 때문입니까? 만약 황후 폐하께서 바쁘시다면 저희가 찾아뵙도록 할까요?”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를 축복하는 것은 황제와 황후 두 사람이 함께하는 일이었다. 황후가 자리에 없으니 황제의 의중이 다른 데 있다는 의미였다. 아시카는 그것을 돌려 묻고 있었다.
“귀족원 회의에서 강력한 탄원이 올라왔네. 대공령에 대한 탈리온의 권한을 박탈하고 관리자를 바꿔 달라고 말일세.”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다. 대공령에서 철수하겠다고 한 건 드루쉬아였다. 그런데 귀족들은 책임을 추궁하기 위한 것인 양 교묘하게 말을 바꿔 황제에게 탄원서를 올렸다.
“내가 그 문제로 탈리온을 불렀던 적이 없다는 걸 아는가?”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날을 잡아 보고할 참이었습니다. 다만 당시 상황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차일피일 미루던 중입니다.”
드루쉬아의 대답에 황제가 허허, 하고 웃음을 흘렸다.
대대로 탈리온은 기사의 가문이라 충직하고 우직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잇속에 밝은 정치가처럼 능수능란하게 태도를 바꾸곤 했다.
“탈리온 공작은 기사가 맞지, 아마?”
“네. 열여덟 살 성인이 되는 동시에 서임을 받았습니다. 기사서임을 받지 않으면 탈리온의 공작위는 물려받지 못합니다, 폐하.”
황제도 알고 있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도저히 기사로는 보이지 않았기에 묻는 말이었다.
“대공령은 애물단지야.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폐하의 뜻을 받들 뿐, 신하는 이유를 따져 묻지 않습니다.”
“시시콜콜 따져서 계산해보고 손 떼겠다는 게 아닌가?”
귀족들의 탄원 이전에 드루쉬아가 철수하겠다고 선언한 것을 황제도 알고 있었다.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이유는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의자 팔걸이를 쥐고 있던 황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감히 내 앞에서 모후를 들먹일 셈인가?”
“황태후 폐하의 문제가 아닙니다.”
드루쉬아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상황을 토로했다.
“지금은 조용하지만 언제고 귀족들 사이에서 문제가 될 겁니다. 탈리온의 본분은 제국의 국경을 지키는 데 있습니다. 탈리온이 귀족들의 정치분쟁에 휘말리는 것은 저희뿐 아니라 제국의 국경마저 위태롭게 만들 겁니다. 그 전에 물러나고 싶습니다.”
“이그레인의 부담이 가중될 텐데?”
“저희는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이전에도 탈리온과 이그레인의 협력 관계는 그다지 밀접하지 않았습니다, 폐하.”
아시카는 차분한 어조로 황제의 질타를 흘려 넘겼다.
워낙 사이가 나빠서 대공령 문제에 있어서도 최소한의 관계만을 유지해 왔다. 그러니 아시카의 말도 딱히 틀린 건 아니었다.
토독, 톡. 황제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두드렸다.
드루쉬아가 내세운 이유는 설득력이 있지만 동시에 묘하게 말장난 같은 느낌이었다. 사기꾼의 설명이 그럴듯하게 들리면서도 찜찜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과거에 황제는 부친이 대공성에 집착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황족에게 내려진 저주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도. 황족에게만 내려온다는 병이 자신과 황태자를 모두 비켜 갔기에 더욱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에 선황제가 남긴 유언은 대공성을 절대 열지 말라는 당부뿐이었다.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이 될 거라면서.
선황제의 명령에 따라 대공성은 완전히 봉쇄되었고 수십 년 동안 안전했다. 그래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공령이라는 크나큰 짐을 이그레인과 탈리온에게 떠맡겼기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부친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병이 대공성을 중심으로 번져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으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대공령이 아닌 대공성이 문제라는 사실도.
“그래, 자네 말이 맞아. 탈리온은 국경을 지키는 것이 그 본분이지.”
탁, 하고 황제의 손이 팔걸이를 내리쳤다. 그때까지 아시카와 드루쉬아는 앉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지 못해서 내내 서 있던 참이었다.
“대공령에서 탈리온이 손을 떼는데 조건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폐하.”
