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거기 누구지?”
“각하! 저 애거나이트입니다!”
문고리를 당기는 소리에 아시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필, 애거나이트야.’
“조금만 기다려. 곧 나갈 테니.”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슬쩍 보고는 문밖으로 소리쳤다. 자칫 열릴 뻔했던 문이 다시 닫혔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레이디 이그레인은요? 길 아래쪽에서 마부와 마주쳤습니다. 아가씨 한 명과 동석했는데 사라졌다고 합니다.”
“함께 있어.”
짤막한 대꾸에 애거나이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문고리를 놓고 두세 걸음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항의처럼 느껴지는 부담스러운 침묵.
‘하, 불편해.’
앞으로 평생을 봐야 할 상대인데 이토록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오히려 노공작께서는 호의적이었는데.’
상황이 급박하게 진행되다보니 정작 탈리온의 기사나 가신들의 반감은 생각하지 못했다.
“아시카, 잠깐만.”
간신히 외투를 걸치고 한숨을 내쉬는 아시카에게 드루쉬아가 다가왔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커다란 손으로 살금살금 빗어 정리하고 밖으로 나온 옷깃을 펴주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다정하게 다독이는 목소리였다. 지그시 내려다보는 시선을 마주하고 아시카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뭘 걱정하는지 알고 하는 말이야?’
다소 불퉁해진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났다.
언제부터인가 아시카는 감정을 숨기려고 애쓰지 않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깨달음과 기댈 곳이 있다는 안도감이 그녀를 변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퍽 다행스러워서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드루쉬아는 그녀의 뺨을 살며시 쓸더니 팔을 당겨 품에 안았다.
작은 어깨가 너른 품으로 쏙 들어가 안겼다. 아시카는 저를 가두는 단단한 가슴에 온전히 몸을 기대었다.
“그게 뭐든 다 괜찮아질 거야. 내가 약속할게.”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주겠노라고. 그러니 너는 내 곁에 꼭 붙어있기만 하라고. 다독이는 목소리가 그렇게 속삭였다. 드루쉬아의 목소리는 주문처럼 가슴속에 파고들어 들썩이는 불안을 잠재웠다.
* * *
이그레인 저택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연무장 안, 사용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한쪽에는 저택을 호위하던 기사들까지 불려와 있었다.
“어째서 그 아이를 또 혼자 나가게 만들어!”
웨이브의 호통에 모두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피할 수 없는 질책이었다. 기사들이 철저하게 호위 중인 저택에서 아시카는 또 귀신같이 혼자 빠져나간 것이다.
처음에 아시카가 홀로 저택을 나섰을 때는 뭔가 실수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두 번이나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일반 경비들이 아니라 기사가 지키는 저택이었다. 허수아비가 아닌 다음에야 귀족 레이디 한 명이 빠져나간 걸 모른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저, 공작님.”
가장 크게 책임을 느끼는 것은 잔느였다. 웨이브의 질책을 가만히 듣던 잔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저택 내에 저희가 모르는 다른 길이 있는 게 아닙니까?”
잔느의 말에 웨이브가 입을 딱 다물었다. 아시카에게 다른 통로를 알려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알 리 없는데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지난번 아가씨의 가출 이후 저택 경비가 강화됐습니다. 아가씨도 그걸 모르지 않고요.”
그런데도 혼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정말로 조용히 홀로 사라져 버렸다.
“저희가 모르는 동선이 있다면 앞으로도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정보가 있으면 내달라는 말이었다. 이런 식으로 아시카가 번번이 돌발행동을 하면 곤란한 것은 기사들이었다.
웨이브는 긴 한숨을 토해내며 시선을 돌렸다. 아시카를 팽개치다시피 버려둔 것은 저였다. 기사들을 질책할 것이 아니라 제 무심함을 탓해야 마땅했다.
웨이브는 화를 억누르며 말을 돌렸다.
“탈리온에서 언제 온다는 말은 없었고?”
“네. 탈리온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만났다고, 곧 돌아오겠다는 전언이 마지막이었습니다.”
“탈리온 공작은….”
웨이브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닫았다. 평생을 그토록 피해왔는데 자신이 탈리온을 궁금해하는 날이 올 줄이야.
“됐다. 탈리온 공작저로 다시 연락을 넣어. 최대한 빨리 돌아오라고.”
웨이브는 손을 휘휘 저으며 연무장을 나섰다. 밖에서 내내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웨이브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공작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오늘 약속된 사람은 없지 않나?”
“예정에 없던 방문입니다.”
“누군가?”
웨이브의 서늘한 질문에 집사가 머뭇거렸다. 이제 갓 중년에 접어든 집사는 얼마 전 이그레인 영지에서 온 사람이었다. 아시카의 결혼 문제로 일이 많아지면서 새로 불러들인 사람 중 하나였다.
영지의 분위기를 익히 알기에 집사는 이 말을 꺼내는 것이 곤혹스러웠다.
“저…, 탈리온의 노공작께서 오셨습니다.”
웨이브의 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놀라는 동시에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어찌할까요?”
집사의 질문은 당연했다. 지난 14년 내내 웨이브가 얼마나 탈리온과의 만남을 피해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4년 전, 전대 탈리온 공작인 네오렌은 이그레인 영지의 성채 밖에서 수일 동안 진을 치고 웨이브에게 만남을 요구하기도 했었다. 지독히도 피하던 웨이브가 딱 한 번, 추도식과 사건을 마무리 짓기 위해 네오렌과 만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건가.”
