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설마 네가 말하는 게 글레노아 슈베른인가? 오클레인 공자의 정부였던?”
“이건 치정 살인이야. 그럴 의도는 아니었던 모양인데….”
반쯤 정신이 나간 채 감금되어 있던 여자를 얼핏 보았다. 자신이 저지른 짓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어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하.”
치정이라니. 더 큰 모종의 음모가 있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사실은 양쪽 모두에게 당황스러운 사건이었다.
“그 문제 때문에 후작이 화가 많이 났어. 아마도 조만간 레이디 슈베른을 저택 밖으로 내보낼 거야. 진범이 잡히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밖으로 내보낸다고?”
“그… 후작은 자신의 영역에 불순물이 끼어드는 걸 싫어하거든. 직접 손을 쓰는 법도 없어. 언제나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움직이지.”
“돌려 말하면 뭔가를 하기 위해 내보낸다는 건가?”
아마도 후작은 현재의 혼란이 오래가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범을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려 할 것이고.
“그러니까 그때를 노려서 레이디 슈베른을 데려가. 오클레인 후작이 또 귀족원 회의를 소집해달라고 탄원 중이라면서? 진범을 잡으면 레이디 이그레인은 추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샤프리.”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게서 뭘 원해?”
충분히 거래를 요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쏟아내듯 정보를 내주었다.
“원하는 게 있으니까 이런 정보를 주는 거겠지?”
“나는….”
샤프리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입을 열었다.
“마이헬러 후작이 왜 이그레인과 탈리온에게 집착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
드루쉬아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샤프리가 무엇을 원하든 진짜 본론은 따로 있었다.
“계속 말해봐.”
“마이헬러 후작가는 본래 제국의 초대 개국공신이었어.”
언젠가 아시카가 말했던 적이 있었다. 건국 신화에서 축복을 받아 혈족의 특징을 갖게 된 세 개의 가문. 같은 특징을 에르윈에게서도 본 적이 있다고. 초대 개국공신 가문은 셋이 아닌 넷이라고 말했었다.
“그게 지금 중요한가?”
“중요해. 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니까.”
샤프리는 잠시 머뭇거렸다. 과연 드루쉬아가 어디까지 믿어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후작의 나이가 몇 살인 줄 알아?”
“무슨 말이야?”
“그분의 나이는 아무도 모를걸? 내가 처음 후작을 만났을 때부터 그 얼굴이었으니까.”
드루쉬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놀라기보다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태도에 샤프리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분은 나이를 먹지 않아.”
드루쉬아가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에 샤프리는 불안해졌다.
“왜… 놀라지 않아? 못 믿는 거야? 마이헬러 저택에는 초대 가주의 초상화를 제외하고 선대 가주의 초상화가 하나도 없어. 수도 저택뿐 아니라 영지의 저택에도 마찬가지야. 얼마나 철저하게 이 비밀을 유지해 왔는지….”
“네가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후작도 알고 있을 테지?”
샤프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와 드루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를 수가 없겠군. 어릴 때부터 봐 왔을 테니까.”
그래서 샤프리가 이렇게 다급해진 것이다. 쓸모가 사라진 소모품이 후작의 비밀을 알고 있었으니까. 샤프리는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후작가를 떠나지 못하고 있고.
샤프리는 외투 안쪽에 손을 넣어 손바닥만 한 수첩을 꺼냈다.
“수도 저택에는 비밀 서고가 있어. 거기에는 초대 가주의 일지가 숨겨져 있고, 이건 그걸 옮겨적은 거야.”
숨겨진 역사의 이면. 마이헬러 가문과 제국의 황실이 얽혀있는 기록이었다.
“그것이 내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이건… 보증 같은 거야. 내가 너를 돕겠다는.”
“빙빙 돌리지 말고 원하는 걸 말해.”
샤프리는 손에 든 수첩을 꽉 움켜쥐었다. 달싹이는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물어지기를 몇 차례. 수첩을 드루쉬아에게 내밀었다.
드루쉬아는 말없이 그걸 건네받았다. 샤프리는 수첩에서 손을 놓기 전,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두려움으로 떨리는 목소리가 비장한 바람을 내놓았다.
“나는 마이헬러의 멸문을 원해.”
에르윈이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없었다. 샤프리는 벗어나고 싶었다. 괴물 같은 후작과 온갖 비밀을 끌어안고 있는 후작가로부터. 그리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야 말 것이다.
아름다운 청록색의 눈동자에 잔인한 빛이 어렸다. 그녀를 거두고 이용하며 이제는 목숨을 위협하는 마이헬러. 자신이 17년간 몸담아 온 가문의 끝을 고대하면서 샤프리의 눈동자는 전에 없이 빛이 났다.
드루쉬아는 그런 샤프리를 차게 내려다보았다.
은둔자의 가문 마이헬러 후작가. 누구도 모르게 황실의 뒤에서 웅크린 채 대공가를 멸문으로 몰아넣었고 이제는 이그레인과 탈리온을 노리고 있다.
어느 한쪽이 사라져야만 끝나게 될 싸움. 드루쉬아는 반드시 아시카와 자신을 구해낼 것이다. 그러니 정해진 답은 하나였다.