“대공령에 주둔한 병력의 반을 황실에 귀속시키게.”
“폐하!”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낸 것은 아시카였다.
병력을 반이나 내놓으라니. 기사의 가문에서 기사와 병사는 곧 재산이었다. 사람을 구하고 병사로 훈련해서 쓸모 있게 만들고 그걸 유지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소모된다.
놀란 아시카와 달리 드루쉬아는 침착했다.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황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하면 대공령에 관한 문제도 더는 묻지 않으실 겁니까?”
“그동안 벌어졌던 모든 문제를 덮어라?”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까?”
황제의 시선이 아시카에게 옮겨갔다. 탈리온 대신 이그레인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계산하는 모양이었다. 드루쉬아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물론, 이그레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마 이 시국에 이그레인까지 대공령에서 손을 놓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저희는 지금의 상태를 유지할 겁니다, 폐하.”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얼굴을 살피고 바로 답을 내놓았다.
돌려 말하면, 관리자가 바뀌는 데 따른 추가적인 지원은 없다는 의미였다. 원래도 이그레인은 대공령에서 손을 뗄 생각이 없었다.
“폐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대신.”
드루쉬아의 대답에 아시카는 헛숨을 들이켰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대답할 줄 알았다. 아니면 협상을 시도하던지. 이렇게 쉽게 수긍할 줄은 몰랐다.
“대신 가문의 신물을 돌려주십시오.”
아시카는 고개를 들고 드루쉬아를 돌아보았다. 황제는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몇 달 전, 황태후 폐하께서 제 결혼선물로 가문의 신물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폐하의 뜻과도 상통한다 여겼는데. 맞지 않습니까?”
황제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그건 황태후가 드루쉬아에게 결혼을 압박하기 위해 꺼내든 수단이었다. 황제는 마지 못해 수긍했을 뿐이고.
“내 모후께서 그리 말씀하셨다?”
황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시카에게로 움직였다. 결혼 상대가 바뀌지 않았느냐는 무언의 추궁이었다. 아시카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쓸모가 없어 창고에서 방치되느니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편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황태후 폐하의 그 말이 진심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폐하.”
“내 모후께서야 진심이었겠지.”
그러나 그걸 부러 지적하는 드루쉬아의 태도가 묘하게 기분 나빴다. 황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래, 진작에 돌려줬어야 할 물건이었으니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야 마땅하지. 병사들을 인계받은 뒤 신물을 넘기도록 하지.”
“지금 돌려주십시오, 폐하. 그러면 저는 대공령 주둔군 절반에게 철수를 지시하는 동시에 병력 인계 명령서를 함께 보내겠습니다.”
“지금 바로 말인가?”
“겨울이 깊어질수록 이동이 힘들어집니다. 아직 눈이 오지 않았을 때 정리하는 편이 낫습니다. 어차피 절반의 병력이 남아있으니 황실에서 임시 관리자를 파견하면 관리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황제는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순순히 병력을 내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제국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한 가문에게서 강제로 병사를 빼앗아 갈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 협상을 시도할 줄 알았다.
그러니 지금 상황은 황제에게 유리한 것이 맞았다. 쓸모없는 탈리온의 신물 따위 진작에 버렸어도 아쉬울 것이 없는 물건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요구한 것은 자신인데 휘말리는 것은 드루쉬아가 아닌 자신이라는 이상한 기분이 말이다.
“탈리온 공작이 설마 거짓 약속을 하지는 않겠지.”
“물론입니다. 명령서는 오늘 내로 작성해서 보내겠습니다.”
황제는 피곤한 듯 고개를 저었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창고의 신물을 찾아오라는 지시를 내리고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여전히 아시카와 드루쉬아는 서 있는 채로 기다렸다. 처음 들어왔을 때 그대로 두 사람 모두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자세였다.
가신의 위치를 분명히 각인시키고자 함이었는데 두 사람은 목석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황제의 눈에는 그것조차 거슬렸다.
얼마 뒤 시종이 검은 벨벳에 싸여있는 물건을 들고 왔다. 손바닥 두 개를 펼쳐놓은 작은 크기였다.
“폐하, 찾으시던 물건이옵니다.”
시종이 내미는 물건을 황제는 받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 주인에게 가야 할 물건이야.”
