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22화 (122/153)

#122.

“검토가 끝난 건가요?”

“흠, 검토라.”

드루쉬아는 손으로 턱을 쓸며 말끝을 늘였다. 제 손에 있는 서류를 보며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곤혹스러워하는 아시카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지?’

순서가 엉망이었다. 탈리온 저택을 방문한 첫날 공작부인의 침실을 차지하더니 정신없이 휩쓸려 식도 없이 혼인 서약서를 작성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은 홀린 듯이 서로에게 얽히다가 정신 차려 보니 부부가 되어있었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드루쉬아 앞에서 아시카는 제 얼굴을 가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일단 이그레인 공작님께서 보낸 요구서를 토대로 가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지금 확인해보시겠습니까?”

“이리 주세요.”

칼프는 미리 준비된 양식의 문서를 아시카에게 건넸다.

본래 고위 귀족의 결혼식에는 혼인 서약서 외에 혼전 계약서를 주고받는다. 양측의 요구를 조율하는 과정을 거쳐 최종 계약서가 완성되고 이후 결혼식을 치르게 된다. 그 과정이 보통 반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실제 결혼까지는 꽤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특히나 양쪽 모두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인 지금 같은 경우는 결혼이 성사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태어날 아이의 후계자 지정부터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얽히기 때문이다.

드문 사례인 만큼 혼전 계약서는 더욱 중요했다. 아시카와 드루쉬아는 결혼 전에 준비했어야 할 혼전 계약서를 이제야 작성하게 된 것이다.

웨이브는 이 거래에서 아시카가 드루쉬아에게 휘둘릴까 봐 먼저 계약조건을 보내 놓았다.

“이그레인 공작께선 어때?”

드루쉬아는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그간 봐온 모습이 있으니 염려가 될 법도 하다. 아시카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하셨어요.”

쿡, 하고 드루쉬아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웃음이 나왔다.

아시카는 제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뜨끈뜨끈해지는 얼굴을 차마 들 수가 없어서였다.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아시카를 불러들인 웨이브는 망연한 얼굴로 한참 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한 가지만을 물었을 뿐이다.

「이 결혼에 너도 동의하느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시카를 보며 웨이브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저질러진 일이었다. 해묵은 감정보다는 아시카를 보호해 줄 강력한 힘이 더 간절한 상황.

“허락 없이 일을 밀어붙여서 미안해.”

드루쉬아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백지 서명이었어. 당신이 서명을 넘겨준 순간부터 내게 모든 권한을 넘긴 거라고.”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혹시 이 결혼을 원치 않는 건가?”

웃음기 머금었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령 그렇다 해도 물러서 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아시카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미리 물어봤다면 틀림없이 반대했을 것이다. 싫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너무 큰 짐을 안겨주는 일이었기 때문에.

드루쉬아의 표정이 다시 느슨하게 풀어졌다. 아시카가 걱정하는 무엇도 개의치 않는 것처럼.

“모든 부담은 내가 떠안고 가.”

그녀의 염려를 드루쉬아는 단호하게 일축했다.

“네가 염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그러니까 얼굴 좀 펴지?”

“르쉬아, 이 결혼은 당신에게 손해예요.”

매 순간 자신의 이익을 최선으로 하는 남자였다. 이 거래가 대체 무슨 이익이 있을까.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얻었어. 그러니 이 정도쯤이야.”

그게 바로 너라고, 집요하게 바라보는 짙푸른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시카는 다시 얼굴이 달아올라 시선을 돌렸다.

이 모든 상황이 낯설기만 하다. 불과 며칠 전까지 진창 속에서 헤매고 있었는데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제 결혼으로 현실의 고민이 모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양측의 보좌관인 쥴마와 칼프도 감회가 남다른 표정이었다. 언제나 냉정을 유지하던 칼프마저 다소 넋 빠진 표정으로 아시카를 바라보았다.

지난 몇 년간 두 사람은 협의를 위해 수없이 한 테이블 앞에 마주 앉았다. 설마 그것이 결혼 협의까지 이어질 줄이야.

“수정을 원하는 내용이 있다면 지금 말해.”

드루쉬아의 목소리가 현실을 일깨웠다. 아시카는 열 오르는 얼굴을 다독이며 가 계약서를 읽어내려갔다. 오락가락하는 기분 탓에 글자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아시카의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내용이 있었다.

“태어난 아이가 외동일 경우 이그레인이 우선이라고? 이걸 동의한다는 말이에요?”

“이그레인 공작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조항이라고 했어. 뭐 나도 크게 불만은 없고. 문제가 없도록 내가 열심히 노력할게.”

“아니, 그게 노력한다고….”

“물론 네가 원치 않으면 무리하지는 마. 나는 아주 열심히 노력하고 싶지만.”

무슨 노력을 하겠다는 말인가. 아시카는 계약서로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쥴마가 민망한 얼굴을 돌리고 칼프도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모두를 민망하게 만들고도 드루쉬아는 태연했다.

“대신 단서조항을 달았잖아. 그 아래를 읽어 봐. 아이가 둘 이상일 경우에는 내 선택을 우선으로 하기로 했어. 어느 쪽이든 기사가 되는 아이가 탈리온의 후계자가 되는 거야.”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이 계약서는 드루쉬아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이어지는 조항을 보고 아시카의 눈은 더욱 휘둥그레졌다.

