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싫다고… 했잖아.”
겁이 났다. 처음 보는 얼굴들과 차디찬 시선에. 마이헬러 후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의도로 저를 이곳으로 보냈는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아서 더욱 두려웠다.
“이렇게 고집을 피우시면….”
기사들이 걸음을 멈추고 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누가 오기로 되어있었습니까?”
샤프리가 아닌 하녀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이 자리의 주도권이 샤프리가 아닌 저 여자에게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샤프리는 외투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누굴까. 드루쉬아일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이 순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요.”
하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다가오는 상대를 확인하려고 목을 쭉 뺐다. 어둑해지는 숲길 사이로 검은 형체가 불쑥 튀어나왔다. 말을 타고 다급히 달려오는 사람은 모두가 아는 이였다.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오, 오라버니?”
샤프리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에르윈은 그녀를 흘깃 보고는 기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해가 떨어지고 있는데 언제까지 길바닥에 있으려고? 짐꾼들은 또 어디 갔어? 인원은 이게 뭐야?”
“공자님,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기사들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얼굴이 되었다. 소후작에 대한 태도치고는 퍽 불손한 모양새였다. 에르윈도 느꼈는지 말투가 사나워졌다.
“내가 못 올 곳에 왔어? 동생 보러 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후작님의 지시였습니다. 당분간은 조용한 곳에서 저희와 함께 계실 겁니다.”
“거기 얼마 전에 산짐승이 쳐들어와서 울타리가 부서졌다고 들었어. 제대로 보수하지 않으면 오래 있기 어려울 거야. 미리 확인도 안 하고 무작정 샤프리를 데려오면 어떻게 해?”
들은 바 없는 이야기였다. 기사들은 난처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일단 별장으로 가고 내일 날이 밝으면 장소를 옮기도록 해.”
“오라버니도 함께… 가시는 건가요?”
“그럼, 해가 떨어지고 있잖아.”
밤에 빛 한점 없는 숲길에서 말을 달리는 건 위험하다. 당연히 함께 있을 거라는 말에 샤프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샤프리, 이리 와. 기사란 것들이 레이디를 마냥 걷게 하다니. 하여간 정신들 못 차리지.”
사나운 질책에 기사들은 굳어진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볼 뿐이었다. 샤프리는 그런 기사들을 뒤로하고 에르윈이 내민 손을 잡았다. 에르윈은 샤프리를 단숨에 끌어올려 제 앞에 앉혔다.
쿵, 쿵 심장이 뛰어서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옆으로 앉은 채 에르윈의 가슴에 가만히 얼굴을 기대었다. 에르윈은 저를 움켜쥔 하얀 손을 흘깃 보고는 말을 출발시켰다.
“가지.”
다른 기사가 하녀를 뒤에 태우고 일행은 에르윈의 뒤를 따랐다. 짙푸른 빛을 내던 하늘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이었다.
* * *
“다른 기척은 없는 것 같습니다.”
주변을 살피러 갔던 탈리온의 기사들이 속속들이 돌아와 보고했다. 드루쉬아와 동행한 기사는 여덟 명. 만약을 위해 정복이 아닌 검은 옷을 입어 신분을 감췄다.
“여기 있는 인원은 많아 봐야 다섯을 넘지 않을 겁니다.”
“후작가의 레이디가 움직이는데 그렇게 적은 수가 나왔다고?”
드루쉬아는 멀리 언덕 위에 지어진 건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래전에 스치듯이 이곳을 지나친 적이 있었다. 그때 이곳이 마이헬러의 별장이라는 걸 알고 퍽 놀랐던 기억이 있다.
별장이라기보다는 잘 지어진 산장 같은 느낌이 나는 목조주택이었다. 단층으로 지어진 본채와 사용인들을 위한 별도의 숙소 건물, 그리고 창고가 전부인 곳이었다.
“일단 여기서 대기해. 혹시 숙소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제압하도록.”
“알겠습니다.”
기사들을 뒤로하고 드루쉬아는 홀로 건물에 접근했다. 짙은 어둠 속에 잠긴 건물은 온통 어두웠다. 분명 사람이 있을 텐데 주변에는 화로의 불조차 피우지 않았다.
‘본채를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불이 꺼진 걸 보면 사용인도 이미 잠이 든 모양이었다.
연이어 부는 바람으로 검게 물든 숲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덕분에 낙엽을 밟는 발걸음 소리는 숲의 소음에 파묻혔다.
샤프리의 방이 어디 있을지 걱정하던 것도 잠시뿐, 건물 안쪽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창문이 있었다. 어둑한 빛이 흘러나오는 창문 앞, 안쪽으로 쳐진 커튼 틈새로 얼핏 내부가 보였다.
