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두 사람이 나가고 난 뒤에야 회의실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오클레인 후작가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해 누군가는 안타까워했고 누군가는 글레노아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했다.
“레이디 슈베른은 가문이 몰락하여 혼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식 고발이 이루어지면 법정에 서게 될 텐데 법정 후견인이 없습니다. 탈리온 공작께서 데려오셨으니 법정까지 책임지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억지입니까? 황궁의 근위대와 치안대가 찾지 못한 살인범을 데려왔는데 그 뒤까지 책임지라는 말입니까?”
루테넌 백작의 질문에 드루쉬아는 단칼에 선을 그었다.
백작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카는 글레노아로 인해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드루쉬아가 살인범의 일신까지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었다.
“좋습니다. 오클레인 후작은 빠른 시일 내에 고발을 진행할 겁니다. 이 문제는 법정으로 넘어갈 테니 귀족원 회의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소요가 가라앉고 나자 루테넌 백작이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그럼 이번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고….”
“다들 잊고 계신 모양인데, 그보다 더 큰 사안이 있지 않습니까?”
루테넌 백작이 회의실을 정리하려는데 드루쉬아가 다시 나섰다.
“탈리온 공작께서는 정식 발의하고자 하는 안건이 있습니까?”
“살인 사건보다 더 큰 사안입니다. 지난번 황궁 연회에서 있었던 일은 어쩌시렵니까?”
“허.”
“그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귀족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내내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루테넌 백작도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황족에 대한 문제는 귀족원 회의에서 다룰 사안이 아닙니다.”
무려 40년 전의 일이었다. 황태후가 숨겨온 출생의 비밀이 드러났다고 해서 40년 전의 과거사를 끄집어낼 수는 없는 노릇. 설령 문제가 있다 한들 누구도 황족을 고발할 수는 없었다. 황족을 처벌할 권한을 가진 것은 오로지 황제뿐이다.
만약 아크펠라 대공가가 억울한 누명으로 멸문했다면 이는 귀족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문제였다. 그러나 누가 감히 황제의 모후를 상대로 문제를 제기할까.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황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대공령에 대한 문제라면 사안이 다릅니다.”
예상한 반응이었는지 드루쉬아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시겠지만 탈리온은 이제껏 선황제 폐하의 뜻을 받들어왔습니다. 대공령의 마지막 상속자인 황태후 폐하께서 짊어져야 할 책임을 나눠 받은 겁니다. 그런데 황태후 폐하께서 대공령과 아무 관련이 없는 분이라면 대공령의 현재 주인은 대체 누구입니까?”
드루쉬아가 던진 질문에 귀족들이 숨을 죽였다.
여러 가지 면에서 대공령의 상황은 특수했다. 반역으로 멸족된 만큼 아크펠라 대공가의 이름은 귀족의 계보에서 사라져야 했다. 이 경우 대공령은 황제의 직할령, 또는 귀족가에 의해 재편성되어야 했다.
그런데 선황제는 아크펠라와 관련된 모든 기록을 처분하면서도 귀족의 계보에서만큼은 완전히 지우지 않았다. 대신 마지막 혈족인 황태후가 계승한 것으로 처리했다.
결혼으로 인해 황족에 속하게 된 자는 가문의 계승권을 포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남은 혈족이 전혀 없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승계가 가능한데, 그렇게 황태후에게 계승된 권한을 다시 선황제가 위임받는 것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그 권한으로 선황제는 대공령을 봉쇄했다. 단지 대공령을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렇게 복잡한 처리는 필요 없었다. 선황제는 대공령이 그 어떤 힘도 갖지 못하도록 막고 철저히 말라 죽는 것을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조치의 근거가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대공령의 귀족들이 부당한 봉쇄를 참아왔던 건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크펠라의 마지막 혈족인 황태후가 언젠가는 대공령을 소생시켜 줄 거라는 희망.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거짓이고 위선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대공령에서 숨죽이고 있던 귀족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탈리온 공작께서는 이 문제를 귀족원의 이름으로 정식 발의하기를 원하시는 겁니까?”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황태후 폐하의 출생을 캐묻자는 것이 아니라 대공령의 문제를 정리하자는 말입니다.”
말이 쉽지, 실제로는 엄청난 문제였다. 아크펠라 대공가의 계승권을 정리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40년 전 반역 문제가 거론될 수밖에 없고, 그 문제가 수면 위로 나오면 과거 선황제가 처리한 내용까지 줄줄이 엮여 나오게 된다.
그야말로 기름 창고에 불씨를 던지는 일이었다.
“이 문제는 오늘 논의할 수 없습니다. 중대 사안을 처리하기에는 참석자의 수가 부족합니다.”
“그건 귀족원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다만 이 문제만큼은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겠군요.”
드루쉬아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탈리온은 이제 대공령을 관리하는 일에서 물러나고자 합니다.”
“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회의실이 다시 어수선해졌다. 내내 상황을 지켜보던 웨이브조차 놀란 눈을 크게 떴다.
탈리온이 병력을 철수시키면 대공령 관리는 공중에 붕 뜨게 된다. 다른 귀족들의 병력을 끌어온다 해도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두 달 동안 병력을 순차적으로 철수하겠습니다. 다음 회의가 소집될 때 이 문제도 고려해주면 좋겠군요.”
반발하는 귀족들의 반응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드루쉬아는 제 할 말을 남기고 입을 다물었다.
회의실은 한동안 어수선한 소란이 오갔다. 황태후의 문제부터 대공령과 얽힌 탈리온이 던져놓은 문제까지. 더 이상 논의가 진행되기도 어려운 상황. 루테넌 백작은 폐회를 선언했다.