“이 조항은 뭐죠? ‘상호 간에 정부는 허용하지 않는다’라뇨?”

세상에, 결혼 계약서에 이런 내용까지 들어갔었나?

놀라는 아시카를 보고 드루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놀라? 당연한 거 아냐? 만약 그럴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꿈도 꾸지 마.”

“아니, 그런 꿈은 꿔본 적도 없지만….”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말할 것까지야. 실은 정부에 대한 내용 보다 그 밑에 붙은 단서조항이 무시무시했다.

이 조항을 어길 시 이혼하는 게 아니라 그 즉시 작위를 자녀에게 이양하고 가문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외도를 한 사람은 상대 쪽 가문에 완전히 귀속되는 것이다.

‘무슨 처벌조항이 이래? 이상해.’

아무래도 계약서가 좀 이상하다. 뭘 목적으로 작성된 계약서인지 아리송했다.

“그 조항을 빼달라는 요구는 하지 마. 양보는 없어.”

“뭐, 제가 정부를 둘 일은 없으니까 이건 넘어가죠.”

아시카는 꼼꼼히 계약서를 읽어내려갔다.

“그런데 거주지 문제는 왜 이런 거죠? 1년 중 이그레인에서 4개월, 나머지는 탈리온 영지에서 머물러야 한다니, 차이가 너무 나잖아요.”

이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아시카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탈리온은 국경지대를 책임져야 하는 의무가 있어. 지금은 조부님께서 계시지만 언젠가는 내가 해야 할 일이야.”

“그러면 일정 기간은 각자 영지에서 머무는 걸로 하죠.”

드루쉬아의 눈꼬리가 획 치켜 올라갔다.

“안돼! 별거는 절대 안 돼.”

“그건 별거가 아니잖아요.”

“부부가 따로 살면 그게 별거지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와 떨어져 있고 싶어서 그래? 혼인 서약서까지 신고하고 나니까 벌써 지겨워지는 것 같아?”

드루쉬아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올라갔다. 매년 협의 테이블에서 의견 차이가 있을 때마다 보여주던 표정. 뭔가 심사가 꼬였을 때 나오는 등골이 오싹한 미소였다.

“아니 말이 왜 그렇게 돼요? 효율을 따져서 움직이자는 거잖아요.”

“그깟 효율이 나보다 더 중요해?”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표정은 진심이었다. 잘못 대답했다간 더한 후폭풍이 따라올 것만 같았다.

‘원래 뒤끝이 긴 남자였지.’

한동안 다정하게 굴어서 잊을 뻔했다. 가문 간의 문제에서는 언제나 드루쉬아가 아시카를 휘둘러왔다는 사실을.

‘일단은 건들지 말자.’

“지금은 양쪽 모두 조부님께서 계시니까 나중에 다시 협의하는 것으로 해요.”

아시카는 펜을 들어 수정사항을 옆에 적었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결혼식이 다음 달이라뇨. 날짜가 너무 촉박해요.”

“우린 이미 부부야. 결혼식을 미뤄야 할 이유가 없잖아.”

드루쉬아는 한 달이 아니라 일주일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납치해 제 방에 데려다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걸 모르는지 아시카는 결혼 날짜를 두고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더 당길 게 아니라면 양보 못 해.”

“여기서 양보해 줄 수 있는 조항이 있긴 한가요?”

“아마 없을걸?”

금세 기분이 풀어졌는지 드루쉬아는 선선히 웃으며 대답했다. 다정한 미소에 어울리지 않는 뻔뻔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아시카는 대놓고 반박하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 드루쉬아가 양보한 만큼 나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었다.

“이제 확인은 끝난 건가?”

“수정된 내용으로 다시 작성해서 서신을 보내도록 하죠.”

“이 정도로 무슨 서신까지 필요해. 여기서 마무리하지. 칼프.”

“네, 각하.”

“이 내용대로 재작성하고. 그쪽은 쥴마라고 했나? 이대로 지금 계약서를 작성해주게.”

쥴마는 떨떠름한 얼굴로 아시카를 돌아보았다. 한숨을 폭 내쉬면서 아시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보좌관이 같은 내용으로 계약서를 작성하는 동안 응접실에는 사각사각 펜 긁는 소리만 들렸다. 드루쉬아는 계약서가 완성되는 동안 문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쥴마가 완성된 문서를 넘겼을 때 아시카는 기묘한 표정이 되었다.

“서명 안 해?”

숨죽이고 있던 드루쉬아가 채근했다. 잉크병을 슥 밀어주면서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유독 짙고 크게 느껴졌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어차피 혼인 서약서까지 작성이 끝난 마당이니 물릴 수는 없었다. 마침내 두 사람의 서명이 들어간 계약서가 완성되었을 때, 드루쉬아는 긴장된 숨을 토해냈다.

혼인 서약서는 제멋대로 만들어 신고했지만, 이 결혼 계약서는 온전히 아시카의 의지로 서명했다. 결혼에 대한 그녀의 의지를 드러낸 서명인 셈이다.

슬금슬금 입꼬리가 올라갔다. 드루쉬아는 웃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계속 달아나려던 여자가 스스로의 의지로 제 손을 잡은 것이다.

드루쉬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는 한배를 탄 운명이야.”

그 끝이 어디로 향하든 이제는 함께였다. 그것으로 족하다고, 드루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마음 놓여서 아시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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