황제의 가벼운 손짓에 그것은 드루쉬아의 손에 전해졌다. 작은 크기인데도 제법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내내 담담했던 드루쉬아조차 벨벳을 펼쳐드는 순간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40년 전, 선황제가 반강제로 빼앗아 간 가문의 유물. 그것이 드디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커다란 손이 검은 벨벳을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원래의 포장이 아니었는지 벨벳 천은 매듭 하나 없이 그냥 둘둘 말려있을 뿐이었다.
드루쉬아가 마침내 내용물을 꺼냈을 때, 아시카는 숨을 멈췄다.
‘그 액자가 맞아.’
그녀가 황궁 연회에 참석했다가 발견한 기이한 액자.
꿈이 아니었다. 정말로 액자는 존재했고 그녀를 환각으로 인도했던 신석도 액자 상단에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신석이 깨졌어. 그때 봤던 그대로야.’
신석이 깨진 것은 그녀가 겪은 환각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답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신석의 힘은 한계가 있으며 힘을 소모하고 난 뒤에는 이렇게 깨져버린다는 것이다.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드루쉬아의 반응을 살폈다. 긴장했던 것도 잠시뿐, 드루쉬아는 말없이 작은 액자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초상화 속의 남자가 탈리온의 초대 가주라지?”
“네. 아직 가문의 기반이 잡혀있지 않을 당시 최초로 그린 초상화였다고 합니다.”
드루쉬아의 손끝에서 먼지가 묻어났다. 얼마나 방치되어 있었는지 뽀얀 먼지가 굴곡진 장식 틈새마다 가득 차 있었다. 당장 가져오라는 황제의 명에 먼지조차 닦지 못하고 아무 천이나 대충 감싸서 가져온 것이다.
“여기 박힌 신석은….”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상태였네.”
황제는 드루쉬아의 말을 자르고 대답했다.
창고에 처박혀있던 탈리온의 신물은 황제의 관심 밖이었다. 몇 달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신물이 창고 밖에서 발견되었을 때 황궁에 잠시 소란이 일었다. 황제는 그때 처음 탈리온의 신물을 보았다.
드루쉬아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고 아시카는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아시카는 액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질문을 허한다.”
“황궁에도 초대부터 내려오는 신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금이 간 보석이었습니까?”
아시카의 질문에 드루쉬아가 돌아보았다. 어떤 연관성을 찾으려는 건지 흥미로워하는 눈빛이었다.
“흠.”
황제는 턱을 쓸며 잠시 고민했다. 그도 황실의 신물을 직접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별반 다르지 않아. 본래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고 하니까 그게 마땅하겠지.”
직접 본 적은 없어도 과거 황제들의 초상화에서 간간이 본 적이 있었다. 그마저도 이제는 창고 깊숙한 곳에 넣어 아무도 신물의 형태를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아시카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이어갔다.
“혹시 저희가 그 신물을 볼 기회가 있을까요?”
“황실의 물건이네. 황족이 아니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있지.”
황제는 단호하게 거절의 뜻을 밝혔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태양 같은 은혜로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시카는 깊게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귀해서 내보이지 않는 건지 잃어버려서 볼 수 없게 된 건지는 아무도 모를 일.
“내일 대공령으로 사람을 보낼 걸세. 서두른 것은 공작이니까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드루쉬아는 먼지 쌓인 액자를 다시 조심스럽게 천에 감싸 손에 들었다.
더는 말하기 싫은 듯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황실의 시종에게 하듯 격의 없는 태도에 기분이 상할 법도 하건만 드루쉬아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이 인사를 올릴 때도, 살롱을 나갈 때도 황제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황제의 머릿속에 때늦은 의문이 들었다.
탈리온은 왜 대공령의 병력을 철수시키려는 걸까. 철수한 병력으로 뭘 하려는 걸까.
‘쓸데없는 생각이야.’
황제는 방금 떠오른 생각을 곧 털어버렸다. 말 몇 마디로 잘 키워놓은 병사를 손에 넣었으니 황실로서는 어떻게 해도 이득이었다.
당장은 그렇게 보였다. 대공령 주둔 문제로 탈리온이 옛날보다 더 많은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기억 멀리 묻어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