회의실을 빠져나온 직후 웨이브가 드루쉬아를 불렀다. 그 역시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탈리온 공작, 이게 무슨 짓이오? 대공령을 혼란에 빠트릴 셈인가?”
“혼란에 빠질지 기회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습니까.”
“지금 뭘 부추기는 거요? 그러다….”
웨이브는 다음 말을 삼켰다.
“황제는 대공령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게 될 겁니다. 그거야말로 바라는 바입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웨이브를 보며 드루쉬아는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 * *
다음 날 오클레인 후작은 정식 절차를 밟아 글레노아를 고발했고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재판 날짜가 잡혔다. 그러나 재판 날짜가 잡히는 날 글레노아는 임시 수감소로 옮겨지는 도중에 실종되었다.
오클레인 후작이 거세게 항의했지만 이 사건은 시작에 비해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글레노아를 추적하기 위한 용병들이 고용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후 후작은 영지로 돌아갔다.
귀족들은 오클레인 후작의 영지행에 대해 장남의 사망 사건을 재조사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그렇게 수도를 떠들썩하게 뒤집어놓았던 사건 하나가 조용히 막을 내렸다.
일련의 사건들이 걸러지지 않고 아시카의 머릿속을 줄줄이 지나갔다. 백치가 되어버린 것처럼 생각이 돌아가지 않았다.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이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아시카는 콩, 하고 창문 유리에 이마를 부딪쳤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되지?’
아시카가 충격으로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드루쉬아는 순식간에 상황을 휘어잡아 몰아쳤다. 영지전을 외치는 오클레인 후작을 단숨에 제압하고 빠르게 범인을 잡아내 불순한 의혹을 잠재웠다.
그 과정에서 조금의 망설임이나 고민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드루쉬아는 확신을 지니고 움직이고 있었다. 아시카도 모르는 분명한 어떤 확신을.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조용히 응접실 문이 열렸다.
“몸은 괜찮은 거야?”
“아, 르쉬아.”
걱정스러운 목소리는 드루쉬아의 것이었다. 아시카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실내를 압도하는 훤칠하게 커다란 체구에 시원하게 넘겨 빚은 짧은 금발, 전보다 더 깊어진 푸른 눈동자와 부드럽게 휘어진 입매. 아시카를 바라보는 눈동자에서 다정한 온기가 느껴졌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이그레인.”
드루쉬아의 뒤를 따라온 것은 칼프였다. 아시카는 가벼운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입을 열었다.
“레이디 슈베른이 실종됐다고 들었어요. 혹시 오클레인 후작이 손을 쓴 건 아닐까요?”
어제 소식을 들은 뒤부터 내내 마음에 걸렸던 참이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쥴마를 흘깃 보았다. 이그레인 저택에서 아시카와 가장 가까이 지내는 남자. 존재감을 거의 드러내지 않아서 트집 잡을 구석도 없고, 그래서 더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다.
‘보좌관을 여자로 바꿀 수는 없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홀로 곱씹으며 아시카에게 시선을 옮겼다.
“하마터면 그럴 뻔했지.”
“그럼, 설마….”
“어차피 레이디 슈베른은 제국에서 살 수 없어. 오클레인 후작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정당한 법의 판결을 받게 해주겠다고 말했지만 글레노아가 그때까지 살아있기는 어려웠다. 그걸 알면서도 법정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드루쉬아는 글레노아를 살려 보내는 쪽을 택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선택에 선뜻 동의하기도 반대하기도 어려웠다.
“옳은 선택인지 판단은 하지 않기로 했어.”
글레노아는 온전한 피해자도, 온전한 가해자도 아니었다. 그러니 법의 심판 대신 세월의 심판을 받게 되지 않을까.
드루쉬아의 목적은 아시카를 지키는 것이었고 글레노아는 제 역할을 끝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받은 만큼 돌려준 것뿐이다.
“다음부터는 이런 식으로 나를 배제하지 말아요.”
드루쉬아와 웨이브는 회의에 가려던 아시카를 참석하지 못하게 막았다. 치정사건에 연루된 두 레이디라니. 죄를 가늠하기도 전에 그것만으로도 구경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념하도록 하지.”
드루쉬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그걸 눈치채고 아시카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시카가 칼프를 보며 소파에 앉았다. 말을 조심하려는 눈치였다.
“괜찮아. 말해도 돼.”
칼프는 드루쉬아가 소공작이던 시절부터 곁을 지켜왔던 사람이다. 그가 부재중일 때 모든 권한을 대행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아시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대공령에서 병력을 철수시킨다고 들었어요. 무슨 생각인 거예요?”
“어차피 혼란은 피해갈 수 없어. 대공령의 봉쇄가 풀리려면 한 번은 겪어야 할 진통이야.”
“여파가 클 거예요.”
“40년 동안 굳건히 닫혀있던 문이야. 조금 두드린다고 열리겠어?”
혼란은 크면 클수록 좋다.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선황제의 힘은 강력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황실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것이고 그럴수록 귀족들의 목소리는 커질 테니까.
거기다 대공령의 귀족들까지 가세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어질 테고 황제는 어떤 식으로든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된다.
“나를 믿어줘, 아시카. 나는 모두를 살리기 위한 선택을 할 거야.”
“하지만….”
“오늘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아?”
드루쉬아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제야 아시카는 오늘 드루쉬아가 찾아온 진짜 목적이 떠올랐다.
“조부님께서 그….”
아시카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다소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서류를 보냈다면서요?”
“정확히는 요구서였지. 혼전 계약서에 들어갈 조건에 대한.”
드루쉬아가 손을 내밀자 칼프가 서류가방에서 문서를 꺼내어 넘겼다. 이그레인의 문장이 그려진 공문서를 보고 아시카의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