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언제 왔어요? 오래 기다렸어요? 사람을 보내지 그랬어요.”
“내가 반갑기는 한가 봐?”
다소 흥분한 목소리에 드루쉬아가 슬쩍 웃었다.
“그렇게 반가우면 진작 얼굴 한 번 보여주지 그랬어.”
“미안해요. 당신도 바쁠 것 같아서.”
“내가 바쁜 건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이게 다 뭐야?”
“대공령 관리자료예요. 그동안 현장에서 올라온 보고서나 재정 관련 서류인데, 분량이 워낙 많아서 오래 걸리네요.”
이 방 안에 있는 서류 모두가 대공령에 관한 것이었다. 무려 40년 동안 축적된 서류다 보니 분량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드루쉬아는 진저리를 치며 쌓여있는 일거리를 외면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였다.
“단둘이 있는 거, 너무 오랜만이지 않아?”
“이틀 전에도 만났잖아요.”
아시카는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볼일이 있다고 얼굴만 보여주고 사라졌잖아.”
“나흘 전에 신전에도 다녀왔고요.”
“각자 마차로 가서 축복만 받고 헤어졌잖아. 내가 무슨 처리해야 할 일거리도 아니고, 진짜 이러기야?”
내내 서운했던 것은 혼자였나보다. 한숨이 나올 만큼 일관적인 태도에 드루쉬아는 눈매를 좁히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럼 차라리 결혼 날짜를 뒤로 미루는 건….”
“안 돼!”
단호한 대답에 아시카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안팎으로 드러난 위협 중 어느 하나 해결된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 결혼식이라니.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은데.’
아시카와 달리 드루쉬아는 그럴수록 두 가문의 관계를 명확히 공개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심각한 얼굴 하지 말고. 이제 이그레인과 탈리온이 하나라는 걸 제국 내에서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될 거야.”
그게 더 큰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걸 드루쉬아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말해봐야 소용없을 걸 알아서 아시카는 입을 닫는 쪽을 택했다.
“아시카, 결혼에 관심 가지란 말은 안 할게. 대신 내가 있다는 걸 잊지는 말아줬으면 좋겠어.”
무심한 연인에 대한 토로였다.
아시카는 조금 미안해졌다. 드루쉬아가 원하는 일이라서 따라줬을 뿐, 신경 쓰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어지럽게 쌓여있는 서류를 뒤로하고 아시카는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우리 산책할까요?”
“이제야 봐주는 거야?”
서운해하던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떠오른다. 드루쉬아가 내민 손을 작은 손이 살며시 마주 잡았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집무실을 나오자 지나가던 하녀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얼른 시선을 피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저분이 소문으로 듣던 그 탈리온 공작님이 맞아?’
소문에 의하면, 탈리온 공작은 성질이 더럽고 절대 손해 보지 않으며 제멋대로 사람을 쥐고 흔드는 고약한 남자라고 했다. 대공령에서, 혹은 협의 테이블에서 탈리온 공작을 겪은 이그레인 사람들은 두 번 다시 부딪히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탈리온 공작을 꼽았다.
그런 남자가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시카의 손을 잡고 이그레인 공작저를 활보하는 모습은 가히 충격이랄 만 했다. 웨이브가 저 꼴을 보지 않으려고 집을 나갔다는 말이 이해될 정도로.
‘아휴, 우리 아가씨가 저렇게 변할 줄이야.’
엄격한 웨이브와 못지않게 완고한 아시카였다. 소공작이라는 위치 때문에 더욱 한 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녀가 결혼을 앞두고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도 잘 어울리잖아?’
‘아가씨 웃는 것 좀 봐.’
티 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아시카의 눈매와 입가가 살며시 휘어있었다. 새카만 눈동자는 아닌 척하면서도 자꾸만 드루쉬아에게 향했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는 한없이 깊고 다정했다.
