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29화 (129/153)

#129.

웨이브의 입에서 허탈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극도로 조심하면서 숨기고 또 숨겨왔는데 아시카는 이미 알고 대공령을 궁금해했고, 오래도록 피해왔던 네오렌 역시 진작에 알고 진실을 요구하고 있었다.

웨이브조차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이비스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아들이 죽은 직후였다. 장례식에서 멀리서 지켜보던 여자를 발견하고 처음에는 제 눈을 의심했었다.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꼿꼿하게 힘주었던 어깨에서도 힘이 빠져 축 처지고 말았다. 웨이브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어찌… 알았나?”

“그 아이가, 반느가 죽은 뒤였지. 미친 듯이 화를 내다가 어느 순간 보니까 이상하더군.”

네오렌이 아는 웨이브는 고지식하지만 정도를 아는 사내였다. 억지로 맺어진 인연이라 해도 제 아내의 죽음을 외면할 리 없는. 그런 웨이브의 눈에서 두려움과 죄책감을 읽었다. 그때 알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뭔가가 있다는 것을.

네오렌은 알고자 했고 웨이브는 철저히 외면했다. 모든 비난은 웨이브가 받아 삼켰다.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흘렀고 네오렌의 여동생 반느의 죽음은 그렇게 잊혀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또 한차례의 비극이 찾아왔다. 양쪽 집안의 후계자가 몰살당하는 참담한 비극이.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던 댐 붕괴 사고와 더욱 이상했던 웨이브의 태도.

추도식에서 만난 웨이브의 표정은 참담했고 네오렌은 그 속에 가려진 공포를 읽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웨이브는 조사를 중단하고 숨는 쪽을 택했다.

이그레인 공작가가 숨을 죽여야 할 만큼 두려운 상대가 누가 있을까. 네오렌은 사고의 배후로 가장 먼저 황실을 의심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양대 공작가와 연결된 황실의 인물은 단 하나, 대공령의 마지막 직계자손인 황태후뿐이었다. 그러나 타당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황태후가 팽개친 대공령을 애써 관리하는 것이 이그레인과 탈리온이었다. 그러니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모든 의문에 직접 뛰어들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언제부턴가 하나씩 단서가 잡히더군.”

누군가 일부러 던져놓은 것처럼 단서는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며 네오렌의 손에 들어왔다.

황태후가 비밀리에 이그레인 영지에 보냈던 사람들을 찾아냈고, 살해당한 웨이브의 아이에 대한 소문을 확인했다. 웨이브가 내연녀를 숨겨두었던 장소를 찾았을 때, 비로소 황태후와의 연결점을 찾아냈다.

“연금술사를 찾아냈네. 한때 외국에 있다가 제국 귀족의 부탁으로 입국했다는 자였어. 자네의 보좌관이 접촉한 정황을 포착했지. 눈 색을 바꿀 수 있는 약을 만들어달라고 했다지?”

섬약한 공자님이라고만 생각했던 청년에게서 어찌 그런 용기가 났을까. 네오렌이 알고 있던 웨이브는 절대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가문의 명운이 달린 엄청난 일이라면 더욱. 지금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연금술사가 그러더군. 신체를 변형시키는 약은 불안정해서 몸을 망가뜨린다고. 어지간히 절박하지 않으면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약이라고. 온실 안의 화초처럼 귀하게 자란 공자가 왜 그런 약이 필요했을까.”

그렇게 추적해 들어간 끝에 찾아냈다. 아크펠라의 대공녀 이비스. 아무도 몰랐다던 그녀의 존재를 아는 이가 있었다. 웨이브가 대공령에서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건 황태후의 태도였지. 왜 그렇게까지 대공령을 철저하게 짓밟았는지. 왜 그토록 집요하게 제 언니와 아이들까지 죽이려 들었는지 이해가 안 가더란 말이야. 자매지간에 무슨 철천지원수가 졌다고.”

최근까지도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아마도 황궁에서의 사건이 아니었다면 영영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드루쉬아가 내게 소식을 전해왔어. 마이헬러가 수상하다고. 그런데 설마….”

