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16화 (116/153)

#116.

아시카조차 놀라 목소리가 높아졌다.

“영지전이라니요. 근거가 빈약해 고발할 수도 없는 일로 영지전은 가당치 않아요.”

“그러니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말입니다. 나는 억울한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니 가문의 힘으로 정의를 확인해야겠습니다.”

이미 작정하고 온 듯 오클레인 후작은 거침없이 말을 뱉었다. 이후 벌어질 사태나, 영지전을 벌일 상대가 이그레인 공작가라는 사실도 개의치 않았다.

이는 사적인 분쟁을 기사들이 결투로 매듭짓는 것과 비슷했다. 다만 영지전은 가문 간의 명백한 침해 행위가 발생했을 경우에 가능하다. 지금 상황은 요건이 성립되지 않는 애매한 경우였다.

“이건 억지요! 아무것도 입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영지전은 가당치 않소!”

웨이브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오클레인 후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아들이 살해당했고 이그레인 소공작은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두 아들을 모두 잃었다. 이제 오클레인 후작가는 방계의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제 자식에게 물려주지도 못할 작위와 영지였다. 억울하고 분해서 이대로는 물러날 수가 없었다.

“폐하! 이건 명백히 가문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예외를 인정해주십시오!”

“말도 안 되오! 애당초 영지전 조건에 맞지도 않아!”

귀족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된다, 안 된다. 가문간의 분쟁이니 양측의 자발적인 의사가 중요하다, 황제의 개입은 관례에 어긋난다, 등등. 회의실은 의견을 나누는 귀족들로 인해 시끄러워졌다.

가장 앞쪽에서 지켜보던 황제는 그런 귀족들의 반응을 느릿한 시선으로 훑고 지나갔다. 예의 따위 잃어버린 귀족들의 분위기는 개의치 않았다. 좀 더 큰 소리가 나기를, 더더욱 과열되어 시끄러워지기를 바라는 양.

내내 말이 없는 마이헬러 후작은 이제 무료하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예상되는 결말을 놓고 흥미를 잃어버린 관객처럼.

그런 그를 주시하는 시선이 있었다. 모두가 큰소리를 내며 설왕설래하는 한가운데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드루쉬아였다.

드루쉬아와 마이헬러 후작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한없이 무겁고도 무거운 짙푸른 눈동자. 그 의미 모를 시선에 후작의 눈썹이 움찔 동요했다.

마침내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오클레인 공자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바일세.”

황제의 목소리가 들리자 귀족들이 일시에 입을 닫았다. 왜소한 체구의 중년 사내는 황제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다소 파리해 보였다.

“짐은 어느 쪽의 손도 들어줄 수가 없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진실은 이그레인 소공작만이 알 테지. 그러니 이 문제는 오클레인과 이그레인 양쪽이 해결을 보는 것이 맞을 터. 나는 영지전이 합당하다고 판단하네.”

“폐하!”

웨이브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황제는 더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내 의견에 반대하는 자가 있는가?”

귀족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그레인과 분쟁을 피하려고 고발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처럼, 황제가 직접 나서서 손을 들어준 일에 반대할 수도 없었다.

아시카는 희게 질린 얼굴로 제 손을 꽉 맞잡았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영지전이라니.’

이그레인은 최소한의 기사와 병사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본래 기사의 가문이 아니기 때문에 정해진 수가 극히 적었다. 그래서 대공령에 주둔한 병력은 사실상 모두 용병이었다.

대공령의 병력은 빼 올 수가 없고 이그레인 영지에 있는 사병은 수가 적을 뿐 아니라 전쟁을 경험해 본 적조차 없었다.

반면 수도와 멀리 떨어져 국경지대와 가까운 오클레인 후작가는 보유한 병사들의 수만 해도 이그레인의 배가 넘었다. 탈리온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영지전을 내세울 만큼은 충분했다.

거기다 황제가 대놓고 손을 들어줬으니 암암리에 또 어떤 지원을 해줄지도 모를 일.

‘싸움이 될 리가 없어.’

어쩌면 이 일은 단순히 영지전에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후폭풍이 뒤따라올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시카의 시선은 회의실 가장 뒤쪽에 앉아있는 마이헬러 후작에게 향했다. 그는 이 상황을 느긋하게 관전하고 있었다.

‘설마 이 일도 마이헬러 후작이 꾸민 거야? 어떻게? 어떻게 했기에 일을 이 지경까지 몰고 가?’