‘누구?’
방 안쪽에서 보이는 사람은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한 사람은 그를 이 자리까지 불러낸 샤프리였고 또 한 사람은.
‘설마…?’
흐릿한 빛 속에서도 샤프리와 꼭 닮은 금색의 머리칼이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남자. 그가 아는 한 샤프리의 곁에 저런 외모를 지닌 남자는 한 사람뿐이었다.
드루쉬아는 당혹감에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잠들어 있는 두 사람을 깨우지 않기 위해. 그러나 혼란스러운 마음을 채 정리하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동안 샤프리가 후작가에서 보여왔던 모습과 마이헬러 후작의 태도, 파혼 얘기에 절박하게 매달리던 그녀와 마치 내쳐버리듯 다급하게 결정된 결혼까지.
제가 뭘 놓치고 있었나. 곰곰이 되짚어 보던 그에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저 둘, 친남매가 아니었나?’
꼭 닮아 있어서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약혼 전까지 간간이 애인이 있었지만 샤프리는 한 번도 추문에 휩싸인 적이 없었다.
‘샤프리가 극구 결혼을 원치 않았던 건 그래서였나?’
혼란스러웠다. 샤프리가 그를 속여왔다는 사실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해되지 않아서. 친남매든 아니든 둘은 가족으로 묶여 있는 관계가 아닌가.
‘여러 번 뒤통수 맞는군.’
뭐라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번잡했다.
샤프리는 힘든 시기에 제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그를 이용하려 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드루쉬아가 느낀 감정은 배반감이 아니라 실망이었다.
살갑게 대하지는 않았어도 힘든 시기에 저를 찾아 준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컸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러했기에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뒤늦게 정신이 든 이성은 두 사람의 만남에서부터 의문을 품었다.
사고현장 근처에서 이그레인과 탈리온이 함께 모여 추도식을 치렀다. 그리고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 사라진 이들에 대한 장례식을 또 한 번 치러야 했다. 일부는 엉망이 되어버린 시신으로, 대부분은 시신조차 찾지 못해 빈 관을 땅에 묻었다.
인근 영지의 귀족들이 참석한 자리에 마이헬러 후작가의 남매도 함께 왔다. 에르윈은 소후작의 자격으로 왔다지만 샤프리는 아니었다. 불과 열 살의 어린 소녀가 평소 왕래도 없던 탈리온의 영지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마이헬러 후작은 상실감에 정신 못 차리는 소년에게 아름답고 어린 소녀를 선물처럼 내민 것이다.
드루쉬아가 그토록 경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이미 마음속에 들어온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면 두 사람은 진작에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깨닫지 못했었지.’
장례식장에서 그에게 다가온 샤프리보다, 추도식장에서 만난 한 소녀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렸다는 것을. 여린 사슴처럼 새카만 눈망울을 하고 처연하게 눈물 흘리던 소녀가 이미 가시처럼 가슴속에 박혀 버렸다는 것을.
아마도 그것이 시작이었을 터다.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드루쉬아는 덤불 뒤에서 몸을 낮추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작은 자갈을 손에 쥐었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샤프리를 만나야 했다.
톡, 창문으로 날아간 자갈이 작은 충돌음을 남기고 바닥에 떨어졌다.
얼마 뒤 본채의 나무문이 조심스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문이 닫히고 호리호리한 인영이 어둠 속에서 주위를 살폈다. 샤프리였다.
어둠 속을 살피는 샤프리의 발밑으로 툭, 하고 자갈이 날아들었다.
“드루?”
어두운 덤불 뒤에서 기지개를 켜는 짐승처럼 커다란 체구가 일어났다. 샤프리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묵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샤프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가 방안을 들여다봤을 거라는 생각에 부정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오해한 건 아닌 것 같군.”
샤프리는 얼굴을 돌렸다. 어두워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데도 날카로운 드루쉬아의 시선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날이 추워. 저쪽 창고로 가서 얘기해.”
“여기는 지키는 사람도 없어?”
“오늘 밤에는 아무도 깨지 않을 거야.”
“깨어나지 못할 거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샤프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드루쉬아를 만나기 위해 미리 손을 써뒀다는 걸 시시콜콜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샤프리가 창고 건물로 먼저 걸음을 옮기고 드루쉬아가 뒤를 따랐다.
창고의 문을 여는 순간 서늘한 한기와 함께 묵은 먼지 냄새가 훅 끼쳤다. 샤프리는 구석으로 들어가 양팔로 제 어깨를 감싸 안았다. 외투를 걸쳤는데도 새벽공기가 몸서리쳐질 만큼 차가웠다.
“마이헬러의 혈족이 아닌 건가?”