온갖 감정이 뒤섞인 혼잣말이었다. 이제는 피하려야 피할 수도 없게 되었다. 아시카와 드루쉬아를 생각하면 그래서도 안 되었다.
“…응접실로… 아니, 사냥 별채로 모셔오게.”
“북쪽 정원에 있는 그곳 말입니까?”
집사는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반문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이제는 창고처럼 변해버린 건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탈리온의 노공작을 맞이하기에는 한참 부족한 장소였다.
“차도 필요 없고, 사람도 보낼 필요 없네. 사냥 별채로 오라고 하면 알아들을 걸세.”
“네, 알겠습니다.”
집사는 웨이브의 의사를 재차 확인하고 물러났다.
양쪽 가문의 사이가 처음부터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영지가 인접한 탓에 웨이브와 네오렌은 어린 시절부터 자주 마주치고는 했다.
영지에 머물다 수도에 오게 되면 아는 사람이 서로뿐이라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웨이브와 네오렌의 누이, 반느의 혼담이 오간 것도 그래서였다.
수도 저택에서 두 사람이 어울리던 장소는 낡아빠진 이곳 사냥용 별채였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된 비밀 공간. 옛 추억이 묻어나는, 그러나 이제는 먼지만 소복이 쌓인 창고 같은 공간을 웨이브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 오래된 일이로군.”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 이제는 흐려질 법도 하건만, 어찌 된 일인지 어릴 때의 기억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선명하기만 하다.
“반백 년은 되었지 아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웨이브가 돌아보았다.
여느 기사들을 압도할 만큼 커다란 체격에 번뜩이는 푸른 눈동자. 한때 화사한 금발이었던 머리칼은 이제 색이 바래 백발이 되었다.
그러나 햇볕을 등지고 선 그림자는 여전히 크고 위압적이었다. 갑옷이 아닌 셔츠와 바지, 외투를 입었는데도 거친 기색은 가려지지 않았다. 과연 탈리온의 핏줄이었다.
“오는 길을 잊지는 않았나 보군.”
“잊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수도에서 아는 곳이라곤 내 집과 여기뿐인걸.”
네오렌은 소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격의 없는 대꾸에 웨이브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그냥 저택 응접실로 부를 걸 그랬어.”
“그렇게 고집스럽게 굴더니 이제는 까탈스러운 노인네가 된 건가?”
웨이브의 핀잔을 네오렌은 능청스럽게 받아넘겼다. 웨이브의 얼굴은 더욱 기묘하게 구겨졌다.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화를 내거나 불편한 태도를 보여야 마땅할 텐데 네오렌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의자가 없으니 아무 데나 앉아도 이해하게. 부수지는 않을게.”
그렇게 말하면서 네오렌은 대충 쌓여있는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웨이브는 굳어진 얼굴로 그런 네오렌을 바라보았다.
“왜 왔나?”
“왜긴. 애들이 결혼하겠다는데 당연히 와 봐야지. 평생 못해본 부모 노릇, 이번만큼은 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이 결혼을 승낙한다고?”
“안 하면 어쩔 건데? 난 자네랑 달라. 공작은 내가 아니라 그 녀석이야. 손자 녀석에게 결혼을 통보받은 처지에 내가 뭐라고 하겠나.”
그것이 불쾌하지 않은 듯 네오렌은 껄껄 웃었다.
“그 녀석은 진작에 내 품을 벗어났어. 아니 한 번도 내 품 안에 있었던 적이 없었지.”
회한이 가득한 어조였다. 연이은 비극에 제 품에 안아보지도 못했던 아이였다. 오롯이 혼자였던 아이는 호시탐탐 자리를 노리는 외가의 혈족들 틈에서 홀로 싸워 제 자리를 만들고 현재에 이르렀다. 그것이 대견해서 말을 얹는 것조차 민망하다 여겼다.
반쯤은 체념하고 반쯤은 세월이 앗아간 감정들. 그렇게 닳고 닳은 시간이 현재의 여유를 만들어냈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쓰디쓴 여유로움이었다.
웨이브는 긴 한숨을 토하며 입을 열었다.
“내게 묻고 싶은 것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네.”
“한때는 그랬었지. 화도 많이 났고. 눈앞에 있었으면 팔다리 한두 개쯤은 분질러 줬을 걸세.”
어디 팔다리뿐이겠는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곤죽을 만들었다 해도 분이 풀리지 않았을 터다.
“계속 그럴 줄 알았는데?”
뭐가 달라진 걸까. 웨이브는 그걸 묻고 있었다.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란 없어, 웨이브.”
네오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형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피하지 않았지만 웨이브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내 하나만 묻지.”
문을 닫아놓은 별채 안에는 커튼을 쳐두어서 빛이 희미했다. 오래되고 낡은 공간은 꼭 그만큼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혹 아크펠라의 대공녀가… 이비스가 살아있는가?”
속내를 보이지 않으려던 노력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웨이브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거짓말은 사양하겠네. 무려 40년이야. 더는 나를 바보로 만들지 말게. 왜 황태후가 그토록 자네의 아이들에게 집착했는지 그걸 아는 데만 해도 수십 년이 걸렸어.”
네오렌의 추궁은 매서웠다. 평생 전장을 호령해왔던 장수답게 흉흉한 기세가 상대를 압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