황태후가 마이헬러의 사생아라고 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오클레인 후작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황제라지만 애당초 코랄을 움직인 것은 마이헬러 후작이 아니었나.

영지전으로 인해 이그레인은 혼란에 휩싸일 것이고 그 사이에 마이헬러 후작이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후작은 자신을 외부로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이 모든 혼란을 조장한 것이다.

그가 이성을 잃고 직접 나선 것은 단 한 번, 이븐을 납치할 때뿐이었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마이헬러 후작이 뒤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아시카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맞잡은 제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내가 이그레인에는 재앙이 되는 거야.’

차라리 일찍 모든 걸 내던지고 떠나버릴걸. 웨이브가 시키는 대로 결혼해서 제국을 떠났어야 했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드루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기묘한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다들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암암리에 도는 탈리온과 이그레인의 소문. 과연 이 엄청난 추문에 대해 탈리온 공작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동요 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드루쉬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그레인에 대한 영지전은 탈리온에서 받아들이겠습니다.”

“헉.”

“이게 무슨….”

귀족들은 연이은 충격으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드루쉬아의 주장은 제국법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나선 것은 오클레인 후작이었다.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탈리온은 이 문제에 관여할 권한이 없습니다.”

“아니, 권한은 충분합니다. 이그레인 소공작이 아닌 탈리온 공작부인에 대한 음해로 간주하고 기꺼이 오클레인과의 영지전을 치르겠습니다.”

귀족들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제조차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만 웨이브는 놀란 표정을 황급히 지우고 침묵했다. 드루쉬아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예측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탈리온의 주장은 억지입니다! 탈리온 공작부인이라니요! 결혼은커녕 약혼했다는 소식조차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클레인 후작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미 반쯤은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제국의 검이자 방패인 탈리온이었다. 멸문을 각오하지 않는 한 누구도 감히 영지전을 입에 올릴 수 없는 유일한 상대.

드루쉬아는 시린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시끄러워질까 봐 비공식적으로 식을 올렸을 뿐입니다.”

“말뿐인 관계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탈리온 공작께서는 억지 쓰지 마십시오.”

“증거를 보여드리면 되겠습니까?”

드루쉬아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외투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가 꺼내 든 것은 문서 한 장이었다.

“관사에 신고된 혼인 서약서면 충분하겠군요.”

누군가 그에게서 문서를 받아 루테넌 백작에게 가져갔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귀족들의 시선이 온통 백작의 손에 집중되었다. 건네받은 문서를 꼼꼼히 확인한 진행자는 헛웃음을 흘렸다.

“절차대로 작성된 문서가 맞습니다.”

드루쉬아가 내보인 것은 공식 혼인 서약서였다. 아시카와 드루쉬아의 친필 서명과 관사에 신고가 완료되었다는 직인까지 찍혀있는 진짜 혼인 서약서.

웨이브는 말을 잃었고 아시카는 혼이 빠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째서 저 서명이….’

생각이 난다. 드루쉬아의 요구로 백지 문서에 서명했던 기억이.

설마 그것이 혼인 서약서로 둔갑해서 눈앞에 나타날 줄이야!

아시카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눈을 감았다.

탈리온 저택에서 머물던 며칠 전, 그녀는 드루쉬아에게 진실을 고백했다. 내내 혼자만 끌어안고 있던 무겁고도 큰 짐을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그에게 내보였다.

그리고 드루쉬아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녀를 돕기 위해 가장 강력한 패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혼맥이었다. 이제 누구든 아시카에게 적의를 내보이는 자는 이그레인과 탈리온 모두를 상대해야 한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당장 주저앉을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정처 없이 헤매던 시선이 드루쉬아와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의 입술이 조그맣게 말을 건넸다.

사랑해, 라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작은 속삭임. 누가 보고 있다는 사실도 신경 쓰지 않았다.

먹먹한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당장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아서 아시카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혼자가 아니야.’

복잡한 생각을 차치하고 그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오클레인 후작이 던진 영지전이라는 강력한 패는 탈리온이 받아냈다. 이그레인과 탈리온의 혼맥이라는 엄청난 사건으로 인해 귀족들은 혼란에 빠졌다. 마이헬러 후작의 얼굴도 사납게 구겨졌다.

혈통부터 꼬여버린 황실과 제국의 가장 큰 대가문 둘의 결합. 충격적인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이제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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