허허, 헛웃음이 흘렀다. 황태후는 제국 전체를 기만했다. 그녀가 사생아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크펠라 대공가의 일원으로서 누렸던 모든 지위와 그로 인해 벌어진 비극이 문제였다.

“자네는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왜 진작 내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나?”

“말했으면? 어찌 됐겠나?”

네오렌이 혈기 왕성하던 시절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는 탈리온 가문의 혈기 왕성한 젊은 공작.

네오렌이 이성을 잃고 무력을 동원하는 순간 이그레인도 함께 말려들어가게 된다. 웨이브는 최악의 사태만은 피하고 싶었다.

“나는 배후가 황태후인 줄로만 알았네. 그런데 제국의 황실을 상대로 무슨 방법이 있었겠나? 내 작은 아이가 살해당했고 반느도 살해당했네. 이그레인과 탈리온이 손을 잡으려 한다면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어.”

실제로 비극은 그렇게 계속 이어져 왔다.

웨이브는 결과 없는 분노보다는 생존을 택했다. 비겁하다고 해도 좋았다. 감정은 삭이면 그만이었다. 아시카를 지켜야 했고 가문을 온전히 보존해야만 했다.

“그게 자네와 나의 가장 큰 차이야.”

과거 네오렌이 드러내지 못했던 분노를 이제 드루쉬아가 대신하려고 한다. 그래서 네오렌은 말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웨이브는 여전히 신중한 쪽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더 벌어질지 몰라. 그걸 대체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시간이 해결해 줄 수도 있어. 그러니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숨는다고 해결될 일 같았으면 지난 수십 년 동안 왜 나아진 게 없어?”

네오렌의 질책은 무겁고도 매서웠다. 웨이브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힘이 빠지는 어깨가 유독 작아 보인다.

“그래서 저 아이들이 과거사를 들쑤시고 다니는 걸 내버려 두겠다고?”

“꼬일 대로 꼬여버린 역사는 이제 정리할 때가 되지 않았나.”

“마이헬러 후작가와 황태후는 하나야. 황실을 상대로 싸우겠다는 말인가?”

“필요하다면.”

“정신 나갔나! 내전이라도 일으킬 셈이야!”

웨이브의 호통에도 네오렌은 끄떡하지 않았다.

“오래전 내 부모님께서는 선황제의 요구에 가문의 신물을 내놓았네. 억울한 누명을 씌우려는 선황제에게 충정을 보였지. 그걸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겠나?”

평생 제국을 위해 검을 갈고 방패를 들었던 탈리온이었다. 그러나 선황제는 아크펠라를 견제하는 만큼 탈리온을 경계했다.

“과거에 선황제는 이미 한 번 탈리온의 목줄을 쥐려고 했네. 말도 안 되는 억지로 아크펠라와 엮으려고 했지. 나는 콘틸리아의 핏줄을 못 믿겠어. 이제는 도망쳐 봤자야. 상대도 알고 우리도 알아.”

“나는… 이런 무거운 짐을 아시카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어.”

“같은 생각을 저 아이들도 할걸세. 태어날 아이들에게 과거의 비극과 현재의 위협까지 넘겨주고 싶지는 않을 테지.”

웨이브와 네오렌이 부모였듯 아시카와 드루쉬아도 부모가 될 터였다. 비극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언제고 또다시 위험 속에 발을 들이게 될 테고. 그러니 두 사람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결혼식이 당장 코앞일세. 그냥 받아들이게.”

“허.”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결혼식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어찌나 급하던지. 그나마 그놈 혼자 좋아서 날뛰는 건 아니라 다행이야.”

네오렌은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웨이브는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난 두렵네. 란체를 그리 허망하게 잃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어. 그러니 또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겠나?”

“그 아이들은 우리처럼 나약하지 않아. 혹시 듣지 못했나? 내 목숨을 구한 것이 아시카일세.”

“무슨 말인가?”