조금 걷다가 아시카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주고, 또 몇 걸음 걷다가 그녀의 뺨을 매만진다. 바람에 낙엽이 흩날리자 몸으로 가로막아 선 채 푸슬푸슬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바라만 봐도 좋은 듯 드루쉬아의 입가에서는 내내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타고난 커다란 골격과 검술로 다져진 탄탄한 몸, 그림자마저 위협적인 커다란 사내 앞에서 아시카는 이제 막 새싹을 틔운 여린 가지처럼 생기 넘치면서도 가녀리게 보였다.
그림처럼 수려한 남자가 아시카를 보물단지라도 되는 양 애지중지 끼고 도는 모습에 보는 사람들의 심장이 다 간질거렸다. 돌아서는 하녀들은 한편으로는 신기해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워하며 저희끼리 낯을 붉혔다.
서늘한 늦가을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질 만큼 아시카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멀리서 소곤거리는 하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두 사람이 정원으로 나왔을 때 멀리 정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문이 열리는 동시에 다급하게 말을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미하일이 아닌가요?”
상대를 알아본 아시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굳이 여기까지 찾아올 만큼 급한 일이 뭐가 있을까.
‘방해하지 말라니까, 찾아와도 꼭.’
드루쉬아는 이마를 구기며 아시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을 발견한 미하일이 재빨리 말에서 내렸다.
“각하, 지급입니다.”
“여기 온다는 말을 하지 말 걸 그랬어.”
“각하께서 급한 소식은 모두 이리로 전달하라고 하셨잖습니까.”
드루쉬아의 핀잔에 미하일은 억울한 소리를 내었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이마에서는 땀이 배어났다.
“그래서 뭐가 그렇게 급한데?”
미하일이 슬쩍 아시카의 눈치를 보았다. 드루쉬아는 괜찮다며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손짓했다.
“그게, 지금 귀족원 회의가 진행 중이랍니다.”
“귀족원이? 무슨 이유로?”
아시카는 놀라 반문했고 드루쉬아의 얼굴은 빠르게 굳어졌다.
“대공성의 봉쇄가 깨졌다는 탄원서가 날아들었습니다.”
“탈리온을 겨냥했겠군.”
반발은 예상했었다. 거기다 마이헬러가 뒤에 있다는 걸 고려하면 대공성 문제가 가시화되는 건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아시카의 얼굴도 절로 굳어졌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빨리 일이 커진 게 아닌가 덜컥 두려움이 들었다.
“저희 쪽도 연락받은 게 없어요. 어떻게 이그레인과 탈리온 양쪽 모두를 배제할 수 있죠?”
“지금 같은 상황이니까. 귀족원이라 해도 두 공작가를 한꺼번에 상대하고 싶지는 않았겠지.”
“가보시겠습니까?”
드루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를 빼놓고 저희끼리 얼마나 분탕질을 칠지 궁금했다. 이때를 노려 귀족들은 제 잇속을 챙기려 할 것이고 황제 또한 마찬가지일 터다. 드루쉬아가 고대하던 바였다.
“아 참, 이거.”
드루쉬아는 내내 잡고 있던 아시카의 손을 놓았다. 불현듯 느껴지는 한기에 아시카는 허전해진 손을 움켜쥐었다.
“선물이 될지 숙제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그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작은 수첩이었다.
“이게 뭐예요?”
“샤프리에게 받은 거야. 마이헬러 후작저에서 몰래 베껴 온 거라더군.”
검은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바로 받아서 펼쳐보려는 것을 드루쉬아의 손이 슬며시 덮었다.
“일은 나 없을 때 해. 어떻게 그 잠깐을 못 참아.”
“그게 아니라…. 지금 바로 가는 거예요?”
아시카는 민망해진 얼굴로 수첩을 든 손을 내렸다.
“폐회 전까지는 가서 얼굴이라도 내밀어야지. 그래야 뜨끔하지 않겠어?”
“조심해요.”
“최대한 빨리 다녀올게. 이번에는 우리 집에서 보자고. 집사가 방을 꾸미는데 정작 공작부인께서 협조를 안 해 준다고 원성이 자자해. 사실 그 방은 필요 없는데 말이야.”
방이야 하나만 있으면 족하지.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아시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다녀와서 봐요.”
“기다리고 있어.”
불안했던 마음은 농담 같은 진담 한마디에 날아가 버렸다.
