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나, 나는…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거짓말은 꿈도 꾸지 마.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본인이 더 잘 알잖아? 이대로 레이디 슈베른을 마이헬러 후작에게 다시 넘겨도 나는 아쉬울 게 없어. 내 힘으로도 아시카는 충분히 지켜낼 수 있으니까.”
다만 한시바삐 불명예를 벗겨주고 싶을 뿐.
“자백하면… 내가 살 수 있나요? 그건 사고였어요. 그런데 그걸 누가 믿어주죠?”
한미한 가문 출신에 혈혈단신. 그런 여자가 무려 후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를 살해했다.
오클레인 후작은 진범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그레인 공작가를 상대로 영지전을 선포할 만큼 분노해 있었다. 글레노아는 법정에 설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이다.
반발을 예상했는지 드루쉬아는 차분했다.
“정당하게 재판을 받을 거라고 약속하지. 그러니까 진실 그대로 자백해.”
“…흐윽… 억울해요. 내가 왜 이렇게 됐는데….”
“당신이 설득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귀족원의 사람들이야. 눈물은 거기 가서 흘리도록 해.”
드루쉬아의 신호에 기사들이 글레노아를 일으켜 세웠다.
“어, 어디로 가는 거예요?”
“말했잖아. 당신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어, 하는 사이에 글레노아는 기사의 손에 이끌려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드루쉬아는 산허리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레이디 슈베른이 진실을 고해야 할 자리지. 그리고 용서를 빌어야 할 상대도 있는 자리 말이야.”
글레노아는 반쯤 얼이 빠진 채 마차에 올라탔다. 동틀 무렵 출발한 마차는 중간에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저녁 무렵에 수도 중심가로 향했다.
* * *
다시 귀족원 회의를 소집해 달라는 오클레인 후작의 청원은 거절당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귀족원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번에는 탈리온과 이그레인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사위가 어두워지는 시간, 긴급하게 소집된 회의에는 지난번 참석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수의 귀족들이 모였다. 황제는 귀족원의 연락에 회신하지 않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불참을 알렸다. 마이헬러 후작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영지전은 어떻게 되는 건가? 왜 말이 없어?”
“미치지 않은 이상 누가 탈리온을 상대로 영지전을 하나? 그건 황제 폐하께서도 원치 않을걸?”
영지전이 끝나면 해당 영지는 승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지금도 이그레인과 탈리온을 경계하는 황제는 결코 그 꼴을 두고 보지 않을 테고.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회의실 안은 어수선했다.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한쪽에 앉은 오클레인 후작의 얼굴에서는 붉은 기운이 연신 오르내렸다.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소란이 어느 순간 뚝 멎었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한 사람 때문이었다.
“어? 저게 누군가?”
“본 적이 있는데?”
이름은 모르지만 고위 귀족의 연회에 몇 번 참석한 적이 있는 여자. 귀족들이 긴가민가한 가운데 오클레인 후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이디 슈베른?”
오클레인 후작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렇지않아도 창백하던 글레노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도망치고픈 마음에 다시 뒤를 돌았다. 그러나 문밖에서 탈리온의 기사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저 좀… 아니에요. 이건 아니야.”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글레노아를 칼프가 잡았다.
“공개 석상이 오히려 안전합니다. 레이디 슈베른, 지켜야 할 약속이 있지 않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레이디 슈베른은 귀족원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습니다.”
글레노아를 알아본 누군가가 문제를 제기했다.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뒤따라 들어온 드루쉬아였다.
“문제를 제기한 쪽은 오클레인 후작이었고 이것이 이그레인과 탈리온의 대답입니다.”
귀족들은 어리둥절해 했고 오클레인 후작은 놀라 얼어붙었다. 글레노아의 얼굴을 알아본 순간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레이디 슈베른에게 발언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회의를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드루쉬아의 요구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글레노아가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의혹이 가득한 눈동자들이 그녀를 난도질하는 칼날처럼 느껴졌다.
‘내가 왜 이런 꼴이 되어야 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순간은 언제나 무대 위에서였고 호감과 찬탄 어린 시선 속에서 살아왔던 그녀였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 정작 모든 일의 원흉이었던 코랄은 희생자의 탈을 쓰고 제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되어버렸다.
“레이디 슈베른.”
온갖 감정이 뒤죽박죽된 가운데 독촉이 날아들었다.
“그, 그건… 정당방위였어요!”
회의실 중앙까지 떠밀려온 글레노아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제일 먼저 알아들은 것은 오클레인 후작이었다.
“네, 네가… 네가….”
후들후들 떨리는 손이 글레노아에게 향했다. 글레노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코랄은 레이디 이그레인을 기절시켜 끌고 나가려고 했어요. 그걸 막는 저를 칼로 위협했단 말이에요!”
“거짓말이야! 내 아들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
곳곳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귀족들은 수개월 전 이그레인과 오클레인 사이에서 벌어졌던 파혼사건을 떠올렸다. 그리고 파들거리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여자가 당시 파혼사건의 중심에 있던 글레노아 슈베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오클레인 후작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저 여자는 창부요. 내 아들을 유혹하고 아이를 빌미로 협박을 했어! 내 아들의 인생을 망가뜨린 여자야!”
“작정한 건 코랄이었어요. 증거가, 증거가 있어요!”
글레노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외투 안쪽을 더듬었다. 그녀가 꺼내 든 것은 작은 천 뭉치였다.