웨이브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대공성에서 말이야. 온실 안의 화초처럼 자란 레이디인 줄 알았는데. 그래, 나도 퍽 놀랐어.”

“설마, 부상을 입었다더니 그게 대공성에서였나?”

아차 싶었는지 네오렌이 입을 다물었다.

대공성의 봉쇄가 무너졌다는 소식 외에는 외부에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었다. 웨이브 역시 사고가 있었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이다.

“혹시 공격받았었나?”

“마이헬러는 오래도록 대공성이 열리기를 기다려왔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겠지.”

“어떻게!”

화를 삭이지 못하고 웨이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알고 있었어. 분명 알고 있었을 거야.”

불현듯 떠오른 것은 이븐이었다. 아시카가 가출하던 날 도피를 돕고 대공령까지 길을 인도해준 것도 그녀였다. 그러니 이븐은 알았을 것이다. 마이헬러가 아시카를 쫓으리라는 것을.

“신방을 열어야 한다더니만. 무슨 방법을 어찌 찾겠다고 제 손녀를 사지로 밀어 넣어?”

이븐이 웨이브에게 한 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아크펠라의 혈족과 대공성의 비밀. 반쯤 토막난 진실을 웨이브는 흘려들었다.

‘그것이 대공녀였구나.’

웨이브의 분노에서 아시카를 움직인 배후가 대공녀였다는 걸 알아차렸다.

“40년이야. 가족과 가문, 백성까지 모두 잃고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살아온 세월이. 나는 대공녀의 가슴에 맺힌 원한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걸세.”

“그게 어떻게 핑계가 돼!”

얼마나 절박한 사안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이븐이 제 목적을 위해 아시카를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대공녀는 지금 어디 있는가?”

네오렌의 진중한 물음에 웨이브가 입을 닫았다. 이미 살아있다고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웨이브는 화를 삭이며 핏대가 선 제 목을 쓸었다.

“그걸 알아서 뭐하게? 대공녀가 어딨는지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아?”

퉁명스러운 대답에 네오렌이 허허, 웃음을 흘렸다. 웨이브는 노골적으로 화제를 피했다.

“결혼식까지 치르고 나면 물릴 수도 없어. 황제가 어찌 나올지 예측이 되지 않아. 대체 앞으로 어쩔 셈인가?”

“마이헬러가 사병을 키우고 있었네.”

“뭐?”

웨이브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마이헬러가 관련됐다는 걸 알게 된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런데 사병이라니.

네오렌은 얼마 전 드루쉬아에게 받은 정보를 떠올렸다.

“국경과 인접해 있는 그라나티 백작과 손을 잡았던 모양이야.”

“설마, 마이헬러가 반역을 일으키려는 건가?”

“그걸 모르겠단 말이지. 대대손손 은둔해 있던 마이헬러가 아닌가. 무슨 꿍꿍이인지 예측이 안 돼.”

기사 가문이 아닌 이상 각 영지의 사병 숫자는 황제의 통제를 받는다. 그 이상의 숫자를 양성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영지일수록 치안 유지에 어려움이 있어서 이런저런 핑계로 사병 비슷한 인력을 양성하곤 했다.

“내 손자 녀석이지만 나도 그놈 속을 모르겠어. 독이 단단히 올랐어.”

얼마 전 다시 만난 드루쉬아는 대공성에서 봤을 때하고는 또 달라져 있었다. 영지의 병력 반수 이상을 움직이는 걸 보고 네오렌은 반대했었다. 그러나 계속 반대하면 네오렌의 군 지휘권까지 몰수하겠다는 협박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드루쉬아는 제 영역을 지키려는 맹수처럼 형형한 눈빛으로 네오렌에게 말했다. 감히 누구도 탈리온과 이그레인을 해치지 못할 거라고. 더는 숨죽여 살지 않겠다고 드루쉬아가 말했을 때 네오렌은 반박할 수 없었다.

이미 제 손을 떠난 일. 모든 것은 드루쉬아의 손에 달려 있었다. 네오렌은 침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드루쉬아는 마이헬러를 쳐낼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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