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30화 (130/153)

#130.

저택의 정문에서부터 본채까지 이어진 키 작은 상록수의 잎사귀가 빛이 바랬다. 시린 겨울바람이 밤새 불어댄 탓이다.

이른 아침부터 밖에 나와 있느라 아시카의 손도 싸늘하게 식어갔다. 저도 모르게 차게 식은 손을 문지르며 숨을 불어넣었다. 시린 공기 속에 하얀 입김이 폭 새어 나왔다가 금세 사라진다.

‘아, 춥다.’

어느새 이렇게 날이 추워졌는지. 하는 것 없이 가만히 서 있어서 더욱 춥게 느껴지는 날씨였다.

‘외투라도 입고 나올걸.’

두꺼운 숄 하나만 두르고 나온 것이 후회되었다. 아시카는 앞깃을 여미며 분주하게 정원을 오가는 하인들을 지켜보았다.

이그레인 저택의 정원 한쪽에 짐마차가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아침부터 본채를 오간 하인들은 추운 날씨에도 땀을 뚝뚝 흘리며 짐을 날랐다.

“그건 저쪽 마지막 마차에 실어. 아니, 아가씨 소지품은 이쪽으로 가져오고.”

하녀장은 부산하게 움직이는 하인들 사이에서 물건이 섞이지 않도록 지켜보면서 이리저리 지시를 내렸다. 본채에서 날라온 상자는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작은 소지품을 넣는 가죽 상자에서부터 드레스를 보관하기 위해 빈틈없이 방수 처리가 된 상자와 무거운 집기를 넣은 커다란 나무 상자까지. 거기다 최근에 탈리온에서 보내온 고가의 선물상자까지 더해져서 실어야 할 짐이 상당했다.

추위에 굳어있는 아시카에게 하녀장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아가씨, 그만 들어가셔도 돼요. 지시하신 대로 분류해서 포장까지 다 마쳤어요.”

“탈리온에서 온 상자들은 따로 한 마차에 싣고, 출발 전에 다시 한번 확인하도록 해.”

“잊지 않고 처리할게요. 얼른 들어가세요.”

추위에 동동거리고 있는 것이 안쓰러운지 하녀장은 재차 아시카에게 들어갈 것을 권했다.

“혹시 영지에 도착해서 빠진 걸 확인하면 곤란하잖아.”

더구나 이번에는 결혼 예식 때문에 짐이 더욱 많아졌다. 빠진 물건이 결혼 예식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난감할 일이다. 아시카가 유독 꼼꼼히 신경 쓰는 이유였다.

“이번에 가면 언제 오시는 건가요?”

“겨울이 끝나기 전에는 다시 오기 어려울 거야.”

“신년제 때도 말인가요?”

하녀장의 질문에 아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년제라고 해봐야 수도에서 하는 행사는 황궁의 연회뿐이잖아.”

황궁 행사도 건너뛰겠다는 말에 하녀장이 입을 다물었다.

‘하긴 영지를 너무 오래 비워두시긴 했어.’

지방 영주가 있어야 할 곳은 본래 수도가 아닌 영지였다. 탈리온이나 이그레인의 상황이 특수했던 것뿐. 정기적으로 영지 순회할 때를 제외하고 아시카는 대부분 수도에 머물렀다. 그랬기에 하녀장에게는 아시카의 부재가 영 낯설었다.

“공작님께서는 함께 안 가시나요?”

“결혼식 무렵에야 가실 것 같아. 당장은 수도에 일이 있으니까.”

하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브의 일 대부분은 수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상단과 사업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선대 공작 부부는 영지에 머물면서 수도에서의 업무를 보좌관에게 맡겼는데 웨이브는 그 반대로 움직였다. 그러니 당장 영지에 가지 않겠다는 말이 이해되었다.

“아가씨의 결혼식을 꼭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수도의 저택도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지. 그래도 탈리온 영지까지 가지 않는 게 어디야.”

“본성에서 식을 치른다면서요?”

하녀장은 하나뿐인 아가씨의 결혼식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무려 20여 년 만에 치르게 된 가문의 큰 행사였다. 하녀장 뿐 아니라 수도 저택의 사용인들 모두 결혼식을 보지 못하는 것에 아쉬워했다.

“관례에 따르는 거지.”

결혼식은 여자의 가문에서 치르고 함께 남자의 집으로 가게 된다. 전통을 그대로 따르는 절차였다.

“그럼 결혼식 후에 탈리온 영지로 가시는 건가요?”

“당장은 그러겠지만 한쪽에만 머물지는 않을 거야.”

아시카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다. 간단하지 않은 문제였기 때문이다.

결혼 후 거주지는 본래 작위가 있는 배우자를 따라간다. 물론 아시카의 경우 공작위를 물려받을 예정이기 때문에 보통의 배우자였다면 이그레인 영지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 상대가 탈리온 공작이었다. 이그레인쪽은 웨이브가 아직 공작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아시카의 위치는 유동적이었다.

“정리된 게 하나도 없는데 결혼이 코앞이네.”

정말 그랬다. 드루쉬아는 결혼과 동시에 둘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못 박아 놓았을 뿐, 양쪽 가문에 얽혀있는 문제는 정리된 것이 거의 없었다.

마차에 차곡차곡 쌓이는 짐을 보며 아시카의 머릿속이 번잡해졌다. 그사이 짐을 실어둔 마차는 보관을 위해 창고에 분리해 두었고 하녀장이 문을 걸어 잠갔다.

“창고 열쇠는 집사에게 맡기고 기사들에게 신경 쓰라고 해.”