시린 한기가 감도는 공간에서 그보다 더욱 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거다.”
* * *
입에 물린 재갈이 침으로 흠뻑 젖어 축축했다. 안대를 뒤집어써서 앞도 보이지 않았다. 꽁꽁 묶인 채 몸을 비틀어 보기도 하고 소리를 내어보기도 했지만 정체 모를 사내들은 그녀를 짐짝처럼 지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글레노아는 막연하게 마지막을 예감했다.
‘이럴 수는 없어. 내가 왜!’
억울했다. 잘못된 인연을 만나 잘못된 길로 빠져들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나쁜 게 아니야. 그놈이 잘못했기 때문이야. 잘못한 건 코랄인데….’
감히 공작가의 약혼자를 탐했던 대가는 컸다. 가문의 뒷배도 없는 처지에 오페라 가수로서의 경력은 진작에 끝장나버렸다. 남의 남자의 아이를 가졌었다는 이유로 결혼 시장에서는 밑바닥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코랄 때문이었다. 저를 사랑한다는 거짓된 속삭임에 속았다. 그가 몸서리치도록 싫어하는 아시카 대신 자신과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헛된 망상을 품었더랬다.
그런데 몸서리치도록 싫어한 것이 아니라, 그를 돌아보지 않아서 치 떨리게 분노한 것이었다.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배 속에 아이가 있었다.
끝끝내 일이 그 지경이 되었을 때도 글레노아는 기다렸다. 예상과 다른 상황이 벌어졌지만 배 속에 품은 아이를 외면하지는 못할 거라고. 결국에는 그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코랄은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오클레인 후작가의 보좌관이 찾아왔다.
고위 귀족은 설령 사생아라 해도 제 핏줄을 함부로 내돌리지 않는다. 보좌관은 선택을 강요했다. 태어날 아이를 빼앗기고 빈손으로 쫓겨날 것인지, 일찌감치 아이를 포기하고 돈을 받고 떠날 것인지.
글레노아는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 오클레인 영지로 코랄을 쫓아갔다. 이대로 끝내기에는 너무 억울했기 때문이다.
자존심 따위 팽개치고 매달렸다. 소문이 파다하게 나서 수도에서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도 없게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울분에 가득 차 있던 코랄은 화를 내면서도 글레노아를 만났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쉽게 끊어내기 어려운 관계였다.
한동안 술독에 빠져 살던 코랄이 어느 순간 술을 끊고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왔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종종 자신이 오클레인을 물려받을 거라는 소리를 입에 올리더니 그 사고가 난 것이다.
오클레인의 장남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글레노아는 직감했다. 코랄이 어떤 식으로든 개입했으리란 것을. 그러나 글레노아는 진실을 외면하고 코랄에게 매달렸다. 어쩌면 이것이 자신에게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코랄은 끝내 그녀를 버리고 수도로 돌아갔다. 다시 아시카의 주변을 맴도는 것을 보고 글레노아는 깨달았다. 코랄은 끝끝내 아시카를 포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분하고 억울했다. 마음에 품은 것은 정작 다른 여자였으면서 자신의 눈과 귀를 현혹하고 끝내 시궁창으로 밀어 넣었다. 모두 코랄이 저지른 죄였다.
꼬박 하루 동안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마침내 차디찬 흙바닥에 팽개쳐졌을 때, 처음으로 누군가 입에서 재갈을 빼주었다.
“흐으읍… 살려… 주세요.”
안대가 벗겨졌는데도 눈물로 범벅이 되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손까지 자유로워졌을 때 간신히 흙먼지에 젖은 눈을 닦아내고 앞을 볼 수 있었다.
“헉….”
시야가 트이는 순간 저를 내려다보는 커다란 체구의 사내를 발견했다. 글레노아가 아는 얼굴이었다.
“타, 탈리온 공작님?”
“당신, 하마터면 절벽에서 추락사할 뻔한 거 알아?”
“무슨 말씀을….”
마른 낙엽이 버석거리는 숲 한가운데였다. 드루쉬아의 뒤쪽으로 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정신을 잃은 사람들을 어디론가 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에 들렸던 혼란스러운 고함 소리가 생각났다. 기절하고 싶을 만큼 정신이 없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도 몰랐다.
‘나를 끌고 나온 사람들이야. 마이헬러 후작가의 사람들.’
글레노아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사람은 에르윈이었다. 마이헬러 후작가로 끌려간다는 걸 알았을 때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오가는 이들의 대화를 엿듣다가 제 처지를 깨달았다.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진창에 빠졌다는 걸. 제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걸. 수도 근처에 있는 산 절벽. 실족사로 인한 사고 또는 자살로 위장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공작님…, 살려주세요. 제발….”
왜 눈앞에 있는 사람이 에르윈이 아니라 드루쉬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를 해칠 의도가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을 뿐.
“살려줄 수는 있어. 그러나 레이디 슈베른 때문에 억울하게 추문에 휩싸인 사람은 구해줘야지.”
상대가 온전히 정신 차린 것을 알고 드루쉬아는 뒤로 물러났다. 대신 함께 온 기사들이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게 주위를 에워쌌다.
“그… 그건.”
“자백해, 레이디 슈베른. 본인이 저지른 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