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노크 소리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마릴린은 실례를 무릅쓰고 문을 열었다. 아시카는 공작의 집무실 구석에 있는 작은 테이블 의자에 앉아있었다.
“아가씨, 손님들이 기다리겠답니다.”
“기다려? 어디서?”
서류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아시카가 고개를 들었다. 다소 황망한 얼굴이었다.
“베르트 경이 안으로 못 들어오게 막았더니 마차에서 기다리겠다고 버티는데요?”
“하.”
유순해 보이던 까만 눈동자가 매서워졌다.
‘오늘 아주 작정을 했구나.’
탈리온과 이그레인을 배제하고 열린 귀족원 회의. 드루쉬아가 상황을 확인하러 간 사이 이그레인에는 황궁의 수사관들이 들이닥쳤다.
‘이그레인을 치려는 건 아니야.’
그랬다면 좀 더 비밀스럽게 기회를 노렸을 것이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증거 없이 공작가를 들쑤실 수는 없는 노릇.
‘단순히 위협하려는 걸까. 아니면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걸까.’
굳이 수사관을 보낸 것은 황제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압박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탈리온뿐 아니라 이그레인도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아시카는 제 앞에 쌓여있는 서류를 보았다. 수십 년 동안 대공령으로 빠져나간 자금이 과할 정도로 많았다. 누군가 이 정보를 확인한다면 불필요한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대공성이 열린 것이 알려지면 아시카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도 곧 알려질 것이다. 문제를 터트린 것이 누구든 이그레인과 탈리온을 함께 엮으려 할 테고.
어떤 대응을 하든 드루쉬아와 함께여야 한다. 혼자 섣부르게 말을 뱉었다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래서 방문자와의 만남을 일단 보류한 것이다.
‘그런데 버티겠단 말이지.’
이렇게 마냥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시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서 빈 종이를 찾아 짧은 글을 적어 봉투에 넣었다.
“마릴린, 탈리온 공작저로 심부름꾼을 보내줄래?”
“아가씨, 어디 가세요? 설마 나가시려고요?”
“잔느에게는 탈리온 공작님을 만나러 간다고 전해줘.”
“뒷문에도 낯선 사람들이 있는 걸 봤어요. 지금 나가시면 분명 누군가는 볼 거예요.”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 발을 묶어두려는 심산일지도 모르겠네.”
그걸 알면서 순순히 갇혀 있을 수는 없었다. 아시카는 걱정하는 마릴린을 뒤로하고 제 방으로 빠르게 걸었다.
저택을 나갈 방법은 있다. 다만 그곳을 아는 사람이 나일 한 사람뿐인데 지금은 곁에 없다는 게 문제였다.
복도 창밖으로 정문 근처를 지키는 기사들이 보였다. 가장 앞쪽에서 상황을 지휘하는 사람은 잔느였다.
‘혼자라도 나가야겠구나.’
서신을 보냈으니 곧 드루쉬아를 만날 수 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다른 사람이라도 보내올 테니 혼자 움직이는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고. 아시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외투를 챙겨입었다.
방을 나서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침대가로 다가갔다. 베개 아래 손을 넣자 아까 드루쉬아가 주고 간 수첩이 나왔다.
‘마이헬러 가문의 숨겨진 기록.’
그 비밀을 안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뾰족한 답이 있었다면 샤프리가 이걸 그냥 넘기진 않았겠지.’
그래도 궁금했다. 초대 공신 가문이었던 마이헬러는 왜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졌을까. 아크펠라 대공가를 멸문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마이헬러 후작이 탐했던 힘은 근원, 대공성의 신방에 숨겨진 신이라 불리는 그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아시카는 사용인들조차 모르게 홀로 비밀통로를 지나 저택을 빠져나왔다. 드루쉬아가 심어놓은 사람들에게 따로 연락할 겨를도 없었다.
‘오늘은 정말 혼자야.’
그런 생각에 어두운 색의 후드 망토를 단단히 눌러쓰고 대여소 마차를 찾아 올라탔다. 마차에서 수첩을 다시 꺼내 들었을 때는 아직 늦은 오후의 햇살이 남아있을 무렵이었다.