“예, 아가씨.”

아시카가 하녀장에게 당부하고 돌아서는데 저택 정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아침부터 누가 왔지? 오늘 약속 잡힌 게 없었지 않아?”

문이 열렸다는 것은 공작의 허락이 떨어졌다는 말이었다.

“집사, 누가 왔어?”

아시카는 정문에서 본채로 향하는 집사를 불러 세웠다. 집사는 손에 서신을 들고 있었다. 그 문양이 선명해서 발신인을 착각하기 어려운 서신이었다.

“황궁에서 나왔답니다. 공작님께서 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황궁에서?”

아시카와 하녀장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집사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가씨께 입궁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 내려졌답니다.”

“뭐?”

아시카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보통 황제와의 만남은 며칠 기간을 두고 이루어진다. 이렇게 당일 아침에 통보받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준비할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느껴졌다.

“공작님께서 곧 아가씨를 부르실 겁니다. 준비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집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다시 본채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황제가 왜? 조부님도 아니고 나를?’

황궁의 수사관이 이그레인 저택을 방문했던 이후 황실에서 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탈리온의 전대 공작인 네오렌까지 수도로 찾아오자 귀족들 사이에서도 조심스러운 기류가 흘렀다.

이후 귀족원 회의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대신 다수의 귀족들이 황궁을 바쁘게 오간다는 소문이 들렸다.

무슨 꿍꿍이일까. 음흉한 황제의 속내는 선뜻 짐작하기 어려웠다. 지난 몇 주 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곱씹으면서 아시카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 *

걸어가는 내내 드루쉬아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귀족원 회의가 불시에 열렸던 날 이후 오히려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면 다른 생각이 든다고.”

무슨 말인가 고민하다 아시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농담이 나와요?”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니까. 왜, 아닌 것 같아?”

드루쉬아는 슬며시 웃으며 아시카의 손을 잡았다. 에스코트를 위한 형식적인 몸짓이 아니라 작은 손을 온전히 감싸 꼭 쥐었다.

“르쉬아, 여긴 궁이에요.”

앞서가는 안내인을 보며 아시카는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더욱 함께여야지.”

드루쉬아는 그녀의 손을 당겨 제 팔에 얹었다. 손등을 톡톡 다독이면서도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시카는 작게 한숨을 쉬며 드루쉬아의 팔을 힘주어 잡았다.

“노공작께서 오셨다면서요? 몸은 괜찮으신 건가요?”

“이미 영지로 출발하셨어.”

“네? 벌써요?”

아시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몸이 회복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 못지않았다.

“괜… 찮으신 거 맞아요?”

“우리 일가는 원래 타고난 강골이야.”

날 보면 알잖아, 라는 말을 부러 아시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간지러운 숨결에 아시카는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얼른 가요.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그걸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네가 이상한 거야.”

후후, 웃으며 드루쉬아는 느릿한 걸음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황제의 궁에 들어선 뒤부터 발걸음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복도 전체에 카펫이 깔려 있어서였다.

허락 없이는 큰 소리조차 낼 수 없는 황제의 궁. 그 가운데 은은한 음악 소리가 울렸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시종들의 모습이 음악에 파묻힌 듯 기이한 느낌이었다.

음악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안내인이 커다란 문 앞에서 멈춰섰다. 문 앞을 지키고 선 근위 기사의 얼굴을 보고 드루쉬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황제의 최측근 기사였나.’

코랄이 살해당하던 날 레이디 전용 휴게실 앞을 지키던 기사였다. 드루쉬아를 막기 위해 검까지 빼 들었던 기사.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나 했더니 황제의 최측근 호위였다.

드루쉬아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아시카가 작게 속삭였다.

“왜요?”

“아니, 별일 아니야.”

당시 경황이 없어서 아시카가 기사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기사는 애써 시선을 피했고 드루쉬아는 혹시 아시카가 기억을 떠올릴까 봐 가만히 시야를 가렸다.

안내인이 문을 두드려 신호하자 안에서 문이 열렸다.

“여기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안내인이 한발 물러나며 들어갈 것을 권했다.

두 사람이 안내받은 곳은 알현실이 아닌 황제의 개인 살롱이었다. 황제나 황후의 살롱은 사적인 공간이었다. 특별히 허락받은 몇몇만 드나들 수 있기에 이곳을 출입한다는 건 황족과 친분이 높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제껏 이그레인과 탈리온을 은근히 경계하던 황제였다. 그랬던 그가 사적인 장소로 두 사람을 불러낸 저의가 자못 의미심장하다.

살롱 안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 외에도 다섯 명의 시종이 대기하고 있었다. 황제는 침대만큼이나 커다란 소파에 반쯤 몸을 기울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평생 황궁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던 황제는 시시때때로 누군가를 살롱으로 불러들여 무료함을 달래곤 했다. 첫 번째 황후가 폐해진 뒤 한동안 오페라 가수들이 황제의 살롱을 드나들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모두가 한창 젊었을 때의 일이었다. 현재의 황제는 잎사귀가 거의 떨어져 쇠락해가는 고목처럼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연주가 황제의 손짓 한 번에 뚝 끊겼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연주가 멈추고 아시카와 드루쉬아는 예의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황제는 두 사람을 힐끗 곁눈질할 뿐 반쯤 기울어진 자세를 바로잡지 않았다. 대신 또 한 번 손을 저어 연주자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고개를 들게.”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제야 두 사람은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무료해서 흥도 기력도 느껴지지 않는 중년의 사내를.

‘얼굴이 낯익어.’

아시카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과거에도 종종 봤던 얼굴인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친숙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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