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17화 (117/153)

#117.

사람이 드나들지 않아 오래된 먼지 냄새가 짙게 깔린 서고 안. 에르윈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제 아비의 질책 어린 시선을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그에게 마이헬러 후작은 큰소리를 치지 않아도 두려운 사람이었다. 침묵마저 상대를 질리도록 숨 막히게 만드는 그런 사람. 에르윈의 시선은 후작을 피해 어둑한 책장 언저리를 맴돌았다.

“내가 이그레인의 계집아이를 데려오라고 했지, 언제 저런 출신 모를 여자를 데려오라 했느냐?”

“상황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대로 두면 여자가 쓸데없는 소리를 떠들게 될 것 같아서….”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제 아비의 지시대로 휴게실에 갔을 때 코랄은 이미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덜덜 떨고 있는 글레노아를 발견했다.

코랄을 죽인 것은 한 뼘 크기의 칼로, 식사용 나이프보다도 작은 칼이었다.

“여자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사고였다고. 몸싸움을 했을 뿐인데 홧김에 휘두른 칼이 목을 찔렀답니다.”

“홧김? 홧김에 칼을 휘두르고 거기에 사람이 죽어?”

물론 보통의 남자라면 충분히 막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은 오래도록 친밀한 관계였고 방심한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우발적인 사고였다.

“누가 오클레인 공자를 죽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설령 그 자리에서 여자가 잡혔다 해도 문제 될 게 없었어.”

“하지만 범인을 잡지 못해서 수도가 시끄러워진 것도 있고, 거기다 칼 주인이….”

“네가 언제 너에게 그런 지시를 내렸느냐?”

조용한 반문에 에르윈의 어깨가 움찔 들썩였다. 언제나 권태로워 보였던 마이헬러 후작의 얼굴이 오늘따라 굳어있었다. 이래서 너를 어찌 믿겠느냐는 노골적인 불신을 드러내며.

“죄송합니다, 아버지.”

사죄하면서도 에르윈은 억울했다. 워낙 정신없던 상황이었다. 연회홀에서 받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후작이 다급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저기 그런데….”

머뭇거리던 끝에 에르윈은 내내 궁금했던 질문을 입에 올렸다.

“황태후 폐하는 어찌 된 겁니까? 정말로 저희와 같은 핏줄을 타고난 겁니까?”

황태후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았다. 저와 꼭 같은 황금안과 청록안의 오드아이를.

마이헬러 후작이 가만히 아들을 바라보았다. 화를 낸다거나 꺼리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비릿한 미소를 지을 뿐.

“그게 무슨 상관이냐.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다.”

“하지만….”

에르윈은 궁금했다. 과연 황태후는 마이헬러 후작의 누이일까 아니면 딸일까.

에르윈이 기억하는 한 마이헬러 후작은 한결같은 얼굴이었다. 저 홀로 시간을 비껴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아주 어릴 때부터 현재까지 조금도 늙지 않은 모습으로. 그 사실을 알아차린 에르윈의 모친은 오랫동안 영지의 본성에 감금되었다가 끝내 미쳐서 죽었다.

‘황태후 폐하께서는 아버지를 두려워하셨어.’

에르윈이 그를 두려워하는 만큼이나. 그러니 어쩌면 황태후가 그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비상식적인 가정도 가능했다.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에 에르윈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후작은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얼마 전 그라나티 백작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른 혼처를 찾았다고 하더구나.”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게 말이다. 이게 다 무슨 일일까?”

에르윈을 바라보는 후작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혹여 거짓을 고하거나 숨기는 것이 없는지 샅샅이 파고드는 시선이었다.

“그 아이가… 혹시 실수라도 한 건….”

“글쎄다. 그 탐욕스러운 사내가 실수 몇 번 했다고 그 아이를 포기했을까?”

드루쉬아와 파혼하기 전부터 샤프리를 노리던 사내였다. 파혼 소식을 듣자마자 제일 먼저 청혼서를 보내온 것도 그였다. 영지가 인접한 탓에 꽤 오래전부터 샤프리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여자에게 눈이 돌아갔을 수도 있고. 혹은 발칙한 것이 농간을 부렸을 수도 있고. 그건 모를 일이지.”