* * *
그것은 아주 오래되고도 또 오래된 기록이었다.
기록 속에서 황무지를 떠돌던 이들은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그 시작이 어디였는지 제 뿌리조차 잊어버린 이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헤매었다.
끝없이 펼쳐진 메마른 땅에서 고단한 여행자들은 자신들보다 더욱 메마른 한 남자를 만났다. 아니 남자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무지한 영혼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홀로 죽어가고 있었다.
여행자들은 저희보다 불쌍한 그에게 귀하디귀한 물을 나눠주었다.
아무 색도 덧입지 않은 순백의 존재. 갓 태어난 아이처럼 무지했던 그는 지친 여행자들을 위해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다.
여행자들의 간절한 소망. 풀과 나무가 자라는 옥토에서 새로운 고향을 일구고자 했던 소망은 그로 하여금 기적을 만들어내도록 했다.
마이헬러의 초대 가주는 그때를 떠올리며 자신의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왕은 그를 일컬어 ‘길을 잃어버린 나의 어린 양’이라고 불렀단다.」
먼지 가득한 메마른 땅에 비가 내리고 천 길 낭떠러지 같은 깊은 협곡은 물이 흘러 강이 되었다. 사막이 초지로 변하는 기적 한가운데에서 여행자들은 마침내 새로운 고향을 얻었다.
무지하고도 무서운 힘을 지닌 존재. 그러나 왕의 친절에 맹목적으로 헌신하던 아이였다. 그러나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그의 힘에도 한계는 있었다.
그는 이제 쉬고 싶어 했다.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을 왕에게 전했다. 왕은 그에게 쉴 집과 따뜻한 온기가 있는 침실을 내어주겠노라 약속했다.
무구한 존재는 그 말을 믿었다. 그가 소중히 보관하던 네 개의 신석은 네 사람의 손에 맡겨졌고,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편히 쉴 수 있게 해준다는 말에 제 힘을 나눠주었다.
설마 자신이 나눠준 힘으로 문조차 없는 영원한 감옥에 갇힐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는 잠이 들면서 왕에게 마지막 충고를 남겼다. 더는 이 땅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더 이상의 변화는 재앙이 될 거라고.
그리하여 왕이 남긴 기록은 역사의 시작이자 비열한 속임수의 기록이 되었다.
그것은 한 모금의 물이 선사해준 축복이어라
방랑하는 여행자가 내민 온정의 손길
미약한 신은 한 모금의 물을 얻고 가장 고귀한 것을 내어주었으니
고향을 잃은 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은
새로이 뿌리내릴 비옥한 대지와 마르지 않는 강물
물은 생명의 근원이며 이 땅의 시초
생명이 잉태된 대지 위에 뿌리내린 힘의 원천
현명한 왕이 가신들에게 명하노니
굳건하고 튼튼한 집을 지어라.
신께서 편히 잠들어 대대손손 이 땅을 축복하도록.
신께서 나누어주신 축복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신께서 어여삐 여기던 이에게 열쇠를 주어라
불손한 이들이 감히 발 들이지 못하도록
신성한 땅이 신의 은신처가 될 수 있도록
그리하여 곤하게 잠든 신을 깨우지 말지어다
굳건히 가두어둔 힘을 거두지 말지어다
열쇠를 내어주지 말지어다
나누어 받은 힘을 한 그릇 안에 담지 말지어다
그것만이 온전한 너희의 힘이니
이 나라의 근간이며 이 땅의 생명이어라
초대 왕이 남겼으나 왕실의 기록에서는 지워진 이야기였다. 건국신화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이야기로 네 개의 초대 공신 가문에만 남아있는 기록이었다.
‘생각하고는 좀 다른데.’
신이라 이름 붙인 이유는 아마도 그가 사람들의 눈에는 놀라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신방에서 스치듯이 보았던 환영이 떠올랐다.