“코랄이 이걸로… 이걸로 절 위협했다고요!”
손이 떨려서 천을 끝까지 다 풀지도 못했다. 글레노아의 손이 힘을 잃고 벌어진 천 뭉치 안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챙그랑. 작은 충돌음과 함께 회의실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단검이었다. 손바닥 한 뼘도 되지 않을 작은 단검.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살인 무기였다.
사람들의 시선은 피가 눌어붙은 단검과 검붉은 얼룩이 그대로 남아있는 천조각 사이를 오갔다. 회의실 앞 좌석에 앉아있던 귀족들이 목을 빼고 단검을 살폈다.
“단검에 문양이 있소.”
누군가 단검을 알아보았다. 앞쪽에 앉아있던 오클레인 후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단검을 집기 위해 달려들었다. 칼프가 재빨리 앞을 가로막았다.
“음해야! 저 여자가 내 아들을 모욕하려고 꾸민 음해라고!”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사람들은 오클레인 후작이 날뛰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오클레인의 물건이로군.”
누군가의 한마디에 파문은 금세 회의실 안을 휩쓸었다.
글레노아가 내놓은 단검은 오클레인의 문양이 새겨진 가문의 물건이었다. 귀족들이 지니고 다니는 호신용 단검이지만 실상은 장식적인 의미가 더 컸다. 수도에서는 귀족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보석이나 섬세한 세공장식, 가문의 문양 등으로 장식해서 사치품처럼 지니고 다녔다. 원칙적으로 황궁에는 가져갈 수 없는 물건인데 하필 코랄은 단검을 몸에 지니고 연회에 참석했다.
에르윈이 현장에서 앞뒤 생각하지 않고 살인 무기를 들고나온 것도 그래서였다. 코랄이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황궁이 발칵 뒤집힐 것이 뻔했다. 이 사건으로 황궁 안의 근무자들을 심문하게 되면 불리해지는 것은 일을 지시한 마이헬러 측이었다.
하지만 에르윈에게 돌아온 것은 아비의 매서운 질책이었다. 문제가 되는 것들을 모조리 처리하라는 지시를 받고 에르윈은 화를 삼키며 물러났다.
그리고 에르윈이 아무렇게나 내다 버린 단검을 샤프리가 찾아서 드루쉬아에게 넘겼다. 그렇게 살인 무기는 다시 글레노아의 손에 넘겨진 것이다.
“조작이야. 네가 꾸민 짓이잖아! 살인범의 말 따위 아무도 안 믿어!”
길길이 날뛰는 오클레인 후작 앞으로 회의 진행자인 루테넌 백작이 나섰다.
“오클레인 후작께서는 진정하십시오. 레이디 슈베른의 주장을 검증하는 것은 후작님이 아닌 법정입니다.”
“법정까지 갈 것도 없네. 내 가문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야!”
“레이디 슈베른은 귀족으로서 법정에 설 권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뒷배가 없어도 귀족의 계보에 올라있는 사람은 개인이나 특정 가문이 독단적으로 처벌할 수 없었다. 파문이 큰 사건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탄원을, 황제 폐하께 탄원하겠네!”
“제국법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클레인 후작께선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내 아들의 인생을 망친 여자야!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을 죽인 살인범이라고!”
“살인범은 내가 아니라 당신 아들이야!”
궁지에 몰린 글레노아가 눈을 부릅뜨고 악을 썼다.
순간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양측의 악다구니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또 어떤 폭로가 이어질지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다.
글레노아는 일방적으로 저를 비난하는 오클레인 후작을 노려보았다.
“후작께선 소후작이 마차 사고로 죽은 줄 아시죠? 진짜 그렇게 믿어요? 어떻게 한 번도 의심을 안 할 수가 있죠?”
코랄이 품고 있던 질투와 자격지심은 꽤 오래되었다. 형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데도 작위를 계승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그 때문에 아시카에게 비굴하게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수치스러워했다. 그걸 오클레인 후작이 몰랐을 리 없다.
“네가… 미쳤구나. 어찌 그런 망발을….”
“마차 사고를 조사한 게 누구인가요? 코랄이 아니었나요?”
가차 없이 말을 뱉으며 글레노아의 눈에서는 독기가 뚝뚝 떨어졌다.
허옇게 질린 오클레인 후작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아들의 죽음으로 충격에 빠져 있던 당시, 사고를 수습한 것은 코랄이었기 때문이다.
“소후작의 자리가 제 것이 될 거라고 말하는 걸 분명히 들었어요. 영지에 있는 동안 코랄이 만나고 다닌 사람들도 귀족이 아니었고요. 왜 그걸 의심해볼 생각을 못 하셨죠?”
“…아니야. 내 아들을 모욕하지 마. 불명예를 뒤집어씌우지 말라고!”
“조사를 해보면 되잖아요! 정작 억울하게 살해당한 건 오클레인 소후작이란 말이에요!”
글레노아는 지지 않고 소리쳤다. 오클레인 후작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드는 걸 칼프가 막아내고 글레노아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오클레인 후작, 고정하시게!”
“경비! 경비를 불러!”
“모두 진정하십시오. 제자리를 지켜 주십시오!”
회의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문이 열리고 다급하게 달려온 경비들이 오클레인 후작을 잡아 밖으로 데려갔다. 글레노아 역시 같은 처지가 되었다.
드루쉬아가 신호하자 칼프가 경비에게 끌려나가는 글레노아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