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23화 (123/153)

#123.

잡목이 자라는 얕은 구릉 사이로 인가가 드문드문 이어졌다. 허름한 목책으로 둘러싸인 작은 농가들을 지나서 넓게 펼쳐진 들녘은 추수가 끝난 귀리밭이었다.

황량한 들녘 끝자락에 작은 성채도시가 보이자 나일을 태운 말이 속도를 늦췄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말의 움직임도 점점 늦어졌다. 마치 그의 마음처럼.

이른 새벽 성문을 지키는 병사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꾸벅꾸벅 졸았다.

우유 배달을 위해 마차를 끌고 온 농가의 주인은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고 성문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일을 하기 위해 성채 밖으로 나가는 사람과 반대로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서로 교차했다.

한때는 이민족을 막아내던 땅이었으나 제국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쓸모없어진 작은 성채.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평화로운 시골 영지의 이른 아침 풍경이었다.

시가지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작은 중심가를 지나서 마침내 내성의 입구에 다다랐다. 워낙 오래된 성채이다 보니 성벽이 낮았고 문의 크기도 작았다.

굳게 닫혀있는 문 앞에서 나일은 고개를 들었다. 성문 위 낮은 벽체 안쪽으로 사람의 머리가 보였다. 내성의 문을 지키던 병사도 졸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봐.”

“어이쿠야.”

화들짝 놀란 병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불과 2층 정도의 높이라서 상대의 얼굴이 빤히 보이는 거리였다.

“뉘, 뉘쇼?”

성문 아래쪽을 보며 반문하는 병사는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이었다.

“못 보던 얼굴이네? 일한 지 얼마 안 됐나 봐?”

“한 두어 달 됐습니다만, 누구신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얼빠진 표정을 하면서도 병사는 조심스러웠다. 저를 보는 태도가 범상치 않았던 탓이다.

“문이나 열어. 간만에 집에 왔는데 얼굴도 못 알아보는 문지기라니. 도로 나가야 하는 건지, 원.”

불퉁한 핀잔에 병사는 다시 나일을 살펴보았다.

두툼한 가죽 외투와 낡은 여행자용 망토, 군화와 비슷하게 질기고 투박한 부츠는 어딜 봐도 귀하게 보이지 않았다. 허리에 찬 검조차 비싼 물건이 아니라서 지나가다 마주치면 떠돌이 용병이겠구나 생각할 행색이었다.

그러나 짧은 회색 머리칼에 청회색 눈동자는 이 지방에서 흔한 외양이 아니었다. 문득 스치듯이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수년 전 네드로프 가문을 뛰쳐나간 괴짜 장남의 이야기를.

“으헉, 고, 공자님?”

“문, 안 열어?”

화들짝 놀란 병사가 다급히 어디론가 달려갔다. 안쪽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낡은 성문이 긁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성채의 사용인들이 이제 막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 갑작스러운 방문자로 인해 성채 안쪽이 떠들썩해졌다.

나일은 달려 나온 시종에게 말을 넘기고 성채 안쪽으로 들어섰다. 작지만 고풍스러운 홀은 난방이 되지 않아서 바깥과 별 차이 없이 찬바람이 휘돌았다.

한때는 너무 크고 암담해 보였던 공간이었다. 차디찬 석조로 쌓아 올린 내부에서는 이제 해묵은 시간의 냄새만이 선명하다.

홀 안쪽 계단에서 다급히 달려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형님!”

바닥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홀 중앙을 지나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너무 하세요!”

갈색 머리칼에 갈색 눈동자를 지닌 이제 겨우 열다섯이 된 소년이었다. 흥분으로 홍조가 올라온 얼굴에서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느껴졌다.

“너무하긴. 이렇게 돌아왔으면 됐지.”

“어떻게 서신 한 통도 안 보내줘요?”

“그럴 새가 없었어.”

“파병 기간은 작년에 끝났잖아요. 어디 계시다 이제야 온 거예요?”

“작년에 잠깐 들렀었는데? 못 들었어?”

나일은 저보다 한참 작은 피엘의 머리를 슥 매만지며 웃었다. 돌아오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고 싶은 사람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네드로프의 둘째 아들이자 유일한 적자인 피엘리드. 나일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제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한때는 그가 부러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저를 진짜 피붙이라고 믿는 무지한 순수함이.

나일은 진짜 가족이 아닌 남의 둥지에서 태어난 뻐꾸기 새끼일 뿐이었다. 얼마나 고귀한 피를 타고났든 그건 의미가 없었다. 누군가 원치 않는 생명. 남의 둥지에 빌붙어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는 존재일 뿐.

놀라 달려 나온 사용인들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공자님.”

“방을 곧 치울게요. 잠시만 응접실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하녀장이 방으로 가려는 나일의 발길을 잡았다. 예고도 없는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방은 청소를 안 한 지도 꽤 되었다.

상황이 짐작되어서 나일은 쓰게 웃었다.

“대충해도 돼. 오래 안 있을 거야.”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공자님. 거기 뭐해? 얼른 가서 청소부터 해. 이불 바꾸고.”

하녀장은 마중 나온 하녀들을 다그치며 2층으로 몰아갔다. 부산스럽던 사용인들이 우뚝 멈춰 섰다. 꼬리처럼 줄줄이 이어지는 인사 뒤에는 베니아 네드로프 자작 부인이 있었다.

아들 피엘과 꼭 닮은 얼굴형에 다소 큰 키,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드는 여자의 표정은 엄격해 보였다.

“왔느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평안하셨습니까.”