거울 너머에서 흐드러지던 순백의 머리칼과 무기질의 그것처럼 소름 끼치게 느껴졌던 청보랏빛의 눈동자. 아크펠라 대공가의 특징은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대공성이 지어질 때부터 대공성의 신방에 갇혀버린 존재. 지난 수백 년 동안 아크펠라는 그 존재와 함께였다.
‘그래서 탈리온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큰 영향을 받았을지도 몰라.’
아시카는 수첩의 기록을 차분히 읽어가며 생각을 곱씹었다.
‘열쇠를 내어주지 말지어다. 나누어 받은 힘을 한 그릇 안에 담지 말지어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신의 힘을 나눠 받았다는 아크펠라와 탈리온. 아크펠라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그레인. 이그레인과 탈리온의 결합을 수십 년 동안 방해해 온 마이헬러.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답이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오래전부터 마이헬러는 신방을 찾고 있었다.
왕은 한 모금의 물과 다정한 몇 마디로 무구한 존재를 꾀어 가두었다. 아마도 초대 왕이 했던 것처럼 마이헬러 후작 또한 그 힘을 손에 넣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찰나였지만 그녀가 신방에서 느꼈던 것은 공포였다. 살아있는 생명의 밑바닥부터 뒤흔드는 본능적인 공포.
신방에 있던 이는 오래전 왕의 꾐에 넘어갔던 그 어린 존재가 아니었다. 탈출구 없는 감옥에 갇혀 포효하는 맹수에 가까웠다. 그러니 마이헬러 후작의 발상은 크나큰 착각일지도 모른다.
초대 가주의 기록은 대부분 자신의 아이에게 남긴 편지 같은 것이었다. 아시카는 기록 대부분을 흘려넘기고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해가 기울어 어둑한 마차 안에서는 이제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뭐야?’
수첩을 빼곡하게 채운 기록의 마지막에는 분노가 느껴지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평생 제 아비를 부르지 못할 안타까운 나의 아이에게
무구한 존재를 꾀어낸 왕의 영악함을 잊지 마라
거짓 약속으로 여자를 꾀어낸 왕의 치졸함을 잊지 마라
네가 버림받은 그의 핏줄임을 잊지 마라
“아!”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 트리델리아가 제국이 아닌 왕국이었던 시절, 마이헬러가 실은 왕의 피를 이었다는 소문 말이다.
‘마이헬러의 초대 가주가 기사였다고 했어. 왕의 기사.’
왕의 기사는 여자였다. 험난한 여행길에 동고동락하며 함께해 온 가신이자 연인이었던 여자. 그러나 왕국을 세운 뒤 왕은 세도가의 딸을 반려로 맞이하고 자신에게 헌신했던 기사를 내쳐버렸다.
“그래서 초대 건국 기록에서 제외됐구나.”
왕의 사생아를 낳은 여자였다. 마이헬러의 초대 가주가 기사의 직위를 버리고 변방에서 숨죽여 살아온 이유가 이해되었다.
덜컹, 마차가 돌부리에 걸려 크게 들썩였다. 그제야 아시카는 시간이 한참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이상하다는 생각에 마부석 쪽으로 향한 작은 창문을 열었다.
“아직 멀었는가?”
“아이쿠, 아가씨. 알려주신 길이 좀 이상합니다.”
“뭐가 말이지?”
“설명해주신 대로 왔는데 말씀하신 것 같은 샛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진땀을 흘리던 마부가 퉁명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비까지 와서 길이 더 어둡습니다. 이 길이 어디까지 이어졌는지도 모르겠고, 비가 더 오면 마차가 도랑에 빠질 수도 있어요. 아무래도 다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바짝 긴장하고 마차를 몰던 마부가 말끝을 흐렸다.
부슬부슬 내리던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며 툭, 툭 마차를 두드렸다. 질척하게 젖은 숲길에서 마차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여기가 어디야?’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자주 오간 길이라 쉽게 찾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 놓친 길은 다시 찾기가 어려웠다. 이제 창밖은 풍경을 알아보기도 어려울 만큼 어두워진 상태였다.