드루쉬아는 문을 닫아걸며 질문을 입에 올렸다. 푸른 눈동자가 마주 보기 버거울 만큼 차가워서 샤프리는 시선을 피했다.
“내가 후작을 만난 건 일곱 살 때였어.”
시골 영지에 있는 보육원에서 그녀가 선택된 이유는 하나였다. 마이헬러의 혈족과 닮아 있는 아름다운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가 내 인생의 구원자인 줄 알았지.”
그것이 도망칠 수 없는 시궁창으로 발을 들이는 일이었을 줄이야.
“언제부터야?”
앞뒤 없는 질문이지만 무엇을 묻는지 알았다.
“알 거 없잖아.”
“혹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던 건 아니냐고. 그러나 드루쉬아는 제 질문을 삼켰다.
분명 깨어나지 못할 거라고 말했으면서도 자꾸만 옆을 흘긋거리는 시선에서 두려움이 아닌 다른 감정이 보였다. 초조하고 걱정스러운 표정. 정작 다급한 것은 본인이면서 누구를 걱정하는 걸까.
“이해… 못할 거 알아. 기대하지도 않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관계였다. 보육원에서 데려온 근본 모를 아이와 후작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와의 배덕한 관계.
구원자라고 생각했던 마이헬러 후작은 괴물이었고 그 아들은 지나치게 평범했다. 그 간극으로 벌어진 부자간의 갈등에 샤프리가 끼어들었다.
순진한 후작가의 공자는 영악한 소녀의 꼬임에 넘어갔고 그동안 훌륭한 아군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이제 그 관계가 샤프리의 발목을 잡았다.
드루쉬아는 한숨을 내쉬며 복잡한 심경을 털어냈다. 이건 그가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너는 알고 있었지? 마이헬러 후작이 나를 노리고 있었다는 걸. 나뿐 아니라 이그레인까지도.”
지난번에는 이븐을 구하는 것이 급해서 묻지 못했다. 그러나 한 번쯤은 묻고 싶었다.
“나를 중독시킨 것도, 그걸 이용해 내 인장을 가져가 공문서를 위조한 것도 너와 후작의 짓이야. 그렇지?”
“난… 몰랐어.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몰랐던 게 아니라 예상하면서도 상관하지 않았던 것 아닌가?”
“너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내 처지가 어떤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모르잖아!”
불안하게 시선을 피하던 샤프리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미미하게 보이던 죄책감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샤프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살아남는 방법이었을 뿐. 미안한 마음이 그녀의 생존보다 우선하지는 않았다.
당당하게 소리치는 샤프리를 보며 드루쉬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네 불행이 남을 해치는 정당한 이유가 될 순 없어. 마음만 먹는다면 넌 얼마든지 이 상황을 피해 달아날 수도 있었어. 그러지 않았다는 건 너도 원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겠지.”
샤프리가 눈매를 치켜뜨며 입을 다물었다. 제 속내를 감춰왔다고 믿었지만 드루쉬아는 생각보다 더 많이 그녀를 알고 있었다.
샤프리가 얼마나 차고 이기적이며 변덕스러운 성격인지. 동시에 얼마나 영리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인지를.
“그래. 네 말이 맞아. 이대로 도망칠 수 없는 이유가 있어. 하지만 네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잖아?”
드루쉬아는 가만히 샤프리를 내려다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절박한 거지?’
최악의 혼처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더 나은 혼처를 알아봐 주겠다는 제안을 샤프리는 칼같이 거절했다.
샤프리가 마이헬러 후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면 아시카는 다른 어떤 방법이라도 만들어 줬을 것이다. 그런데도 샤프리는 굳이 마이헬러 후작가에 남는 쪽을 택했다.
‘마이헬러 공자 때문인가.’
애증일까. 복수심일까.
아니다. 자신의 위험을 알면서도 발을 빼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사랑일지도 몰랐다.
절대 가질 수 없는 상대. 현실은 남매로 묶여 있고 그 뒤에는 괴물 같은 후작이 버티고 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못하는 미련함이라니.
잔뜩 날 서 있던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샤프리는 제 처지를 알기에 도움이 필요했을 테고.
“오클레인 공자의 살인범을 알고 있다고 했지? 누구야? 혹시 그것도 마이헬러 후작의 짓인가?”
“그건 아니야. 아마도 사고였던 것 같아.”
“사고? 황궁 연회에서 살인 사건이 났는데 사고라고?”
샤프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드루쉬아를 마주 보았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자신이 가진 정보로 어떻게든 드루쉬아의 협조를 얻어내야 했다.
“지금 후작저에 레이디 슈베른이 감금되어 있어.”
“뭐?”
드루쉬아는 순간 말을 잃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