탁한 청록색의 눈동자에 살기가 어렸다. 샤프리와 관련하여 일이 틀어진 것이 벌써 몇 번째였다.

에르윈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곧 다른 혼처가 들어올 겁니다.”

“그 아이를 결혼시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야. 꽤 오래 공들였는데 이렇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줄이야. ”

“아, 아버지. 제가 샤프리에게 잘 말해보겠습니다. 그라나티 백작의 마음을 돌리도록….”

“몸을 던져 막을 양이면 일이 이렇게 되지도 않았겠지.”

에르윈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쓸데도 없는 것에게 너무 오래 투자했어.”

이미 흥이 식어버렸다. 마이헬러 후작은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 채로 굳어있던 에르윈은 후작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않았다. 세상에서 마이헬러 후작의 성정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에르윈 뿐이었다. 그래서 감히 거역할 꿈도 꾸지 못하고 복종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감히, 다른 누구도 아닌 샤프리가 후작의 눈 밖으로 벗어났다.

에르윈은 그대로 샤프리의 방으로 달려갔다. 방문이 거칠게 열리고 탈의를 돕던 하녀 둘이 에르윈을 보고 놀라 손을 멈췄다.

“오라버니?”

“전부 나가. 당장!”

“네? 네, 공자님.”

당황한 하녀들이 채 나가기도 전에 흥분한 고함이 방 안을 쩌렁 울렸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어떻게 했길래 파혼 통보가 와!”

놀라는 것도 잠시뿐, 샤프리의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스쳐 갔다.

‘레이디 이그레인이 약속을 지켰어.’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징글징글하게 달라붙던 그라나티 백작이 떨어져 나갔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에르윈의 입장은 달랐다.

“진짜로 네가 그랬어? 네가 결혼이 깨지도록 만든 거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이대로 여기 있게 해주세요.”

“너 미쳤어? 이게 결혼만 걸린 문제인 줄 알아! 너는 네가 뭐라고 생각해? 네 쓸모가 없어지면….”

버럭 고함을 내지르는 에르윈의 눈빛이 이상했다.

“오라버니?”

“그냥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이나 들을 것이지 어쩌자고!”

에르윈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힘껏 의자를 걷어찼다. 콰당 소리를 내며 의자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샤프리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왜 그래요? 왜….”

“멍청한 것. 이 미련한 것!”

에르윈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화를 쏟아냈다. 진정하라는 샤프리의 애원도 소용없었다.

에르윈이 평소 예민한 성정이기는 했어도 이렇게까지 거칠지는 않았다. 에르윈은 다가오는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욕설을 뱉었다.

“빌어먹을!”

“오라버니!”

에르윈은 끝내 방문을 박차고 다시 나가버렸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 샤프리도 모르는 어떤 문제가.

‘분명 혼나고 온 걸 거야.’

황궁 연회가 있던 날 에르윈이 여자를 데리고 돌아왔다. 본채에서 멀리 떨어진 별채에 가둬두었지만 샤프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허락받지 않은 짓을 한 거야.’

황궁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과 현장에서 발견되어 파문을 일으킨 아시카. 그리고 피범벅이 되어 끌려온 또 한 명의 여자.

‘글레노아 슈베른. 오클레인 공자의 정부였던 여자야.’

황궁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살인은 치정사건이었다. 왜 에르윈이 그 여자를 데려왔는지는 모르지만 후작의 의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레이디 이그레인이 목표였을 테지.’

오클레인 영지에 후작의 사람들이 드나든 것이 꽤 되었다. 기억하기로는 코랄이 영지로 쫓겨나듯 떠난 뒤부터였다.

‘그런데 내 결혼 문제는 왜?’

또 다른 혼처를 찾을 때까지 시간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에르윈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초조하게 방안을 서성이던 샤프리가 우뚝 멈춰섰다.

‘에르윈 때문이 아니야.’