“아가씨, 빨리 결정을 내려주세요. 이러다 돌아갈 길도 잃겠습니다.”
“도착해야 할 시간보다 한참 넘었어. 일단 왔던 길로 가면서….”
“어이쿠야!”
“악!”
덜컹, 하고 마차가 기울었다. 마부가 급히 말고삐를 당기고 아시카의 몸이 마차 벽면으로 확 쏠렸다.
마차가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당황한 마부가 마부석에서 내려 기울어진 마차 바퀴를 살폈다. 폭우가 쏟아지면서 빗속에 선 마부는 금세 흠뻑 젖어갔다.
“아이고, 이를 어째.”
불안 불안하더니만 기어이 마차 바퀴가 웅덩이에 빠졌다. 마부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마부석에서 두툼한 천을 꺼내 움푹 파인 웅덩이 속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 마부석에 올라 말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얘들아, 가자. 힘 좀 내 봐.”
퍼부어대는 빗속에서 말채찍이 쫙, 쫙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진흙 웅덩이는 생각보다 깊었다. 마차에 매인 말 두 마리는 영 힘을 쓰지 못하고 헛발질을 해댔다.
마부가 다시 내려와 바퀴를 살피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아가씨, 아무래도 더는 못 가겠는데요?”
“내가 내리고 움직여 보는 건 어때?”
마부가 고개를 저었다.
“산길에 마차 바퀴가 약해진 모양입니다. 무리하게 움직이려다 아예 빠져버리면 더 곤란합니다.”
“그럼 어쩌려고?”
아시카의 얼굴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아까 오다가 불빛을 봤어요. 사냥꾼의 오두막 같은데, 가서 도움을 청해보겠습니다. 혼자 계실 수 있지요?”
순간 아시카는 말을 잃었다. 인가가 전혀 없는 산속. 노을빛조차 사라져서 어두워진 한가운데 비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어차피 이대로는 꼼짝 못 합니다. 일단 기다리세요.”
빗속에 아시카를 데려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사람도 없는 숲속에서 밤을 새울 수도 없었다. 마부는 기다리라는 말을 끝으로 왔던 길로 황급히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그렇다고….”
아시카는 차마 쫓아 나가지도 못하고 빗속으로 달려가는 마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나 혼자?”
보이는 거라고는 마부석 쪽에 걸린 등롱의 빛이 전부인 숲속 한복판. 차양 아래 매달려 있는 등롱의 유리는 사납게 들이친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저러다 빗물이 새어 꺼져버리지는 않을까 위태로워 보였다.
작은 창문을 통해서도 비가 들이쳐 손과 드레스 앞자락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아시카는 뒤늦게 정신이 들어 창문을 닫았다.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어쩐지 불안하다. 마부가 봤다는 불빛이 어디쯤이었는지 물어보기라도 할걸. 이대로 밤새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아시카는 양팔로 몸을 감싸 안으며 몸서리를 쳤다.
빛이 사라진 어둠 속, 마차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그제야 혼자라는 자각이 들었다. 너무 많은 사건이 연이어 벌어져서 잊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아시카는 떨리는 양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소리가 멀어지는 대신 세차게 마차를 두드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르쉬아….”
불과 몇 달 전, 그렇게 으르렁대면서도 드루쉬아는 겁에 질린 그녀를 그냥 두지 못했다. 아시카를 따라 마차에 올라 기억 언저리를 찢어발기는 난폭한 소음을 막아주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시카는 본능적으로 안온한 기억을 쫓아갔다.
콰르릉, 콰광.
“악!”
순간 몸이 들썩일 만큼 크게 놀랐다. 아시카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두려워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래서 듣지 못했다. 거센 빗소리를 뚫고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철벅거리는 발걸음과 천둥소리를 뚫고 아시카를 부르는 목소리를.
“…시카….”
마차가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천둥소리에 놀라 제 몸이 들썩이는 것이 꼭 마차가 무너지려는 것만 같았다.
“아악!”
아시카는 비명을 지르며 구석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동시에 벌컥, 문이 열렸다.
“아시카!”