드루쉬아는 쿡쿡, 웃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쉬움 탓인지 기분 탓인지 드루쉬아의 입술은 꽤 오래 아시카의 이마에 머물렀다.
* * *
이그레인 저택에 손님이 찾아든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예정에 없던 방문자로 인해 저택의 정문에서는 작은 소요가 일었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황궁에서 나온 수사관을 이렇게 문전 박대하는 법이 어딨나?”
“그래서 지금 심부름꾼이 저택으로 갔으니….”
“일단 문부터 여시게!”
문지기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동안 훈련장에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 정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누군데 이렇게 막무가내야?”
잔느는 얼굴에 흥건하게 배어 나온 땀을 닦으며 이마를 구겼다.
“황궁 소속의 수사관이랍니다.”
모여든 기사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황궁에서 왜?”
“무슨 일 있습니까?
잔느는 동요하는 기사들에게 손을 내저어 보이곤 문지기에게 물었다.
“폐하의 명령서를 들고 왔나?”
“그게 아니라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씀드렸는데….”
황궁에서 나왔는데 황제 폐하의 명령은 아니다. 공식적인 방문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웨이브와 함께 기사단장 펄번도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방문객을 알리기 위해 본채로 갔던 마릴린이 다급히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마릴린은 잔느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저었다.
“문 열어봐. 황궁의 사람을 문전 박대했다는 소문이 나면 곤란하지.”
“예, 알겠습니다. 베르트 경.”
허락이 떨어지자 정문이 열리고 가까이에 서 있는 마차가 보였다. 별다른 문장이 없는 평범한 대여소 마차였다. 그 옆에서 기다리던 두 사람이 다가왔다. 서른 남짓 되어 보이는 이들은 황궁 근무자들이 입는 정복 차림이었다.
“더 이상은 못 들어옵니다.”
잔느는 손을 들어 상대의 저택 진입을 막았다. 잔느가 나서자 나머지 기사들이 주위를 둥글게 에워쌌다. 두 사람은 기세등등한 기사들을 보며 혀를 찼다.
“주인을 만나겠다는데 뭐가 이리 살벌한가?”
“용건을 말씀하십시오.”
“황궁에서 왔다잖소. 정식 수사 의뢰가 들어오기 전에 사전 답사차 온 건데 그걸 일일이 기사들에게 설명해야 하나?”
앞을 막아선 기사들을 훑어보는 시선이 무례했다. 방문자들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대접해드려야 마땅하지만 지금 공작저에는 두 분 주인이 모두 안 계십니다. 걸맞은 응대가 어렵기에 안으로 들일 수 없다는 점 이해 바랍니다.”
잔느는 유연하게 두 사람이 들어올 수 없는 이유를 밝혔다.
상대는 황궁 소속의 귀족이었다. 방문을 허락할 주인도, 손님의 신분에 걸맞게 응대할 주인도 없었다. 이는 약속을 하지 않고 들이닥친 상대의 책임이었다.
“이그레인 소공작께서 부재중이라고?”
의심 가득한 눈초리가 잔느를 노려보았다. 잔느를 비롯한 기사들의 얼굴은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핑계를 대고 있다는 의심은 드는데 더는 무작정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그럼, 이그레인 공작이나 소공작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려도 상관없겠소?”
잔느의 입에서 순간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다.
“공작님의 허락 없이 안으로 모실 수는 없습니다만, 굳이 밖에서 기다리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어지간하면 이쯤에서 물러나야 했다. 상대도 귀족인 만큼 체면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상대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저희는 마차에서 쭉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기왕이면 어디 계신지 소식을 전해준다면 더 좋고요.”
잔느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아무래도 작정하고 온 모양이다. 쉽게 물러가지 않겠다는 태도가 분명했다.
마릴린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일이 더 꼬이는 것 같은데.’
응대할 사람이 없으니 돌아가라고 지시를 내린 것은 아시카였다. 그런데 설마 가지도 않고 정문 앞에서 버틸 줄이야. 방문객이 마차로 물러나는 것을 보면서 마릴린은 황급히 본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