오랜만의 해후인데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인사였다. 괜스레 눈치가 보였는지 사용인들은 서로 옆구리를 찌르며 자리를 피했다.

“자작께선 출타 중이시다. 돌아오시려면 일주일쯤은 걸릴 거야.”

“아마… 뵙지 못하고 갈 것 같습니다.”

베니아는 나일이 아주 돌아왔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일도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서먹한 베니아의 태도에 피엘이 머쓱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나일은 불편함을 숨기지 않는 베니아를 뒤로하고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굳게 닫혀있는 방문이 열리는 동안 복잡하고 해묵은 감정이 뒤섞인다. 실체를 알고 싶지 않아서 오래도록 외면해온 그런 감정이.

낡은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마침내 한 발 들인 공간은 오래된 성채만큼이나 황량하고 싸늘했다. 카펫이 치워져 고스란히 드러난 바닥과 과거의 어느 계절에 멈춰버린 침구, 무심결에 매만진 테이블에서는 뽀얀 먼지가 묻어난다.

4년간 주인을 잃었던 침실은 방치된 채 고립되어버린 자신만큼이나 쓸모없는 공간이 되어있었다.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하녀의 부탁에 나일은 먼지 쌓인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보았다.

‘이래서 돌아오기 싫었는데.’

나일은 푸념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기억이 시작된 아주 오래전부터 부모님과의 관계는 서먹했다. 따뜻하게 안겨본 기억이 없는데도 어릴 때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동생이 태어나면서부터였다.

나일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애정을 동생에게 쏟아내는 걸 보면서 이상하다고 느꼈다. 저에게 문제가 있는 걸까, 왜 사랑받지 못하는 걸까, 그리 생각하면서. 그러나 어린 나이에도 부모와의 냉랭한 관계를 좁히기 어렵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나일은 일찌감치 제 속내를 감추는 법을 배웠다. 천성이 활달해서 부모의 애정을 포기한 대신 사용인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머리가 커갈수록 의문은 커져갔다.

장난기가 많은 탓에 이런저런 사고를 많이 쳤지만 자작 부부는 한 번도 혼내는 법이 없었다. 동생 피엘이 잘못했을 때는 예법을 따져가며 가르치면서도 그에게만은 거리를 두었다.

살갑게 안아주는 일도 혼내는 일도 없었다. 그 기묘한 거리감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마냥 겉돌았다. 그리고 진실은 예기치 못하던 순간에 불현듯 그에게 다가왔다.

언제나 어려웠던 모친보다 더 자주 얼굴을 보여주던 여자가 있었다. 이름도 신분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부모님이 귀하게 대하던 여자는 남몰래 자작성을 찾아와 이곳저곳을 배회하다 돌아가고는 했었다. 얼굴을 드러내는 걸 꺼려한 탓에 사용인들은 그녀를 ‘그림자 부인’이라 부르며 궁금해했다.

나일이 열두 살이 되던 해 겨울, 사용인들을 따라 사냥터에 갔다가 사고가 났다. 날뛰는 멧돼지에게 들이받혀서 옆구리가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일주일 넘게 사경을 헤매는 동안 그의 곁을 지킨 것은 모친 베니아가 아닌 그 여자였다. 그렇게 알게 되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진실을 아이는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를 낳아준 어미는 서먹하고 어렵던 베니아가 아니라, 제 머리맡에서 서럽게 울던 정체 모를 여자라는 걸. 희미한 의식 속에서 자작 부부가 여자를 폐하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베니아가 한때 황후의 시녀였다고 자랑스레 떠들던 하녀들의 이야기를. 결혼으로 수도를 떠나온 얼마 뒤, 황후께서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니아가 오래도록 울었다는 이야기도.

여자의 이름은 클레멘 마제스. 마제스 백작가의 적녀로 한때 제국의 황후였으나 황태후의 미움을 받아 폐위된 인물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불임이었으나 실제 내막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일은 방황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진실이 혼란스러워서 몇 번이고 집을 뛰쳐나가고 헤매기를 몇 년. 그가 더 큰 사고를 치지 않을까 염려하던 클레멘은 결국 진실을 고백했다.

나일과 자작 부부 모두가 알지만 입을 다물고 있었던 진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고백이었다. 자작 부부는 한 번도 나일에게 가족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저에게 애정 한 자락 내주지 않은 자작 부부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옛 주인에 대한 충성심과 애정은 별개였다. 네드로프 자작가는 가문의 명운을 걸고 폐황후의 아이를 품에 안았지만 부모로서, 가족으로서 사랑하지는 못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더 확연히 느껴지는 감정. 네드로프 자작 부부는 그를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는 황태후의 눈을 피해 누구도 모르게 태어난 황족이었다.

출생을 들켜서도 안 되고 자손을 남기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황태후가 살아있는 한 나일과 클레멘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울 뿐이었다.

그래서였다. 눈치 보며 짓눌린 삶을 살아가는 것을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뛰쳐나왔다. 열여섯, 나일은 파병군으로 자원하면서 숨 막히는 네드로프 영지를 떠났다.

어색함이 감도는 저녁 만찬 자리에서 간간이 분위기를 환기한 것은 피엘이었다. 식사 시중을 드는 사용인들은 베니아의 눈치를 보았고 나일은 말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어릴 때 활달하고 유쾌했던 성격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불편한 식사 자리를 뒤로하고 침실로 돌아왔을 때 쌓여있던 먼지는 모두 치워진 뒤였다. 그래도 방 안의 한기가 가시지 않아서 나일은 외투를 벗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작고 조심스러운 소리였다. 나일은 숨을 멈추고 방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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