시커멓고 커다란 그림자가 불쑥 마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기절할 만큼 놀란 아시카가 그나마 정신을 차린 것은, 보이지 않는 얼굴보다 귀에 익은 목소리 때문이었다.
“세상에, 여기서 혼자 뭐 하는 거야!”
“…르, 르쉬아?‘
“어디 다쳤어? 왜 혼자야? 마부는 어디 갔고?”
드루쉬아는 흠뻑 젖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질문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간신히 억누르고 있지만 몹시 화가 난 얼굴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여기가 어디라고….”
겁에 질린 아시카의 얼굴을 보고 드루쉬아는 말끝을 흐렸다.
화난 얼굴조차 너무 반가워서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마음이 이리도 약해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로지 버티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는데. 울어서도 안 되었고 무너지는 것은 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기댈 곳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쉽게 자신을 드러내고야 만다.
“걱정했잖아. 별장으로 갔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는 않고.”
드루쉬아는 습하게 젖어 든 아시카의 눈가를 쓸었다. 드루쉬아의 손은 몸서리가 쳐질 만큼 차가웠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는 손길이었다.
“…마부가 길을 잃었어요.”
“근데 왜 혼자야?”
“바퀴가 웅덩이에 빠져서 도움을 청하겠다고….”
“이런 미친. 그래서 레이디를 혼자 버려두고 갔다고?”
드루쉬아는 아시카가 혼자 남겨졌었다는 사실에 진저리를 쳤다. 이그레인 저택에서 얼마나 조용히 빠져나갔는지 저택 근처를 지키던 비밀 호위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놀란 나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귀족원 회의는 얼굴만 내밀었다가 바로 뛰쳐나와서 무슨 얘기가 어떻게 오갔는지 듣지도 못했다.
그러고도 별장 일대에 기사들을 모조리 풀어 샅샅이 뒤지는 중이었다. 와야 할 사람은 오지 않고 비는 거세지고 밤도 깊어지는 시간. 속이 타들어 가 눈앞이 캄캄하던 차에 희미한 불빛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아시카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간신히 대답하고는 있지만 겁에 질린 탓인지 혹은 빗소리 탓인지 위태로워 보였다.
“여기서 밤을 지새울 수는 없어.”
드루쉬아의 말에 아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 사냥꾼의 오두막이 있어. 비를 좀 맞더라도 거기까지는 갈 수 있겠지?”
“가요.”
어디를 가든 여기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차라리 겨울비를 맞고 말지, 폭우가 쏟아지는 마차 안에 갇혀 있고 싶지는 않았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망토 후드를 올려 머리를 가려주었다.
“비가 많이 와. 금방 젖을 거야.”
“괜찮아요. 일단 나가요.”
“내 손 놓치지 말고.”
드루쉬아는 재차 당부하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서는 순간 아시카의 머리 위로 세찬 진동이 느껴졌다. 얼마나 거센지 머리를 두드리는 느낌은 순식간에 차디찬 냉기가 되어 흘렀다.
폭우가 심해서 말을 탈 수도 없었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손을 잡고 그대로 내달렸다. 어둠 속이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데 용케 길을 찾아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질퍽할 정도로 넘치는 흙탕물이 길 곳곳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샛길 한쪽에는 계곡물처럼 세찬 물줄기가 흘렀다.
“아앗!”
진흙탕에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드루쉬아가 재빨리 잡아 넘어지는 것은 면했지만 폭우에 흠뻑 젖은 드레스가 다리에 휘감겨 제대로 걷기가 어려웠다,
드루쉬아는 얼굴에 줄줄 흐르는 물기를 손으로 쓸어내며 입을 열었다. 입안으로도 차디찬 비가 들이쳤다.
“이렇게는 안 되겠어. 차라리 나한테 업혀.”
“이 진흙탕 길을?”
아시카는 곱아드는 손을 움켜쥐고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겨울 초입에 접어든 차가운 빗줄기는 금세 체온을 앗아갔다. 어둠 속에서도 아시카의 입술이 달달 떨리는 것이 보였다. 얼굴 또한 퍼렇게 질려 있을 것이 분명하다.