청혼서를 수락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샤프리를 보던 마이헬러 후작의 눈빛이 떠올랐다. 아무런 감정도 관심도 없던 눈빛. 창고에 있는 줄도 몰랐던 물건을 내다 파는 것처럼 무가치한 어떤 것을 바라보던 시선이었다.

후작에게 샤프리는 사람조차 아니었다. 그저 곱게 키워 적절히 써먹으려다 용도를 잃어버린 물건쯤 될까. 그마저도 쓸모를 잃어서 잊고 있던 어떤 것이었다. 그러다 때마침 쓸모를 찾았는데 그마저도 무산되어버렸다.

‘뭔가 잘못되고 있어.’

샤프리는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비좁은 언덕길은 마차가 오르기 어려운 곳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뒤 샤프리는 말을 타고 가라는 호위 기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걷는 쪽을 택했다.

바스락거리며 낙엽 밟는 소리가 스산한 숲길. 바람이 심하게 불어 드레스가 다리에 휘감겼다.

“앗.”

순간 샤프리의 몸이 휘청거렸다.

“괜찮으신가요?”

뒤따라온 하녀가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예의 바르게 물었지만 도와주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차디찬 태도의 하녀는 얼마 전 마이헬러 영지에서 온 여자였다. 영지에 오래 머물지 않았던 샤프리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 호위를 위해 따라온 이들조차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하녀 하나에 호위 기사가 셋. 후작가의 레이디가 외유 나가는 데 따라온 인원치고는 지나치게 조촐하다.

이틀 전 마이헬러 후작은 갑작스럽게 샤프리에게 저택을 떠나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파혼 건으로 에르윈이 화를 내고 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당분간 자숙하라는 것이 이유였다.

외유를 핑계 삼아 샤프리를 보낸 곳은 별장조차 아니었다. 가끔 샤프리가 마이헬러 후작의 뜻에 크게 거슬렀을 때 훈육을 목적으로 보내던 곳이었다. 성년이 된 이후에는 한 번도 온 적 없던 장소였다.

왜 하필 지금 같은 때 그녀를 본가에서 떨어뜨려 놓는 걸까.

“짐꾼들은 왜 안 올라와?”

“아직 마차가 도착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오늘 중으로는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녀의 대꾸는 무심했다. 샤프리는 당황한 기색을 들키지 않으려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말고삐를 쥐고 걷는 기사들을 조심스레 곁눈질했다.

‘기사가 아닌 것 같은데.’

마이헬러 가문의 기사 정복을 입었지만 검과 석궁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순간 샤프리의 뒷덜미가 쭈뼛 곤두선다. 등줄기를 스치는 서늘한 감각과 아찔한 깨달음.

‘이제 내가 필요 없어진 거야?’

샤프리는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쓸모가 다한 소모품이라는 사실을.

결혼으로 마이헬러 후작가를 떠난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언제든 쓸모가 다하는 순간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운명은 하나였다. 후작이 살아있는 한 결코 벗어나지 못할 운명.

심장이 빠르게 박동했다. 걷고 있는 다리가 후들거려 엎어질 것만 같았다.

수도는 탈리온과 이그레인, 오클레인 세 가문의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그 와중에 후작저를 떠난 것은 마이헬러 후작의 지시 때문이었다. 샤프리 본인은 원치 않았던 갑작스러운 외유.

‘드루는 소식을 들었을까? 와주기는 할까?’

때를 놓치지 않고 드루쉬아에게 연락했다. 달리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아니 반드시 드루쉬아여야만 했다.

‘올 거야. 반드시 와야 해.’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샤프리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아가씨, 해지기 전에는 도착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비워둔 곳이라서 할 일이 많습니다.”

“알아, 아는데. 오늘따라 좀 힘이 드네.”

떨리는 목소리가 나올까 봐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말을 태워드리겠습니다.”

“못 들었어? 나는 말 같은 거 탈 줄 몰라.”

진작 승마라도 배워 둘걸. 혹시 도망칠까 봐 가르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러니까 제가 함께 타고 가겠다는 말이었습니다.”

호위 기사가 옆으로 다가오며 재차 채근했다.

“싫다고… 했잖아.”

레이디가 거절하는데 강요하는 기사라니. 샤프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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