드루쉬아는 잡고 있던 아시카의 손을 놓고 등을 내밀었다.
“안 떨어트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시카는 제게 내밀어진 넓은 등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이미 흠뻑 젖은 등에 굵은 빗줄기가 사납게 내리치고 있었다.
“아시카.”
초조한 목소리가 재차 채근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아시카는 척척 달라붙는 젖은 드레스를 걷어 올렸다. 차가운 빗속에 굳어진 몸이 뻣뻣해서 팔다리가 묵직하다. 머뭇거리며 양팔을 어깨에 올리자 드루쉬아가 확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아시카의 몸이 그의 등 위로 올라갔다.
“으앗!”
“힘 빼고, 그냥 가만히 있어.”
드루쉬아는 푹 젖어버린 아시카를 가볍게 업어 올렸다. 그녀의 다리를 양팔로 잡아 허리에 고정하는 몸짓이 자연스럽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도 업혔던 적이 있었나?’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미끄러지지 않게 잘 잡아.”
드루쉬아는 자신의 목에 감긴 그녀의 팔을 두드렸다. 좀 더 단단히 잡으라는 의미였다. 아시카는 저와 마찬가지로 흠뻑 젖어버린 너른 등에 얼굴을 묻었다.
“…알았어요.”
안정적인 자세를 확인하고 드루쉬아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기가 돌았던 등에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몸이 맞닿아있는 체온에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두려웠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기에 덜덜 떨리던 것도 잦아들었다. 밤이 어두워도, 무섭게 쏟아지는 폭우가 거세어도 그녀에게 느껴지는 감각은 하나였다. 한 몸인 양 닿아있는 체온이, 그 뜨거운 감각이 전해주는 온기만이 강렬하게 가슴에 전해진다.
마차가 멈춰선 곳에서 오두막까지는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거센 폭우로 인해 한 치 앞도 분간이 되지 않는 상황. 퍼붓듯이 쏟아지는 비에 다리와 옷에 튄 흙탕물마저 씻겨나갈 정도였다.
아시카를 엎은 채 드루쉬아는 몇 번이나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실로 위험한 빗길이었다.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되지 않는 폭우를 지나 걸음을 멈췄을 때 등을 사납게 두드리던 감각이 사라져 있었다. 드루쉬아가 그녀를 내려놓은 곳은 작은 건물의 처마 아래였다.
“잠깐만 기다려.”
드루쉬아는 망설임 없이 오두막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선반 어딘가를 더듬더니 갑자기 사위가 밝아졌다. 용케 등잔을 찾아 불을 붙인 것이다.
“여긴 어디죠?”
아시카의 침실보다도 작은 오두막이었다. 그 작은 공간에 벽난로와 테이블, 벽에 다닥다닥 붙은 선반과 한쪽 구석에 자리한 침대까지 있을 건 다 있었다.
“이 일대가 사냥터로 유명해서 사냥꾼 오두막이 여러 개 있어. 아마 마부가 봤다는 것도 오두막의 불빛이었을 거야.”
처음 와보는 공간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느낌이 든다.
눅눅한 냄새가 나는 작은 오두막과 하늘을 찢을듯한 천둥소리. 아시카는 흠뻑 젖은 제 몸을 양팔로 감싸 안았다.
드루쉬아가 내려놓은 순간부터 그녀의 몸은 사정없이 떨렸다. 몸서리쳐지는 오한은 몸에 스며든 한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늘과 같았던 어떤 날을 기억했기 때문일까. 아시카는 고개를 저으며 밀려드는 두려움을 털어냈다.
드루쉬아는 선반에서 마른 천을 찾아 손에 들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 옷, 벗는 게 좋겠는데.”
“여기서?”
“그대로 입고 있다간 감기 걸려. 옷은 벗어서 말리고, 마른 담요를 덮고 있으면 되잖아.”
“버, 벗고 있으라고요?”
“처음도 아닌데 뭘 새삼스럽게 그래? 우리 얼마 뒤면 결혼할 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